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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스크랩] 축일 : 11월 16일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대 제르투르다

 

축일:11월16일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Santa Margherita di Scozia Regina e vedova

Sta. Maragarita de Scotland

St. Margaret Queen of Scotland

Saint Margaret of Scotland

c.1045 in Hungary -

16 November 1093 at Edinburgh Castle, Scotland,

Canonized;1251 by Pope Innocent IV

Margherita = perla, dal greco e latino(=pearl, from the Greek and Latin)

 

 

에드워드 두트레메르 왕자와 독일 공주 아가타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의 조카이다.

그녀는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자랐으며, 하스팅 전투를 피하여 스코틀랜드로 갔다.

그녀는 여기서 말콜이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되었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펨라인에 성삼위 성당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녀이다. (부산대교구홈에서)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 축일:8월16일.게시판131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스코틀랜드의 마르가리타는그녀가 자신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해방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의미했다.

 

마르가리타는 본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헝가리 출신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정복자 윌리암으로부터 도망가다가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파선당했다.

말콤 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아름답고 우아한 마르가리타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1070년 던펌린(Dunfe rmline)성에서 결혼했다.

말콤 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마치 그의 나라처럼 거칠고 무례했다.

마르가리타에 대한 말콤의 사람이 극진하여 그녀는 그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그의 생활을 바르게 하며 그가 덕을 갖춘 왕이 되도록 도왔다.

그는 모든 집안 일을 그녀에게 맡기고 때로는 국사 문제에까지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마르가리타는 예술과 교육을 장려하여 그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종교 개혁을 위해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도록 촉구하고 사제들과 신자들 가운데 있는 공통된 종교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토론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것은 독성 또는 불순한 결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러 개의 교회도 세웠다.

 

마르가리타는 왕비인 동시에 어머니였다. 그녀와 말콤 사이에는 여섯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이들의 종교 교육은 물론 다른 공부까지도 직접 지도 감독했다.

 

그녀는 집안 일과 나라 일로 대단히 바빴지만 세상사와는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녀의 사생활은 엄격했다.

그녀는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신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검소한 식사와 짧은 수면을 취했다.

그녀와 말콤은 두 번의 재계를 했는데 한 번은 부활 전에 한 번은 성탄 전에 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일어나서 미사에 참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가난한 사람 여섯 명의 발을 씻어 주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녀는 공공 장소에서도 언제나 거지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 명의 고아와 24명의 어른을 먼저 먹이지 않고는 절대로 식탁에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1093년에 윌리암 푸퍼스 왕이 알위크 성을 불시에 공격하였을 때 말콤왕과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살해되었다.

이미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던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살해된 지 4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애덕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깨꿋한 길’과 ’지저분한 길’이다.

’깨끗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 돈이나 옷등을 희사하는 것이다.

’지저분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봉사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손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두드러진 덕행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마르가리타는 물질적 선물을 줄 때도 매우 너그러웠지만 병자들을 방문하여 자기 손으로 그들을 직접 간호해 주기도 했다.

그녀와 그의 남편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무릎을 꿇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저분한 애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이야기에는 지헤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다.

그녀가 침묵할 때에는 그녀의 침묵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훌륭한 행동은 그녀의 착실한 성격과 너무나도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덕을 갖춘 생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고트, 마르가리타의 고해 신부)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046년경 자기 아버지가 유배 생활을 하던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의 왕 맬콤 3세와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다.

사랑과 지혜로써 참된 어머니요 여왕으로서의 뛰어난 본보기가 되었다.

1093년 에든버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현장)에서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

 

남편과 아내는 혼인 계약으로써 "이미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되었으니" 인격과 행위의 깊은 결합으로써

서로 도와주고 서로 봉사하며 동시에 이로써 자신들의 결합의 의의를 체험하며 날로 더욱 깊게 한다.

이 깊은 일치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 교환이므로, 자녀의 행복이 요구하듯이, 부부의 완전한 신의와 그 일치의 불가해소성을 강요한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천상 원천에서 솟아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모델 삼아 구성된 이 다각적 사랑에 풍부한 당신 축복을 내리셨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충실의 계약으로써 당신 백성을 도와주셨듯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교회의 정배께서 혼인성사로써 신자 부부를 도우러 오신다.

그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부부도 역시 서로의 애정과 변치 않는 충실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진정한 부부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

이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느님께로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 수행에 있어서 도움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케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다.

이 성사의 힘으로 신자 부부는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의 전 생애를 신망애 삼덕으로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공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따라서 부모들 자신이 솔선 수범하고 가정적 기도 생활을 실천하다면

자녀들과 집안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인간적 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또한 부성과 모성의 직무와 품위를 갖춘 부부는 자녀 교육의 의무, 특히 자녀들의 종교 교육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교육의 의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가정의 산 멤버로서 그들 나름으로 부모들 성화에 이바지한다.

