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월 2일 - 공현 전 금요일
바실리오 성인은 330년경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 태어나
은수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고, 훗날 주교로 임명되었다.
평생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했고 많은 저서와 편지를 남겼다.
그는 동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공경받고 있다.
그레고리오 성인 역시 카파도키아 인근의 ‘나지안조’에서 태어났다.
바실리오 성인을 만나 함께 은수 생활을 하다 주교가 되었고,
일생 동안 정통 교리를 수호하다가 선종하였다.
말씀의 초대 ―································º································―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적’이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은 인정하면서 예수님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요한은,
그런 행동은 거짓말을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제1독서)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고백한다.
자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이라고 말한다.
세례를 베푼 것도 예수님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답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구세주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치 않다고 말한다(복음)
제1독서―····································º····································―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º········································―
<그리스도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º·································―
많은 사람들은 불확실한 ‘데이터’로 남을 비판합니다.
빈약한 자료로 이웃을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잘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상대가 알려진 사람이라면 더욱 심합니다.
‘잘 모른다는 말’은 여간해서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알게 된 정보이건만
내색하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낮춥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이들은 고개를 듭니다.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못 알아준다고 서운해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알이 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숙이고 싶어도 못 숙입니다. 알이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평소 단식하며 절제했던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르면 ‘한 발자국’ 물러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송구스러운 분’이 없는지요?
그런 분을 알고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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