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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8일 (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요나 4,1-11; 루카 11,1-4) 제1독서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씨앗 Semina Verbi: 연중 27주 수요일 제1독서에서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자 “매우 언짢아서 화를 냅니다”(요나 4,1). ‘매우 언짢아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רַע רַב)를 직역하면 ‘그것이 그에게 아주 악하게 보였다’는 뜻으로, 니네베의 구원이 요나에게는 재앙처럼 느껴졌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화나다’는 ‘뜨겁다, 타다’라는 뜻을 지니며, 그의 분노가 온몸을 태울 듯 격렬했음을 나타냅니다. 요나가 그토록 분노한 것은 편협한 선민의식과 자비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니네베의 회개가 자신들의 민족적 특권을 침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한낱 아주까리도 아끼는 요나에게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십이만여 명”의 사람들과 가축들까지 아끼시는 당신의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비(חֶמְלָה)를 깨우쳐 주십니다(4,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첫 단어 “아버지”(Πάτερ)는 루카 복음의 중심 신학, 곧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인식하는 시선을 드러냅니다. 특별히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루카 11,4)라는 구절은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명확히 합니다. “우리의 용서가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조건이 되며, 우리가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는 무효가 될 것입니다.”(테르툴리아누스, 주님의 기도에 대한 논고) 우리가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는 것은 곧 우리가 먼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권리나 자선이 아니라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쟁이"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요나의 좁은 마음을 벗어나 주님의 기도에 담긴 보편적인 자비와 형제애를 실현한 탁월한 모범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자비의 체험과 실행은 그의 영성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는 『유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1-2절) 이는 요나가 니네베의 구원을 ‘악’으로 여긴 것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끌어안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온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우리는 여전히 요나의 분노와 유사한 배타적인 편견과 분열에 갇혀 있습니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어 혐오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용서를 거부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나만 독점하려는 이기심이 만연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진실로 바치려면,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이’와 ‘원수’까지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형제애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모든 이를 품을 만큼 넓어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가, 그 자비를 세상에 흘려보내는 평화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기경호프란치스코 of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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