감사하는 마음과 효심과 신뢰로써 부모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할 것이며 부모를 역경과 노후 고독 중에 자녀답게 봉양해 드릴 것이다.

홀몸의 신분을 결혼 성소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강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가정들은 서로 영적 보화를 후히 나눔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교적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맺어진 계약을 표상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혼인성사로 이루어졌으므로,

부부애와 풍부한 자녀 번성과 단합과 충실로써뿐 아니라 가족 전원의 사랑의 협력으로써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세상에 현존시켜 드리며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가톨릭홈에서)

 

 

마르가리타라 함은 진주(眞株)를 의미하는 라틴어로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마르가리타 왕후도 수많은 스코틀랜드의 여러 왕비 중에서 아름다운 진주와 같은 덕행을 가진 성녀였다.

 

그년 앵글로 색손 조(朝)의 최후의 국왕 성 에드워드의 왕녀로서, 덴마크 사람이 잉글랜드에 침입해

아버지가 헝가리에 피난하고 있을 때인 1046년 태어나 교육을 잘 받으며 경건히 자라나 침입자가 국외로 쫓겨나자 부모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위 얼마 안되어 언니 크리스티나가 수도원에 들어갔고, 설상가상으로 1066년에 왕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전부터 호시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복자로서 유명한 플라스노르만디의 왕 윌헬모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대군을 인솔하고 침입해 왔으므로 마르가리타는 오빠 에두가르도 등과 더불어 대륙으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타고 있던 배가 스코틀랜드의 해안에 표착(漂着)하여 그 나라의 왕 말콜 3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여러 차례 망명의 신세가 된 마르가리타는 점점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마음을 올리며

스코틀랜드 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실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사람들에게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어 그녀를 가슴 깊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특히 나이가 아직 젊었던 말콜 3세는 그녀의 훌륭한 인격에 감동되어 간곡히 왕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으므로

마르가리타는 주위의 사정으로 보아 그에게 일생을 의탁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의라 생각하고 쾌히 이를 승낙했다.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마르가리타는 자기 일신의 영화를 찾지 않고 다만 백성을 염려하고

본래 국사에 신경을 쓰지 않던 왕을 격려하여 선정(善政)을 하게 하고, 여섯 왕자와 두 왕녀의 어머니로서 손수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그 중에서 후에 왕위에 오른 다윗과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마르릴라 두 사람은 특별히 성인이라는 소문이 높았다.

 

마르가리타는 모든 백성, 그 중에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따뜻한 자비심을 발휘하여 종종 생활비를 떼어 그들을 도와 주었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식탁에 앉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민들간에 주위가 인산 인해를 이루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다행히 왕도 매우 인자한 사람으로서 마르가리타의 자선 사업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에 협력해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르가리타가 이처럼 가련한 이들을 위해 진력한 것은 원체 그 열렬한 신앙에서 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선 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다른 의무에 있어서도 결코 게을리 한 적이 없고, 한 밤중에도 일어나

궁중의 성당에 가서 날이 샐 때까지 기도에 골몰한 적도 가끔 있어 그곳에서 거행되는 매일 아침 미사 성제에는 빠짐없이 참여했다.

더구나 그녀는 겸손의 마음이 깊어 종종 고해 신부에게 자기의 결점에 대해 주의를 주도록 간청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이외에 성당 건축과 유지를 위해 재산을 희사하기를 즐기며 왕의 즉위의 대전식이 거행된 즘펠무린에 화려한 세 성당을 세워 거룩하신 삼위께 봉헌하고,

그곳을 왕과 자기와 자녀들의 묘소로 정하고, 또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그 성당의 성직자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사제복을 손수 만들던가 혹은 타인에게 만들게 하여 가난한 사제에게 선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르가리타가 이 같은 성스러운 생활을 보내기를 23년, 외적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자 왕은 황태자와 더불어 이를 맞아 싸우기 위해 군대를 진격시켰으나 두 사람 모두 전사했다. 이리하여 비탄에 빠진 마르가리타는 마침내는 중병에 걸려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때는 1093년 11월 16일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성인 명부에 기입한 교황은 인노첸시오 4세이고,

그녀를 다시 스코틀랜드의 수호 성녀로 모신 교황은 클레멘스 10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St Gertrude - VIEIRA, Jacinto

c. 1725, Painted wood.Monastery church, Aruca

 

축일:11월16일

성녀 대 제르투르다

Santa Geltrude (Gertrude) la Grande Vergine

ST. GERTRUDE the Great

St. Gertrude of Helfta

1256 at Eisleben, Germany -

on a Wednesday of Easter season in 1302 of natural causes(Monastero di Helfta,Germania)

Canonized ;never formerly

canonized; universal feast day declared in 1677 by Pope Clement XII

Patronage ;nuns, travellers, West Indies

Geltrude = la vergine della lancia, dal tedesco

 

 

이 성녀는 흔히 "대" 제르뚜루다라 불린다.

