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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스크랩]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아침기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제2저녁기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대축일 제2저녁기도 후 끝기도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가, 완덕의 길에 크게 정진하여, 신비적 계시를 받는 은총을 누렸다. 수도회 개혁을 추진하여, 수많은 곤경에 부딪쳤으나, 불굴의 용기로 이를 극복하였다. 드높은 가르침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훌륭한 저서들을 남겼다. 1582년 알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의 저서에서
(Opusc., De libro vitae., cap., 22,6-7. 14)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렇게도 좋은 벗이고 그렇게도 훌륭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곁에 계신다면 무슨 일도 견디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분은 늘 도와주시고 견고케 해주십니다. 필요할 때 돌보아 주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참되시고 성실하신 벗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엄위께서는 당신 마음에 드는 분이라고 말씀하신 이 거룩한 인성의 손을 빌어 그것을 주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나는 명백히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자주자주 체험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나에게 그것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엄위께서 우리에게 크나큰 신비들을 보여 주시길 우리가 원한다면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관상의 정상에 이르렀다 해도 다른 길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길로 가면 틀림이 없습니다. 선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이 주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이 그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분의 생활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은 모범이 없습니다.


이렇게도 좋은 벗이 우리 곁에 계시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게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가 수고와 근심 걱정 가운데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하듯 그렇게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분을 참으로 사랑하며 항상 자기 곁에 모시고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영광스러운 바울로를 생각합시다. 마음속에 늘 예수를 모신 사람으로서 그의 입에서 주님의 이름이 떨어질 날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런 것을 깨달은 후 성 프란치스꼬와 파도바의 성 안또니오, 성 베르나르도,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같은 관상 생활에서 뛰어난 이들의 생활을 유심히 보았는데, 그들이 가는 길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길로 걸어갈 때에는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여 언제나 자유로움을 느껴야 합니다. 엄위께서 우리가 당신의 밀실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거기에 기꺼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큰사랑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생각하고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도 큰 사랑의 보증을 주실 때 얼마나 큰 사랑을 보여 주셨는지 명심합시다.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생각하여 우리 마음에서 그런 사랑을 일으키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에 이 사랑을 한 번 새겨 주신다면, 우리는 만사가 용이하게 되어 짧은 시간에 발전을 거두며 아무 어려움 없이 일할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1515-1582) 

 

데레사는 혼란과 개혁의 시기인 16세기에 살았는데, 그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변동과 탐험의 시대였다. 그녀의 일생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절정에서 시작하여 트렌트 공의회 직후 에 끝났다.

 

하느님께서는 데레사에게 은총을 주시어 그녀가 그 은총 안에서, 은총을 통하여 거룩하게 되고 교회와 세상에 그 흔적을 남기도록 하셨는데, 그 은총은 세 가지이다. 즉 그녀가 여자라는 것과 관상적이라는 것, 그리고 활동적인 개혁자라는 것이다. 데레사는 여자임에도 그 시대의 남자들 세계에서까지 자신의 두발로 버티고 섰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침내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감으로써 '그녀 자신의 여자'가 된 것이다.

 

그녀는 신비에 쌓일 만큼 침묵 속의 인물은 아니었다. 아름답고, 재주있고, 활달하고, 붙임성 있고, 정이 많고, 용감하고, 열정적인 그녀는 매우 인간적이고 여성적이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역설적인 신비를 지니고 있다. 현명하면서도 실제적이고, 영리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잘 조화시키며, 신비적이면서도 정력적인 개혁자였다. 그녀는 거룩한 여인이며 지극히 여성적인 사람이었다.

 

데레사는 '하느님을 위한'여인, 기도와 규율과 연민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께 속해 있었다. 그녀 자신의 회개는 밤을 새워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서 겪는 투쟁으로서, 계속되는 정화와 고통이 내포되어 있다. 그녀는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해를 받고 그릇된 판단을 받는 등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도 끝까지 용감하고 충실하게 투쟁했다.

 

그녀는 또한 자기 자신의 평범한 기질과 병 그리고 자시늬 거부반응과도 싸워야 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서 그녀느니 기도와 생활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기도와 관상에 대한 그녀의 저술은 힘에 넘치고 실천적이며 은총으로 가득 찬 그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진정 기도의 여인이었고 하느님을 위한 여인이었다.

 

데레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비록 관상적이긴 하였지만 자기 자신과 갈멜 수녀들을 쇄신하여 본래의 규율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인도해 나가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 그녀는 여섯 개가 넘는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언제나 쇄신하고 개혁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글을 쓰면서 싸움을 계속했다.

 

그녀는 자기 안에서, 기도 안에서, 생활 안에서 그리고 개혁하려는 그녀의 노력 안에서 또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참으로 타인을 위한 여인이었으며 영감을 받고 생명을 주는 여인이었다.

