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는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시골에서 낮은 관직을 얻었던 그는 두
차례의 체포와 석방을 겪었고,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1814년에 충청도
해미에서 옥사 순교하였으며, 1816년에는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마저 대구에서 참수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은
이후에도 얼마동안 고향인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송산면 우강리)에서 거주하였으나, 다시 박해의 위험이
닥치게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용인의 골배마실
(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과 이웃의 한덕골
(용인시 이동면 묵리의 굴암)은 일찍부터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으므로 신앙
생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아우인 난식(프란치스코)과 함께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을 먹고 자란 김대건 소년은 점차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순교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였다.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서 잠시 사목한
뒤, 모친이 거주하던 용인으로 내려가 그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모든 활동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박해자들과 배교자, 밀고자들의 눈길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교우촌에 방문하여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미사를 드릴
시간도 없었다. 밤중에 교우촌을 찾아다녀야 하고 교우촌에
당도하면 복사를 시켜 교우들을 모은 다음, 벽에 고상을
걸고 성사를 준 뒤 곧바로 다른 교우촌으로 가야 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전송할 수도 없었고 집안에서 무사
하기만을 빌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성사를 받은 교우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김대건 신부 또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순방을 계속하였다.
1846년 6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을 돌아보던 김대건
신부는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옥중에서 영국의
세계지도 한 장을 번역하였고,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지리 개설서를 편찬 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과 재능은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온갖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자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은 26세의 나이로 참수
되어 천상 영광을 안았다. 이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하다.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저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김대건 신부는 21통의 서한과 1통의
순교 보고서, 2통의 작문, 1편의 조선전도 등 25건의 문서를
남겼다. 이 밖에도 3통의 서한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21통의 서한 중 마지막의 한글
서한은
<조선 교우들 보아라>라는 ‘회유문’이고, 한문 서한(1844년
12월)과 라틴어 서한(1846년 8월 26일자의 옥중 서한)은 현재
프랑스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
‘회유문’ <조선 교우들 보아라>는 조선 교우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따르도록 부탁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 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