다섯 살 때에 그녀는 삭소니의 헬프타 수녀원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자랐으며,

이 수녀원을 떠난 적이 전혀 없는 듯하다.

여기서 그녀는 성녀 멕틸다의 제자이자 절친한 벗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특별한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공동체 안에서 무슨 직책은 맡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를 거의 관상생활로 보냈는데, 25세 때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 때부터 제르뜨루다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교부들의 저서와 전례에 정신을 집중하였다.

 

또 그녀의 생활은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으며,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둔 것이 소위 "제르두르다와 멕틸다의 묵시"라 부르는 전집이다.

 

이 책은 중세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예수 성심께 대한 제르뚜르다의 놀라운 신심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헬프타에서 운명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시성된 사실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글레멘스 12세는 전교회가 그녀의 축일을 지내도록 지시하였고,

서인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부산대교구홈에서)

 

 

성녀 제르트루다는 13세기의 위대한 신비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성녀 맥틸다(Mechtild)와 더불어 그녀는 혼인의 신비라 부르는 깊은 영성을 살았다.

즉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녀의 영성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심에 깊은 인격적 일치를 이루며

자신을 삼위일체의 생명 그 자체 안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신심이 결코 아니었다.

제르트루다는 전례의 리듬에 따라 살았으며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

전례와 성서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신심을 표현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주제와 표상을 발견했다.

그녀의 개인 기도와 전례 사이에는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제르트루다의 생애는 그리스도인 생활이 기도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지이다.

개인적 기도와 전례적 기도,일상적인 기도이든 신비적인 기도이든

언제나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기도가 그리스도인 생활이다.

 

"주님, 당신은 하느님과 같으신 당신의 마음, 당신 천주성의 은밀한 보화를

내 모든 행복의 원천이 되도록 너무나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에게 주시며

당신의 은밀한 우정에로 나를 받아들이셨나이다.

때로는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 간의 특별한 당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나누어 주시고

때로는 우리 서로간의 특별한 상호 우정 표시로 주셨나이다.

당신은 너무나도 자주 당신의 사랑어린 애무로써 내 영혼을 녹여 주셨기에,

내가 만일 당신의 넘쳐 흐르는 은혜를 몰랐다면 나는 너무 놀라서

당신의 복되신 모친도 그렇게 놀라운 애정과 사랑의 표시를 받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라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성녀 제르투르다 생애와 계시, 2편 23장)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헬프타의 성녀 맥틸다 축일:11월16일(11월19일)

 

 

1256년 튀린지아의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소녀 시절부터 헬프타에 있는 시토회 수녀원에 받아들여져 특히 철학과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회개하여 완덕의 길에서 놀랍게 진전했고 기도와 관상에 전념했다. 1301년 11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흔히 ‘위대한 게르투르다’(Gertrudis, 또는 제르트루다)로 불리는 성녀는 1256년 1월 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1261년 아이슬레벤(Eisleben)에 있는 헬프타 시토회 수녀원 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수도원은 성덕으로 유명하였는데, 이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인 하크본(Hackeborn)의

게르투르다는 수녀원을 지혜롭게 운영했으며 그곳을 문화와 영성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성녀 게르투르다는 수녀원장의 동생이면서 수련장이었던 메크틸드(Mechtild) 수녀 밑에서

개방적이고 휴머니즘적 교육을 받았다.

15세 때 학교를 마치고 수녀회에 입회하였는데, 그녀의 지적 열망과 타고난 지능으로

베네딕투스(Benedictus) 성인의 영성뿐 아니라 음악, 문학, 문법학, 예술 등에 능통하였다.
  
그런데 1281년 1월 27일 예수의 발현을 체험하고 나서는 세속적인 학문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전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또한 그녀의 생활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영적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삶과 그리스도의 발현,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비로운 은총적 계시를 다룬

5권의 책이 “하느님의 사랑의 사자”(Legatus divinae pietatis)로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 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의 체험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성사에서 ‘예수 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리어졌고,

예수 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겨졌다.

그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지고,

그녀의 풍부한 신비 경험으로 ‘독일의 테레사’라고도 칭해진다.
  
