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을 포옹하면서
이 부분은 우리의 표면적인 정체성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참다운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내면의 투쟁을 더 자세히 드러내 준다. 영적인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순간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때이다. 그런 순간을 출발점으로 하며, 헨리는 우리가 우리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삶의 모든 부분으로, 특히 우리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우리자신의 측면에 이 사랑 받음의 메시지를 깊히 받아들이도록 격려한다. 회심으로 가는 길은 우리자신의 부서짐을 진취적으로 또한 전적으로 친밀하게 포옹하는 과정을 반드시 포함해야한다. 이렇게 자아와 친구가 되어가면서 우리는 사회가 지어놓은 가짜자아들, 더 피상적인 자아를 벗어나 하느님이 부여한 우리의 참 자아로 옮겨간다. 헨리는 지난 10년 동안의 삶을 장애자들의 라르슈 공동체에서 보냈다. 다음에 나오는 빌의 이야기는 이 공동체가 어떻게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 안에서 그들의 참다운 사랑스러움을 발견하도록 돕는 가를 밝히고 있다.
진정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회심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복음서들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놀랍고도 새로운 시간에 대한 체험이 열리게 된다. 참다운 자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한 시간적인 순서의 삶에 얽매여 있지 않고 하느님의 영원성을 실제로 나누게 된다. 이처럼 시간이 흘러 죽음으로 우리에게 “종말”이 온다 해도 그것은 전혀 종말이 아니며, 다만 하느님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더 광대하게 참여 할 수 있는 그 출입구에 도달하는 것이다.
사랑받는 존재로서 살아가기
사랑의 상업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사랑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전적인 자유의지로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처음에 이 사실을 접하면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지만, 더 깊이 이 생각에 대해 성찰해 보면 당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전 실존을 ‘네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면, 나도 너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께’라는 틀로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잘하면 그들이 우리에게 잘 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면 그들이 우리를 도울 것이고, 우리가 그들을 초대하면 그들이 우리를 초대할 것이며,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랑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해서 얻어내는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들 사이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우리시대에 이러한 확신은 더 강해지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에 대해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 친절한 말 한마디조차, 감사의 표현, 애정의 표현하나도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엄청난 불안, 불안정 그리고 동요 뒤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이러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마치도 우리가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서로에게 증명하려고 애쓰면서 영원히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안에 정박하고 있는 의심이 우리를 더 큰 행동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머리를 물위에 계속 나와 있게 하려고 또한 점점 더 불어나는 자아존중의 결핍 속에 익사하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인정, 찬사, 인기 그리고 명성을 추구하는 어마어마한 경향은 이 모든 것이 없다면 우리가 무가치하다는 두려움에 근거한다. 이것을 사랑의 “상업화”라고 부를 수 있다. 아무것도 없이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심지어 사랑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정신을 갖게 되면 마치 인간존재로서 우리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는 것에 달려있는 것 같이 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도록 허용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여기면 우리자신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영리하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영리하다고 여긴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종교적이라고 여기면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세상에 팔고 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집에서 더 이상 주인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친구들과 적들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결정해준다. 우리는 그들의 좋거나 나쁜 의견의 놀이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비극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의 외로움과 결핍된 자아존중을 해소시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근원적인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 줄 능력이 없다. 서로의 가장 깊은 외로움을 만족시켜줄 우리의 능력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는 서로를 끝없이 실망시키는 위험에 놓이게 된다...
예수가 행했고 말했고 경험했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장 염원하는 사랑이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굳건하게 믿는다면,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늘 애쓸 필요가 없으며, 하느님이 너무나 풍부하게 우리에게 주려고 하는 것을 강제로 사람들에게서 얻어내려고 애쓰지 않게 될 것이다...
본래의 선함
매우 오랫동안 나는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것을 무슨 덕처럼 여겨왔다. 나는 자만심과 과대평가에 대해 자주 경고를 받아와서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진짜 죄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첫째 사랑을 부인하고 나의 본래의 선함을 무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느님의 첫째 사랑과 나 자신의 본연의 선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나의 참다운 자아와 만나지 못하고 나의 아버지 집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잘못된 사람들과 잘못된 장소에서 찾으려는 파멸적인 탐색을 시작하게 된다.
나는 하느님의 첫째 사랑과 나의 본연의 선함을 추구하는 이 투쟁에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단호함, 경쟁성, 질투 그 이면에, 거만하게 보이는 자기확신과 호전적인 태도 이면에는 그들의 외적인 행동이 그렇게 믿도록 유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기존중이 적고 매우 불안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명백한 재주와 많은 성취와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선함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자주 충격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외적인 성공을 내적인 아름다움의 징표로 경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가치 없다고 느끼는 심정을 감추며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 사람들이 나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나에 대한 칭송과 박수를 정지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무서운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않았던 부모 이야기, 그들을 잘못 대했던 선생들 이야기, 그들을 배신했던 친구들 이야기, 삶의 위기 때에 그들을 방치했던 교회 이야기 등등.
