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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사순 제 4주간 금요일 / 기경호 신부 ~

2026년 3월 20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 2,1ㄱ.12-22; 요한 7,1-2.10.25-30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2,1ㄱ.12-22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씨앗 Semina Verbi:사순 4주 금요일
 
세상을 역류하는 의인의 삶


오늘 전례는 역사를 관통하는 한 드라마를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곧 의인의 거부입니다. 지혜서는 불의한 자들의 입을 통해 “의인에게 젗을 놓자”라고 말합니다(2,12).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사는 “의인”(δίκαιος)은 늘 덫(ἐνεδρεύσωμεν), 곧 계획된 폭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의 삶 자체가 죄를 폭로하기에 그는 미움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악인의 삶을 고발하기에 박해를 받습니다. 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에도 반복되는 영적 역학입니다.


지혜서는 이어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라고 말합니다(2,20). 이는 저주받은 죽음을 암시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표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2,21)라는 말씀처럼, 이는 육체적 시력이 아니라 영적 눈멂이며 생명의 줄기를 끊어 죽음을 자초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인신매매, 노동 착취,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가 수백만에 이르는 현실 속에서 정의를 외치는 이는 불편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음을 전합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7,30)라는 말씀에서 “때”(ὥρα)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날 구원의 결정적 순간을 뜻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출신만을 알 뿐, 그분의 신적 기원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육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지만 영원한 신비 안에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문화적 인물로만 축소하려는 경향 속에서 같은 오해가 반복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갈등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상업이 번성하던 시대에 그는 복음적 가난과 작음을 선택하였고, 나병 환자와 함께하며 평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힘으로 차별과 불의와 소외를 거슬러 모두를 품는 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삶은 성경적 의인의 구체적 구현이었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인간 존엄이 침해될 수 없으며 경제는 인간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평등과 배제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참행복을 사는 삶은 낭만이 아니라 복음적 저항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가 어느 논리에 서 있는지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회개(μετάνοια)는 생각과 방향의 근본적 전환을 뜻합니다. 의인을 위협으로 보는 태도에서 부르심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강제가 아니라 파견하신 아버지께로부터 옵니다. 복음의 진리가 지배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에도 그분 안에 머무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박해는 정의를 파괴하지 못하며 오히려 정화합니다. 거부당하는 의인은 하느님의 마음에 따른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됩니다.


▶기경호프란치스코 of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