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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스크랩]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30) 마음 열기 ⑫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30) 마음 열기 ⑫
‘존재’는 행위에 우선한다

궁극적인 목적 모른다면 행위 또한 무의미
내 존재와 그 근원인 하느님 먼저 의식해야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놓고 몇 가지의 욕구가 있는가 연구했더니 무려 80여 가지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80가지에 이르는 것을 모두 채우려 해보라. 정신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하고 싶은거 다 하다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다 보면 재산이 남아나겠는가.

만일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이루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미리형성해 놓은 4가지 선 형성적인 차원 즉 ▲사회역사적 차원 ▲생체적 차원 ▲역할적 차원 ▲초월적 차원의 역동적인 분투들이 통합을 이뤄야 한다.

영적인 생활, 영적인 성숙을 이루려면 이 네 가지 차원들이 통합되어야 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 문제는 우리가 대부분 초월적 차원을 빼 놓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 즉 나의 소임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평생동안 살게 된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오리무중이다. 그래서 히틀러도 생기고, 신사참배를 죽어도 해야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국제 분규도 생기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차원들은 각자 필연적으로 역동적인 에너지들을 갖고 있다. 사회역사적 차원에서는 ‘추동들’(Pulsations)이고, 신체적 차원에서는 ‘충동들’(Pulsions), ‘격동들’(Impulses), ‘강박들’(Compulsions)이고, 역할적 차원에서는 ‘열망들’(Ambitions)이며 초월적 차원에서는 ‘갈망들’(Aspirations)과 ‘영감들’(Inspirations)이다.

어렵게 들리겠지만 쉽게 설명할 예정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지금 인간의 초월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만큼 먼저 초월적 차원에 대해 살펴보자.

초월적 차원에서 인간은 ▲갈망과 ▲영감이라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일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공부도 좋고, 수영을 해도 좋고, 테니스도 좋다. 기업을 운영하거나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것 모두를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어떻게 하는가. 대부분은 철저한 계획을 먼저 수립한다. 또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생각도 빠트리지 않는다. 재산이 얼마인지, 또 대출받을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 어떻게 빚을 갚아나갈지 계획도 없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정신적 신체적 ‘투자’를 한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 구멍가게를 열려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왜 이 가게를 열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진단을 확실히 내려야 한다. 공부를 하는 학생은 ‘내가 왜 공부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단순히 성공을 위해서? 이건 아니다. 결혼을 하는 부부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결혼을 하는지’에 대해 진단을 내려야 한다. 이혼이 급증하는 원인에 대해 사회학적인 수많은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초월적 차원의 접근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대부분 사회생활을 정신적으로, 감각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이혼 문제도 불거져 나온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목적이 사라질 때 우리 사회는 혼란을 겪게 된다. 전국의 성당에선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열심히 땀 흘리며 봉사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봉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당에서의 봉사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 목적은 하느님의 원의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안다면 자기 자랑에 급급하고, 다른 이들을 비방하는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올 때 직책을 맡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존재’는 행위에 우선한다. 이 말은 반드시 기억해 두기 바란다. 행위는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처럼 이렇게도 일하고 저렇게도 일한다. 하지만 존재, 인간 존재는 위대한 것이다. 존재가 위대한 것은 그 존재의 근원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행위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나를 나 이게끔 하는’ 그 존재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다. 성당에서 직책을 맡고 어떤 활동을 하는가를 중요시 여긴다. 직책을 맡고 활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늘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대두되는 개념이 갈망과 영감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출처 :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30) 마음 열기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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