돌아온 탕자 비유는 어떤 거부도 일어나기 전에 존재했던 사랑 그리고 모든 거부가 다 일어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어머니이면서 아버지인 하느님의 첫째 사랑 그리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이야기이다. 그 사랑은 모든 참다운 인간의 사랑, 가장 한계가 있는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다. 예수의 삶 전체와 가르침은 다만 한 가지 목표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이며 어머니인 하느님의 꺼지지 않는 무제한의 사랑을 드러내고 그 사랑이 우리 일상 삶의 모든 부분을 인도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진정한 신원(강론)
나의 신앙의 핵심에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라는 확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거대한 영적 과제들 중의 하나는 이 확신을 선포하고 이 지식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제는 쉽지 않습니다. 실상, 우리들 대부분은 진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진리를 주장하는데 늘상 실패합니다.
당신과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왜냐하면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내내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씁니다.
우리에게 자주 떠오르는 첫 번째 대답은 이렇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는 나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삶에서 조금 성공할 때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좋게 느낍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에 나는 처지고 절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지면, 일을 많이 할 수 없게 되고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살면서 무엇을 했는지 보자... 보자, 보자, 보자, 난 그래도 무언가 좋은 일을 했지.”
혹은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나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강력합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때때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잘 말할 때, 당신은 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말하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일어나 말합니다, “여보세요, 나는 당신의 말이 너무나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뿐입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반대해서 말하면 그 말이 당신의 마음을 깊게 찌릅니다. 그리고 아침에 어떤 사람의 말이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말이 하루 종일 머물러 당신의 기분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서 나이다.” 예를 들어 나는 네덜란드 사람이고 친절한 부모 좋은 교육과 건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중에 어떤 것을 잃자마자... 만일 가족 중 한 사람이 죽거나, 내 건강이 나빠지고 혹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잃거나 하면, 나는 내적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있습니다...
매우 자주, 당신과 나의 에너지는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 것으로 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나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많이 쓰여집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이러 식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의 삶은 재빨리 굴곡이 심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말해주고 내가 좋은 일을 하고 무엇인가 가지고 있을 때 나는 기분이 올라가고 흥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잃기 시작할 때, 갑자기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갑자기 사람들이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때,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나는 절망 속으로 미끄러지고 매우 처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과 나는 갈짓자로 비틀거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일과 우리의 정신에너지는 한계선 위에 있을려고 애쓰는 데에 쓰여지고 그런 인간 노력을 우리는 생존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명성에, 좋은 일에, 재산에 매달리고 싶어하지만 마지막에 가서 “우린 결국 죽을꺼야” 라고 말하게 될 우리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아는 것처럼, 모든 굴곡과 함께 이런 식으로 살게 될 때에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은 죽은 존재가 됩니다. 아무도 더 이상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작은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과 나는 무엇을 하거나 가진 것으로 혹은 남들이 나에 대해 말 한 것에 의해서 존재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가 사막으로 갔을 때 악마가 그분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악마는 말했습니다,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라, 그리고 당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그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붙잡고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도록 하라.”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면 세상을 다 주겠다.” 그러면 당신은 사랑받을 것이다. 당신이 무엇인가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합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런 말은 당신과 나를 폭력과 파괴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가장 큰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압니다. 성령이 나를 유혹받게 하기 전에 나에게 와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사랑받는 아이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에게 나의 사랑이 머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참 모습입니다. 이것이 나의 참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살아가는 내내 이 소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칭찬했고, 거부했으며 호산나라고 외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진리에 충실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고 이 사실로써 나는 나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계속 나를 거부하거나 칭찬하고 웃거나 침 뱉는 세상 속에서 나를 살아가도록 해줍니다. 나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위대하다고 말해서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들으라고 요청하는 것은 예수에 대하여 말해진 사실이 바로 여러분에 대해서도 말해진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듣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듣는 것이고 여러분의 온 삶이 변화되기 위하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해왔다. 나는 너의 이름을 영원으로부터 내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 나는 지구의 심연 속에서 너를 빚었고 너의 어머니의 움속에 짜 넣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포옹한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너의 것이며 너는 나에게 속한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당신에게 영원으로부터 영원으로 이렇게 말하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의 삶은 점점 더 사랑받는 사람의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사람, 이것이 바로 나와 당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 생에서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은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지식에서 키워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지식에서 당신의 참 존재됨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기 시작하면 이 영적인 지식은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고 당신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당신은 거부를 받게 될 것이고 칭송과 상실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불안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거부들을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받는 존재로서 그러한 상황을 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으로서 고통과 불안과 성공과 실패를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시점에서 당신에게 작은 다짐을 하고자 합니다. 