1302년 11월 16일 헬프타 수도원에서 중병을 앓던 그녀는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5세였다. 게르투르다는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 독서, 찬가에서 그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았다.

1738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는 다른 게르투르다와 구별하고

그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성녀 제르뜨루다의 (신적 사랑에 대한 권고 말씀)에서

(Lib. 2, 23, 1.3.5.8.10: SCh 139, 330-340)

 

나에 대해 당신이 지니신 생각은 평화의 생각입니다.

 

주 하느님이시여, 나의 창조주시여, 내 영혼이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고,

나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어도 당신의 영원한 사랑이 나를 감싸 준 당신의 그 자비가

나의 내심으로부터 당신을 찬양하게 해주소서.

주여, 나는 이제 내 능력 미치는 데 까지 주님이 나에 대해 지녀 오신 무한한 자비에 감사 드리고

주님의 관대하심과 주님의 인내심을 찬미합니다.

 

나는 유년 시절, 소녀 시절 그리고 청년 시절인 스물다섯살까지는

앞뒤를 못 가리는 철없는 사람으로 지내 왔습니다.

그때 나는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말하고 행동하고 또 내 행위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악에 대해 느끼게 된 자연적인 혐오감을 통해서

또는 나를 이끌어 온 선에 대한 매력을 통해서

또는 내 친척들의 야단법석을 통해서

주님이 나에게 내 행위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보내 주실 때,

나는 그 경고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이교도들 가운데 사는 이교도인 양, 내 하느님 당신께서 선행에 보답해 주시고

악행을 벌하신다는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께서 나에게,

소녀 시절부터 즉 다섯 살의 어린이 시절부터 당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수녀원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심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시여,

나는 이제 내 죄의 보속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의 온갖 고난을,

곧 그분이 말구유의 짚풀 위에서 처음 울던 때부터 유년 시절의 무력함, 소년 시절의 허약함,

청년 시절의 고통을 참아내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숙이며 큰소리로 외치시면서

숨을 거두실 때까지의 고난을 바쳐 드립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시여,

내 게으름의 대신으로 당신 외아드님께서 아버지의 옥좌의 정상에서 우리 땅에 내려오신 때부터

자신의 승리한 육신의 영광을 아버지의 면전에 바쳐 드릴 때까지 지내 오신

거룩한 생활을 그 완전하신 생각과 말과 행위와 함께 바쳐 드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의 깊은 심연 속에 침몰해 들어가 주님의 지극히 뛰어난 자비와 함께

그 감미로운 사랑을 찬미하고 흠숭합니다.

자비의 아버지시여, 내가 이처럼 타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주님이 나에 대해 지니신 생각은

고통의 생각이 아니라 평화의 생각이었고,

당신은 당신의 무수히 크나큰 은혜로써 나를 높여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은혜들 가운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당신 우정의 친밀함을 보태어 주시고

여러 방법으로 천주성의 고귀한 장막인 당신 아드님의 성심을 열어 주시어

거기에서 기쁨의 온갖 보화를 풍부히 주셨습니다.

 

더욱이 주님은 죽을 때나 죽음 후에 나에게 은총의 선물을 주시리라는 확고한 약속으로

내 영혼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밖에 다른 선물을 내가 받지 않았다 해도, 그것만 생각해도,

내 마음은 산 희망으로 당신을 바랐을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수많은 성녀 중에 후일 대(大)자를 붙이게 된 성녀는 불과 2명뿐이다.

즉 성녀 대 데레사와 성녀 대 제르트루다이다.

이 분들은 모두 학문에 조예가 깊으며 신학, 특히 신비 신학에 관한 명저를 남겼으며,

교회의 교부들과 비견되는 여성,다시 말해서 교모(敎母)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제르트루다는 1254년, 독일의 트린기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에 헬프타 마을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맡겨져 교육을 받았으며,

성녀 메히틸다의 교육을 받고, 연령이 차서 수녀가 된 후에도 역시 계속 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탁월했으며 학문을 즐겨 라틴어에 능통하고,

고전문학에 있어서는 당시 전문 학자에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몸은 건강한 편이 아니었으나 탁월한 정신력을 갖고 있었고,

직무 이행에 있어서의 타인이 추종할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하며,

여가를 이용해 고전문학과 성 아우구스티노 등의 교부들의 저서를 습득했다.

그러는 동안 세속적 학문에 취미를 붙이게 되어 자연히 묵상과 심령 수행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그녀는 26세 때에 이르러서 더할 수 없는 마음의 불안을 느끼게 되었으며

지금까지의 생활로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의구심과 아울러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1283년 1월 27일 밤 바로 끝기도가 끝난 때의 일이었다.

