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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

[스크랩] [그리스도의 생애] - 46. 명단의 맨 하위

[그리스도의 생애] - 46. 명단의 맨 하위


그동안 유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다만이 어두운 후에 주님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신호를 받아야했다. 그리스도는 내부에서 적들의 손에 넘겨지신 것이다.
가장 큰 해는 항상 적으로부터 오는 것만은 아니고 주님의 성스러운 무리에 끼어있던 자들로부터 온다.밖에 있는 적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내부에 있는 자들의 결점이다. 적들은 처참한 십자가형을 집행하겠지만, 신앙을 갖고 있다가 잃어 버렸거나 도덕성의 근원을 파괴하여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더 큰 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유다가 주님을 미워한 것은 자신의 죄와 스승이신 주님의 덕을 비교해 보았기 때문이다. 이아고는 까시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추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미를 지니고 있다." 유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당신 선으로 자기를 불안하게 만드는 주님께 분풀이하였다.
신성에 대한 증오심은 항상 비신앙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신앙(反信仰)에서 흔히 나오는 것이다. 악한 사람은 양심과 그리스도와 신앙의 은총 때문에 자기들이 지은 죄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릴 수가 있다면 "도덕적 금기사항들"로부터 해방될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인간 본성이요, 양심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쫓아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사를 축출하려고 한다. 보다 낮은 차원에서 말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덕을 조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덕은 악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순결한 얼굴이 하나의 심판이다. 유다는 주님을 위해 일할 때보다 극단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배신은 입맞춤으로 이뤄졌다. 사악함이 덕을 파멸시키거나,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려할 때 그러한 악을 행하기 전에 어떤 애정의 표시가 필요한 것같다. 유다는 똑같은 입술로 주님을 찬미하고 부인하였다. 유다의 입맞춤에 대해 주님께서는 한마디만 답하셨다. "친구야" 이것이 주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이 순간 그는 배반자가 아니라 친구인 것이다. 그는 살찐 송아지를 먹을 권리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그 때에 배반자 유다는 예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자기가 저지른 일을 뉘우쳤다. 그래서 은전 서른 닢을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 주며 (마태오 27, 3)

우리말로는 베드로와 유다 모두 "뉘우쳤다" 고 하지만 그리스어 원본을 보면 유다와 베드로에게 사용하는 단어가 다르다. 유다에 대해 사용한 단어는 단순히 감정의 변화와, 결과에 대한 후회, 이미 저지른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뜻한다. 이러한 뉘우침은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 지옥에 있는 악마들도 그들이 범한 교만죄의 결과에 대해 뉘우친다.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반한 이유가 완전히 악하고 비열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기대했던 정치적 메시아는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죄를 짓기 전에 악마는 죄를 가볍게 보지만, 죄를 지은 후에는 절망을 느끼게 만들고 죄책감에서 훨씬 악한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고발자가 된다. 악마가 "잠시 유다에게서 떠나있었던 것" 이 분명하며, 그 대문에 유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뉘우치고 돈을 되돌려 줄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악마가 돌아와 그를 절망에 빠뜨린다.

주님을 단죄함으로써 두 가지 결과가 나왔다. 하나는 유다에게 그리고 최고의회의 대사제에게 영향을 미쳤다. 유다에게는 양심의 고뇌를 통해 죄의 굴레를 낳아주셨다. 그의 지갑속에 있는 은전 삼십 냥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는 성전으로 달려가 돈 주머니에서 세켈을 꺼내 성전 마당에다 내동댕이쳤다. 배반해서 얻은 거라곤 그가 벌은 것으로 더 부자가 되기는커녕 그 돈을 번 방법 때문에 무한히 가난해지게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덧없는 쾌락이나 일시적인 보상을 보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팔아먹은 사람치고 주님을 제값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헐값으로 팔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유다는 흥정이 이뤄졌을 때 대단히 많은 액수를 받는 것 같았다. 나중에 그는 돈을 성전에 가지고 가서 더 이상 자기가 교환한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은전을 마루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스스로 속은 것이다. 죄의 열매는 잃어 버린 은총을 결코 보상할 수 없다. 이제 돈은 피의 밭을 사는 것밖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유다와 함께 죄를 공모했던 자들이 이제는 공동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 버리려고 한다. 공모죄에 대한 벌의 한가지는 서로 죄를 미루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작당하여 선한 사람에게 악을 행할 때에는 언제나 끝에 가서는 서로 분열하고 만다. 그러나 유다의 경우에서는 악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과는 반대의 행동을 볼 수 있다. 잘못이 크면 클수록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법이다. 악한 사람들은 무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만일 유다가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이 있었더라면 자기의 배신과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그것을 붙들고 늘어지며 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 자신이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다고 선언했다. 한 때는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낭비한다고 불평을 털어놓던 그가 이제는 삼십 은전을 내동댕이쳤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었을까? 유다는 더 이상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은전들은 유다가 내던졌던 성전에 놓여 있다. 대사제들은 그들의 하찮은 도구가 되었던 은전과 유다를 증오했다. 유다는 최고의회에 책임을 전가시키려고 했으며 그들은 그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유다는 스승의 신성을 고백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죄하였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카인이 물었던 것처럼 그들도 공범자에 대해 전혀 동정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돈을 성전 바닥에 남겨 둘 수가 없으므로 대사제들은 그 돈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대사제들은 그 은전을 주워 들고 "이것은 피값이니 헌금궤에 넣어서는 안되겠소" 하며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의 밭" 이라고 불린다. (마태오 27, 6-8)

유다의 공모자들은 돈에 대해서는 기꺼이 상의하면서 무죄한 사람에 대해서는 상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다의 고백을 듣고 당연히 기뻐해야 했지만 유다를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렸다. 더 이상 그는 필요없었으며 돈도 필요 없었으므로 그 돈은 피의 밭을 사는데 사용되었다.

