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높이를 낮출 수 있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삶을 망치거나 심지어는 건강까지 나빠질 수 있다. 몇 년 전 나는 ‘욤키퍼’를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유명한 랍비의 용서에 대한 강연회에 초대되었다. ‘욤키퍼’란 ‘속죄의 날’이다. 모든 유대인들은 이 날 한 해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부족함과 잘못, 죄 등을 성찰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한다. 그런데 그 랍비는 하느님의 용서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청중이 앉아 있는 좌석 앞까지 와서는 자기 부인에게서 어린 딸을 받아 연단으로 올라갔다. 어린 아기는 겨우 돌을 지난 정도의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아기는 아빠의 팔에 안기어서 청중을 향해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자리의 모든 참석자들은 아기의 미소를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기는 아빠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는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랍비는 아기에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낸 후 전통적인 ‘욤키퍼’ 설교를 시작했다. ‘속죄의 날’의 의미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기는 아빠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손으로 아빠의 코를 잡아당겼다. 랍비는 아기의 손을 코에서 떼어놓고 다시 설교를 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아기가 넥타이를 잡고 아빠의 입 속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랍비는 입에서 넥타이를 꺼내어 놓고 아기를 향해 미소 지었다. 아기는 작은 팔을 아빠의 목에 둘렀다. 랍비는 아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청중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이 아기가 어떤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용서하지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강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이나 손자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순간 아기는 다시 손을 뻗어 안경을 잡아챘다.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랍비는 아기에게서 안경을 뺏어 다시 쓰면서 크게 웃으며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
“언제 무조건 용서가 안 되는 그런 시기가 옵니까? 용서하기가 어려워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네 살입니까? 여덟 살입니까? 열 다섯 살입니까? 서른 다섯 살입니까?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어린 아기라는 사실을 잊고 용서하기가 힘들어집니까?”
그날 나는 분명히 하느님의 용서가 이해하기 쉬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용서하기란 참 어렵다. 이것에 대해 숙고하면서 나는 용서의 문제가 단순히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로 이해하기보다는 우리의 눈높이를 상대방에게로 낮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홍천 영혼의 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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