주 예수께서 그녀에게 발현하시어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직접 그녀를 인도해 줄 것을 약속하셨다.

사랑하던 주님과의 사이에 가시밭이 가로놓여 괴로움을 면치 못하던 때,

주님께서 그것을 헤치고 과연 들어 안아주시는 기쁨이었다.

 

그 후부터는 주님께서 항상 제르트루다의 곁에 계시며, 때로는 훈계하시고,

때로는 위로하시며, 때로는 칭찬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는 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가끔 발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그녀의 나날은 완전히 주님과의 일치된 생활이었으며

형용할 바 없는 평화와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영혼의 신비 생활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와 고행에 열중한 영혼에게

하느님께서 가끔 보상으로 주시는 선물이므로

세속 사물에 빠져 초자연적 사물에 미숙한 이에게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제르트루다는 부모를 대하는 아이같이 주 예수를 신뢰했고, 또 주님께서는 깊은 애정으로 그녀를 대하셨다.

하루는 주님께서 그녀의 지도자 메히틸다에게

“나는 감실이나 제르트루다의 마음 안에 머문다” 고 까지 말씀하셨을 정도였다.

 

이같이 주님께서 제르트루다에게 갖은 은혜를 베푸신 것은, 다만 그 한 사람을 위함이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그 신비계를 많은 이들에게 알게 하여 영혼에게 신익을 얻게 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명해 이를 책에 기록하도록 하셨다.

 

겸손한 제르트루다는 자기 몸에 지닌 즉전을 세상에 공포함을 원치 않았으나,

주님의 명령으로 그 뜻에 따라 솔직히 이를 기록했다.

“하느님의 사랑의 사자”라는 책이 곧 그것이다.

그 후 예수께서는 다시 그녀의 교훈을 기록하라 하셨다.

병석에 누워있는 제르트루다는 친근한 자매에게 구술한 바를 기록케 하여

다시금 “제르트루다와 메히틸다의 묵시”라는 일대 역작을 남겼다.

이 책의 내용은 성체, 주님의 수난, 성모 마리아 및 연옥에 관한 4부로 되어 있으며,

신비생활의 지도자로서 후세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유익함을 주었는지 모른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푼 것은 이로써 세인이 수도 생활의 존귀성을 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한편 주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셨으므로 그녀의 전구로 현저한 기적이 나타났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녀의 기도를 청하러 수도원에 모여들었다.

 

1324년, 제르트루다의 영혼은 세상을 하직하고 그리운 배필을 맞으러 천국으로 떠났다.

그 임종 때에는 자매에게 예수 수난 성서를 읽도록 부탁하고 묵상하면서 평화 중에 숨을 거두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Prayer to the Sacred Heart of Jesus

- Saint Gertrude

 

O Sacred Heart of Jesus, fountain of eternal life,

Your Heart is a glowing furnace of Love. You are my refuge and my sanctuary.

O my adorable and loving Savior,

consume my heart with the burning fire with which Yours is aflamed.

Pour down on my soul those graces which flow from Your love. Let my heart be united with Yours.

Let my will be conformed to Yours in all things.

May Your Will be the rule of all my desires and actions. Amen.

 

 

 

 

 

 

축일 :11월16일(11월19일)

헬프타의 성녀 멕틸다

ST.MECHTILDE of Helfta

Santa Matilde di Hackeborn (o di Helfta) Monaca

St. mechtidis

c.1241 - 1298 at Helfta

Matilde = forte in guerra, dal tedesco(=strongly in war, from the German)

 

 

성녀 멕틸다는 로쓰도르프의 수녀가 되었고, 처음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1258년, 수녀들이 삭소니아의 헬프타로 옮겨가서 3년이 지난 후에

성녀 제르뚜르다(대)가 수녀원 교육을 받으러 들어왔는데, 이때 그녀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러므로 성녀 제르뚜루다를 장성할 때까지 돌봐주었고, 뛰어난 신비가로 키운 인물이며,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나이팅겔"이 되어 그녀와 같은 신비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그녀의 제자인 제르뜨루다가 자신의 신비체험을 써내려갈 때, 처음에는 이것을 경고하였으나,

주님께서 멕틸다의 마음에도 감도하셨기에 위대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멕틸다 자신도 영적인 체험을 기록했는데,

이것이 "성녀 멕틸다의 계시록" 혹은 "특별한 은혜에 관한 책"으로 불리운다.

성녀 멕틸다는 공식적으로 시성된 바 없으나,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신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사랑과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출처 : 축일 : 11월 16일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대 제르투르다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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