유다는 자신에게는 뉘우쳤지만 주님께는 뉘우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혐오했지만 죄에 대해서는 뉘우치지 않았다.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경우 외에는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있으며, 생명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유다의 뉘우침은 자아증오에 지나지 않으며 자아증오는 자살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학살의 시작이다.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관계를 맺을 때에야 유익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후회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양심은 가장 크게 말해야 할 때 가장 작은 소리로 말한다. 양심은 어둠 속에서 종종 나가는 전등과 같다.

사람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자신을 미워하고 하느님께 회개 하지 않으면, 죄를 지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가슴을 칠 때가 종종 있을 것이다. 자아혐오에서 가슴을 치는 것과 용서를 청하면서 내 탓이요 (Mea Culpa)라고 가슴을 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어떤 때는 자아 증오가 너무도 강렬해서 생명을 빠져나가게 할만큼 두들겨서 자살을 하기에 이른다. 죽음이란 원죄에 대한 벌 중에 하나며 누구나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죽음에 뛰어드는 자도 있다. 유다가 죄를 짓기 전에 양심이 경고했고 뒤이어 양심의 가책이 뒤따랐다. 양심의 가책이 너무도 괴로워서 유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유다는 헤드론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이 골짜기는 온갖 유령이야기가 얽혀있는 곳이다. 불쑥 불쑥 튀어나온 바위들과 뒤엉키고 구부러진 나무들 틈에 서서 유다는 자신을 너무도 혐오한 나머지 자아로부터 자신을 비우고자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운명과 종말을 말하는 것 같았다. 황금빛 지붕을 한 성전보다 유다의 눈에 더 혐오스럽게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성전은 자기가 판 하느님의 성전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나무는 자기가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교수대처럼 보였으며, 모든 나뭇가지들은 자신을 고발하는 손가락처럼 보였다. 자기가 서있는 언덕에서는 그가 사형선고를 내린 그 분께서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실 갈바리아 산이 내려다 보였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힘 닿는껏 하늘과 땅을 가르려고 한다. 유다는 나뭇가지에 밧줄을 메고 자살하자 오장이 터져나왔다. 하느님을 팔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유다가 하느님을 팔았지만 그의 공범자들은 하느님을 살 수 없었다. 하느님은 부활주일에 부활의 영광에 싸여 다시 현존하셨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유다를 보면서 아주 재미있는 비교를 할 수 있다. 몇 가지 유사한 점들이 있긴 하지만 엄청난 차이점들도 있다. 먼저 주님께서는 둘 다 "악마" 라고 부르셨다. 주님께서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실거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반대하고 나섰을 때 그를 "사탄" 이라고 부르셨다. 두 번째로 주님은 둘 다 죄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스승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자기는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그날밤 닭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배반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유다는 적신 빵을 받을 때 경고를 받았다. 유다는 자기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배반자라는 말을 들었다. 세 번째로, 둘 다 주님을 부인하였다. 베드로는 밤중 재판이 벌어지는 동안 하녀들에게 넘겨주었을 때 부인한 것이다. 네 번째로 주님은 둘을 다 구하려고 하셨다. 베드로는 한 번 돌아보심으로써 그리고 유다에게는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하려고 하셨다. 다섯 번째로 둘 다 뉘우쳤다. 베드로는밖에 나가 통곡하였고 유다는 삼십 은전을 되돌려 주며 주님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뉘우쳤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한 명은 사도명단의 맨 위에 자리하고 또 다른 사람은 맨 밑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그것은 베드로는 하느님께 뉘우쳤고 유다는 자신에게 뉘우쳤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느님 의지와 자아의지 만큼이나 그 차이가 엄청나고 십자가와 심리분석용 침상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유다는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다" 고는 말했으나 자신이 그 피에 씻기기를 원하지 않았다. 베드로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알고 구원을 찾았고, 유다는 자기가 잘못을 범한 줄 알고 도피처를 찾았다. 곧 유다는 십자가로부터 도피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의 용서는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하되 그것을 말살하지는 않는다. 만일 죽음의 나무밑에 서 있던 유다가 계곡 주변을 둘러보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나무를 보았으면 어떻게 했을까. 베드로와 유다처럼 주님께 회개하는 것과 자신에게 회개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성 바오로는 나중에 이렇게 해설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을 후회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속적인 상심은 죽음을 가져올 뿐입니다. (Ⅱ고린토 7, 10)

유다의 인생의 비극은 성 유다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출처 : [그리스도의 생애] - 46. 명단의 맨 하위
글쓴이 : 시냇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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