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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연중 제 4주간 수요일 / 기경호 신부 ~

2026년 2월 4일 (녹) 연중 제4주간 수요일
(2사무 24,2.9-17 ;마르 6,1-6)


제1독서
<인구 조사를 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2.9-17

그 무렵 다윗 2 임금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대의 장수 요압에게 말하였다.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두루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시오.
내가 백성의 수를 알고자 하오.”
9 요압이 조사한 백성의 수를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칼을 다룰 수 있는 장정이 팔십만 명,
유다에서 오십만 명이었다.
10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11 이튿날 아침 다윗이 일어났을 때,
주님의 말씀이 다윗의 환시가인 가드 예언자에게 내렸다.
12 “다윗에게 가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면서 일러라.
‘내가 너에게 세 가지를 내놓을 터이니, 그 가운데에서 하나를 골라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13 가드가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알렸다.
“임금님 나라에 일곱 해 동안 기근이 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을 뒤쫓는 적들을 피하여
석 달 동안 도망 다니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임금님 나라에 사흘 동안 흑사병이 퍼지는 것이 좋습니까?
저를 보내신 분께 무엇이라고 회답해야 할지
지금 잘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14 그러자 다윗이 가드에게 말하였다.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15 그리하여 주님께서 그날 아침부터 정해진 날까지 이스라엘에 흑사병을 내리시니,
단에서 브에르 세바까지 백성 가운데에서 칠만 명이 죽었다.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17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다윗이 주님께 아뢰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씨앗 Semina Verbi: 4주 수요일
 
 
숫자와 얼굴, 거부와 믿음 사이에서


오늘의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긴장을 보여줍니다. 곧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유혹과, 하느님께서 겸손한 방식으로 현존하실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백성의 인구 조사를 명령합니다. 본문은 군사 수치를 정확히 제시하지만, 곧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위기를 드러냅니다.


인구 조사를 마친 뒤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2사무 24,10) 그는 하느님이 아닌 자신에게 의지하여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을 더 신뢰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백성을 숫자로 환원함으로써 각 사람이 지닌 존엄과 약속을 잊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벌은 임의적 보복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치시면서도 동시에 백성의 고통 앞에서 "재앙을 내린 덧을 후회하시며"(24,16) 마음 아파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을 바로잡으려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허락하시어 인간을 진리로 이끄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숫자의 유혹은 여전히 강합니다. 언론은 경제 성장률, 여론조사 비율, SNS 팔로워 수와 같은 통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의 생동성을 출석률이나 재정 수치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최근의 사회 보고서들이 보여주듯이, 고립과 관계적 빈곤은 특히 청년과 노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숫자에 집착하는 사회는 사람의 얼굴을 잃기 쉬움을 경고합니다.


복음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눈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시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걸려 넘어집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아 버렸고, 이는 단순한 지적 의심이 아니라 관계적 단절을 뜻합니다.


기적의 부족이 아니라, 깊이 없는 익숙함이 믿음을 가로막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에 놀라시며, 몇몇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 외에는 큰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의 태도입니다. 불신은 신뢰를 거부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이들이 하찮게 여겼던 곳, 곧 나병 환자와 가난한 이들, 그리고 피조물의 작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거부한 나자렛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이러한 시각을 계승하여, 구조나 계산보다 인간의 존엄을 우선할 것을 강조합니다.


최근 교회 문헌들도 참된 발전은 국내총생산만으로 측정될 수 없으며, 사회적 신뢰와 약자에 대한 돌봄이 핵심 기준임을 분명히 합니다. 나자렛의 불신은 오늘날 우리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의 구체적인 초대를 전합니다. 다윗은 백성이 계산 가능한 군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공동체임을 배웁니다. 나자렛은 고통스럽게나마 하느님의 아들이 너무 가까이 계셨기에 거부되었음을 드러냅니다.


신뢰의 위기와 비인간화가 심화되는 이 시대에, 오늘의 말씀은 숫자에서 얼굴로, 편견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합니다. 통제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믿음을 선택할 때,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멈추시고 조용하지만 실제적인 치유의 길을 여실 것입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