당신을 사랑받는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는 첫째 사랑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여러분을 사랑하셨으므로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그리고 위대한 투쟁은 그 첫째 사랑을 믿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당신의 선생들이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사랑 받았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우리를 잘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를 돌보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경험에 의해 아버지, 어머니, 아이들, 형제들, 선생들, 교회 등 당신에게 더 가까운 사람들이 또한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들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과 상처는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노골적인 진실을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첫째 사랑을 다시 받아들이고 확신할 때에만 그 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고 우리가 받는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첫째사랑이 실재라는 조짐이나 일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고수할 수 있습니까? 회한을 느끼고 시기심을 느끼려는 유혹에 시달릴 때, 거부감을 느끼고 공격하고 싶을 때, 당신은 다시 돌아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딸이다.” 그리고 비록 내가 거부를 당하더라도, 그 거부는 나에게 그 진실을 다시 기억하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사랑받음이라는 진실을 더 온전히 더 깊게 주장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는 가지치는 작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진실을 고수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어야 한다고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할 만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과 나는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하느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다른 사랑은 부분적인 것이며 실제이지만 제한적이고 따라서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고통이 우리를 정화시키도록 기꺼이 허용한다면, 우리의 사랑받음에 대한 더 깊은 자각을 주도록 허락한다면 우리는 예수처럼 자유로울 수 있고 이 세상에서 걸어가며 하느님의 첫째 사랑을 어딜 가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강론,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에서
1992년 8월 23일
절망의 소리, 사랑의 소리
유다와 베드로는 절망 속에서 예수로부터 도망가거나 희망으로 그분에게 돌아가는 모습들 사이의 선택을 나에게 제기한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고 목을 맸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으나 눈물을 흘리며 그분에게 돌아갔다.
때때로 절망은 모든 문제를 부정적으로 해결하는 매력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절망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계속 다시 죄를 짓고 있다. 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다음 번엔 더 잘하겠다는 약속을 끝도 없이 했지만 나는 그저 오래된 그 어두운 자리로 계속 돌아가고 있다.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잊어버려라. 나는 오랫동안 노력했다. 그러나 성과가 없고 앞으로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잊혀지고, 더 이상 얼씬거리지 않고, 죽은 체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이 묘하게 매력적인 소리는 모든 불확실함들을 앗아가고 투쟁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소리는 어둠을 확실하게 주문하고 아주 뚜렷한 부정적 신원을 제시한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또 다른 소리에 내 귀를 열어주기 위하여 왔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나는 나의 두 손으로 너를 빚었고, 나는 내가 만든 것을 사랑한다. 나는 아무런 제한이 없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받는 것처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에게서 도망가지 말아라. 나에게 돌아오라단 한번만이 아니라, 두 번만이 아니라 항상 다시 돌아오라. 너는 나의 아이이다. 너는 내가 너를 끊임없이 포옹하고 내 가슴에 안으며, 너에게 입맞추고 너의 머리칼을 쓰다듬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자비와 연민의 하느님,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 부드러움과 보살핌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에 대해 포기했다고, 내가 너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더 이상 돌아설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말아라.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네가 나와 함께 있기를 너무나 원하고 있다. 나는 네가 가까이 있기를 너무나 원한다. 나는 너의 모든 생각을 안다. 나는 너의 모든 말들을 듣는다. 나는 너의 모든 행동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나의 가장 친밀한 사랑의 표현이므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 너 자신을 단죄하지 말라. 너 자신을 거부하지 말라. 나의 사랑이 네 마음의 가장 숨겨진 구석들을 만지고 너의 아름다움을 네 자신에게 드러내 주도록 해다오. 그 아름다움은 지금 네가 보지 못하지만 나의 자비의 빛으로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오라, 오라, 내가 너의 눈물을 닦도록 해다오. 그리고 나의 입을 네 귀 가까이 대고 너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고 말할 수 있도록 해다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가 듣기를 원하시는 소리이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 안에서 창조했고 자비 속에 다시 창조하고자 하는 존재에게 항상 돌아가라고 청하는 목소리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훈련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단지 형제자매일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가 되어가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 되어가는 과정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영적인 삶이 단지 존재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되어가는 방식이라면, 이 되어간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사랑받음이라는 진실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안에서 표현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구체화의 과정이다. 아니면 더 낫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육화의 과정이다. “사랑받는 존재로서 존재하기”가 단지 아름다운 생각이나 고상한 이념 같은 것으로, 절망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내 삶 위에 추상적으로 걸쳐있는 것에 다를 바 없다면, 아무것도 참으로 변할 수 없다. 요구되는 것은 나의 일상생활이 일어나는 평범한 자리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며,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일상생활의 수많은 구체적 현실간의 격차를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가는 것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나에게 드러난 진리를 위로부터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일상 속으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실상, 매 순간 순간 그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말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Noh Cah(노카) - 자닌토(Jan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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