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교리서의 핵심교리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사생활(가교 456-535 참조)
예수께서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 이 세상에 이보다 보잘것없는 탄생이 또 있겠는가? 천사에게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게 된 목동들은 달려가서 경배하였다.
그후 먼 나라 동방에서 별을 연구하던 박사들 셋이 이상한 별, 즉 위대한 왕이 탄생할 징조를 나타내는 별을 보고 찾아와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했다. 예수님의 존재가 유다 지방에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동방에도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당황한 헤로데왕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이를 안 천사가 나타나서 이집트로 피신하라 이른다.
예수님은 이집트에서 얼마간 사시다가 나자렛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 청년시절을 지낸다. 그래서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생활은 30년간 계속되는데 그분의 공생활이 중요해서인지 성서에는 그분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분의 모습, 습관, 취미 등 그분 개인에 관한 것은 알 수가 없다(루가 2-3장 참조).
예수님의 공생활(가교 535 -553 참조)
예수께서는 공적인 임무를 띠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나자렛 생활은 청산해야 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요르단강에서 세레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물론 성서학자에 따라 33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려고 몰려들었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받으신 것이다.
세례 때에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예수께서도 전도를 시작하신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는 것이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을 말한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억눌린 자들에게는 해방이 기쁜 소식이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재산의 축복이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인간 모두의 근본적인 바람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뵈오며 행복하게 영원히 사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생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 부활로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하셨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이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걷고 반신불수가 성해지는 것은 물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까지 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 열둘을 뽑아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가교 595 - 637 참조)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다. 자신은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했던 이유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상종한 때문이었다. 또한 기적을 행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 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잡혀갔고 온갖 모욕과 매질을 당하셨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실질적인 권한 행사, 즉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유다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다가 온갖 모욕을 준 다음 총독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들은 군중을 동원해서 사형선고를 내리라고 소리쳤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놓아주려 했으나 유다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한 민중의 외침을 거절하면 폭동으로 번질까 염려하여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내 주었다.
예수님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 걸으셨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으나 다시 일어나셨다.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처참히 돌아가셨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이미 구약성서에 예언되어 있었으니, 예수니므이 죽으시은 결국 하느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신비로운 계획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조리ㅡㄹ 보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다(루가 23장; 가교 571 - 604 찹조).
예수님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셧다. 그분은 3일간 영육이 분리된 상태를 맛보셨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과 그분의 죽음을 같이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분의 육신은 썩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예수께서는 '셰올', 즉 저승에 가셨다. 거기에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고 있던 거룩한 영혼들이 있었다. 원죄로 천국문이 닫혀 있었기에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시며 이제 천국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기뻐하라는 희망의 말씀을 주셨을 것이다.
왜 우리는 십자가를 사용하는가?
가톨릭 신자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성호경을 외우며 십자가를 긋는다. 묵주에도 십자가가 있고, 신자 가정에도 십자가를 걸어놓는다. 특히 성당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많이 있다.
십자가는 승리의 표시이다. 십자가로 인류는 영원한 죽음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구원의 표시이며 희망의 표시이다. 인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받았으며 천국의 희망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는 주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다.
하느님을 향하여 -최.기.산. 신부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