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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의기도및 신앙

[스크랩] 공소가는 길

공소 가는 길

언제부턴가 아침잠이 슬그머니 도망가 버리는 행운이 찾아 왔다. 내게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고
더구나 운동을 한다는 것은 평생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요즘은 매일 아침 공소까지
걸어가서 성체조배를 하고 온다. 걸어가면 30분 정도가 소요되니 오가는 시간만 해도 한 시간을 걷게 되고
묵주기도까지 할 수 있어 이거야 말로 일거양득인 셈이다.
시골살이가 만만찮아서인지 인생살이가 만만찮아서인지 이래저래 잔병치레를 자주하던 내게 옆지기는
늘 운동하기를 권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루어 왔었는데 한 번에 두 가지를 다 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현관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 "브니"가 꼬리를 살랑대며 먼저 길을 나선다.
앞마당 가득 줄지어 늘어선 항아리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소나무 숲길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면 길 왼쪽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졸졸거리며 따라오고 오른 쪽 산비탈 공동묘지 앞 산뽕나무위에
잠자던 산새들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호로록 날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 나는 날마다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

요한 아저씨의 사과 과수원을 지나면 갈대가 무성한 둑방길이 이어진다. 개울 건너 쪽에 아스팔트 깔린
큰 길이 있지만 바지에 이슬을 묻히며 가는 이슬떨이가 되는 이 길이 너무 좋아 난 이 길로 걸어간다.
가끔 과수원에서 일하시는 요한 아저씨를 마주치면 아저씨는 내게

"릿다 운동하면 일찍 죽는데이....와서 사과나 먹어라." 하시며 나를 골려주신다.

나는 속으로 "아저씨 제가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 보러 가는 거에요" 싱긋 웃으며 나의 은밀함을 숨긴다.
둑방길이 끝나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길로 들어서게 된다. 대로가 있지만 일부러 골목길을 돌아가는 이유는
지붕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의 향기를 맡고 싶어서이다. 갈라진 담장 틈으로 삐죽 나온 구기자나무 한 줄기에
매달린 열매 몇 알에 생명이 움트는 소리가 들리고 처마 밑에 달아놓은 시래기 몇 가닥이 심심한 벽에 선을 그어주는
골목길 묵상에 젖은 내 영혼은 이 집 저 집 담벼락 안팎을 기웃거린다. 꼬리를 살랑대며 따라오던 강아지도 괜스레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다 큰 개한테 쫓겨 달음질을 치며 우리는 한 곳을 향해 걸어간다.

강아지는 담벼락에 기대 앉아 기다림에 자세를 취하고 나는 제일 먼저 맞이해 주시는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성당으로 들어선다. 공소에는 늘 예수님만 계셔서 마음 놓고 기도하기에 얼마나 좋은지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원망과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감사의 눈물을 쏟기도 하며 예수님과의 데이트를 맘껏 즐긴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 말고도 몇 분이서 예수님과의 은밀한 만남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에 한분이 예레니오 할아버지이신데 여든 한 살의 연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체조배를 하시고
하루 온 종일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사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헬레나 자매와 나는 예레니모 할아버지를 찾아 갔다.

할아버지는 혼자 살고 계셨다. 어떠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가족과 떨어져 살아온 이십년 세월 속에
가난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치솟는 기름 값 때문에 난방을 하지 못하고 전기장판에 의지하고 사시니 방안은
썰렁하고 꼬질꼬질 때가 묻은 이불과 니코친에 찌든 누런 벽이 그 분의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오직 기도와 성모님 사랑만이 그분을 지탱해 주시고 있었다. 기도하는데 방해가 되는 TV도 없애 버리셨다는
할아버지의 단호한 신앙생활이 닮고 싶어 졌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성모님 궁전에 초대받은 이들이라며
반가이 맞아 주셨다. 화장실 갈 때도 묵주를 가지고 가신다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계신 성모님은 참 행복해 보이셨다.

농촌에서 보기 드물게 젊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우리 공소가 있기까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러한 분들의
끊임없는 기도 덕분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아침 성당에서 예레니오 할아버지를 만났다. 여전히 손에는 은빛 구슬로 엮어진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반갑게 나의 손을 잡아주시며
"잘 왔다, 잘 왔어. 볼일 보러 왔다가 인사드리러 온 거냐? 그래, 그래야지....."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예수님을 뵈러 왔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서 그 사랑을 받으셨고 우리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다는 그분의 특별한 사랑법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사순절 시작의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드렸다.

돌아오는 길 동쪽 산등성이에 불쑥 올라온 태양의 따사로운 기운을 맞으며 그렇게 기도했다.

"주여! 저의 생명이 다하는 그 전날까지 제가 이 길을 걷게 해 주십시오."


출처 : 공소가는 길
글쓴이 : 단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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