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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파올로 베로네세 / 카나의 혼인 잔치 "

-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 <카나의 혼인잔치>
 
 

 

창조성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1588)가 그린 <카나의 혼인잔치>가 바로 신선한 충격을 주는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요한복음 2장 1-11절을 소재로 그렸지만 다른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사도들을

제외하면 당대에 유행하던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베로네세는 이것으로 예수님의 기적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상으로 대변되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 상하의 구조로 대변되는 천상과 지상의 만남, 안과 밖의 대칭으로 대변되는 인간과 건

물과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왜 이 그림에는 하늘이 유난히도 많을까요? 혼인잔치는 장차 있을 구원의 천상잔치를 미리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기적을 첫 번째 구원의 표징으로 행하셨나봅니다.

예수님은 식탁중앙에 돋보이게 앉아 계십니다. 성모님도 아들의 오른편에 앉아 아들에게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여십니다.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예수님은 그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계십니다. 마치 관객인 우리를 노려보는 것 같습

니다. 그분은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그러나 그

분의 어머니는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이에 예수님은 일꾼들에게 물을 채우게 하고 기적

을 행하십니다. 성모님의 무모한 중재가 첫 번째 기적을 있게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그분께 맡겼을 때 기적처럼

 일이 잘 풀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또 이 그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신랑과 신부가 있고, 그 옆에는 부모님과

 친지들도 있습니다. 또 당대의 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하객으로 앉아있습니다. 오른쪽 전방에는 과방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아하게

 술맛을 보고 있습니다. 과방장의 반대편에도 다른 한 사람이 술맛이 좋다고 너스레를 떨고 있습니다. 계단 위에는 일꾼들로 보이는 사람

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 하객들 주위에도 일꾼들이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정중앙인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일꾼들이 칼로 고기를 다듬고 있습니다. 마치 이 잔치가 미사성제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루어지는 잔치임을 암시하듯이 말입

니다.

이 그림의 절정은 예수님 앞에 그려진 악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림의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베로네세 자신을

비롯하여 베네치아의 거장들인 야코포 바사노, 야코포 틴토레토, 티치아노입니다. 그는 왜 그들을 예수님보다도 더 크게 그분 앞에 그렸

을까요? 아마도 그는 이 혼인잔치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자신과 동료들이어야 함을 말하려는 것 아닐까요?

만일 혼인잔치에 향연이 없다면 어떨까요? 잔치가 초라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위대한 예술가들이 없다면 어떨까요? 세상이 삭막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재능으로 오늘을 풍요롭게 하는 네 명의 거장이 기적의 주인공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보십

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외하면 그분께로 시선을 모으는 사람이 없습니다. 향연의 주인공인 악사들을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일을 하고, 자기 말을 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곳을 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악사들 앞에 있는 개들의 시선과 닮았다

는 것입니다. 왼쪽의 사람들은 왼쪽 개의 시선과 비슷하고, 오른쪽의 사람들은 오른쪽 개의 시선과 비슷합니다. 마치 자기밖에 모르는 사

람은 삶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개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듯이 말입니다.

 

손용환 신부·군종교구 쌍용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