 

설명 :

우리는 혼란의 시대요 개혁의 시대이며 해방의 시대인 현대에 살고 있다. 여성 해방 운동의 추종자들은 데레사에게서 도전적인 표본을 볼 것이다. 쇄신의 기수와 기도의 주창자들은 모두 데레사를 그들이 존경하고 본받을 수 있는 여인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인용 :

데레사는 고통(육체적인 병, 개혁에 대한 반대, 기도의 어려움 등)의 지속적인 현존과 그 가치를 잘 알았고 그 고통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으며, 심지어는 주님께 고통이든 죽음이든 주십사고 청하며 고통을 바라기까지 했다.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말했다.

 

"오! 나의 주여, 당신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중에 보상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된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만일 그 가치를 이해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멜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72. 여성편 (6) 아빌라의 데레사 

 

아빌라의 데레사는 행동파이자 열정가로서 이상과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관상과 활동의 조화 일치 이뤄

‘맨발의 가르멜회’ 창립한 개혁가

교회박사이며 기도신학의 권위자

 

 

“거의 2천년동안 성교회 품에 축적된 모든 지혜와 지식과 기도와 신비적인 사실들에 관한 체험을 보관하고 있는 웅장한 저장고.”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찬사와 함께 성 베르나르도, 성 보나벤투라, 성 이냐시오 로욜라, 십자가의 성 요한 등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꼽히는 성인이 아빌라의 데레사( Teresa de Avila, 1515~1582)다.

 

가르멜 수도원 개혁가, 신비가, 교회학자로 알려진 데레사는 ‘수도적 관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조화와 일치’라는 그만의 독특한 영성 사상을 보여주었고 ‘맨발의 가르멜회’(discalceati) 창립 등에서 볼 수 있듯 개혁 정신의 소유자였다. 또 행동파이자 열정가로서 현실성을 잃지 않은, 이상과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를 드러낸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무엇보다 ‘아빌라의 데레사’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는 바로 ‘기도’다. 그는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기도 체험과 인식 그리고 그에 대한 완벽한 묘사로 학계뿐 아니라 교도권으로부터 기도 신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껏 기도 생활의 귀감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9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난 데레사는 할아버지 때 유다교에서 개종한, 열심한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순교자전 읽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7살 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읽고 감동, 자신도 순교를 위해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가출을 감행할 만큼 남다른 면이 있었다.

 

교육을 위해 14세 때 아우구스티노 수녀회에 맡겨진 데레사는 19세 때 아빌라의 강생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 수련기를 밟았다. 이후 20년 동안은 신체적 시련은 있었으나 평범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0세에 이르러 내적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된 데레사는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불가사의한 신비적 현상들도 체험하게 된다. 또 이때부터 데레사가 느낀 것은 가르멜회의 개혁과 초창기 그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많은 반대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562년 4명의 수녀들과 함께 가르멜의 초기 규칙대로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고자 ‘맨발의 가르멜회’(discalceati)를 시작했다.

 

아빌라에 성요셉 수도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카스티야 지방과 안달루시아 지방에 개혁 가르멜 수도원을 17개나 건립했다.

 

수도원을 새로 세우는 것 뿐만 아니라 초기 가르멜회의 규칙인 엄격한 청빈 고행 기도의 삶을 전파한 데레사는 남자 수도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그의 표어는 ‘활동하고 고통당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개혁에 반감을 가진 완화 가르멜회(신발의 가르멜회)와의 충돌로 톨레도로 추방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지만 결국 영적 지도자 도밍고 바네스 신부 등과 종교 개혁에 힘썼던 예수회 신부들의 도움으로 맨발 가르멜회는 완화 가르멜회로부터 분리돼 독립 수도회로 교황의 인정을 받게 됐다.

 

데레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고독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세계로 몰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아 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영혼의 여정을 ‘묵상의 기도, 고요의 기도, 합일의 기도’로 묘사했으며 이러한 가르침 등을 통해 사람들이 물질생활의 풍요로 인해 퇴폐와 타락에 빠져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런 면에서 스페인 가톨릭 정신의 발로로 생겨난 ‘신비주의 문학의 거성’이라는 명칭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신앙심과 도덕적 윤리관을 불어 넣는데 힘썼던 그의 노력과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바쁜 와중에도 데레사는 많은 편지와 글을 썼다.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영혼의 성’은 그의 대표작이면서 또한 세계 종교 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이외에도 ‘고백록’처럼 자신의 영혼 상태를 이야기 하며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을 설명한 ‘천주 자비의 글’ 등의 작품이 있으며 400여통의 편지를 모은 ‘서간집’과 후렴구를 지닌 민요적 성가 형식의 시들이 전해진다.

 

문장 역시 정감 어린 필치와 명쾌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는데 캐나다 시인 오 하간 박사는 ‘그녀는 글을 쓴 여인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 존중되고 있는 그의 글은 ‘초자연적 체험들에 대한 설명과 열매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는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세밀하면서도 단순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것들을 단순한 대화문 형태로 설명해 주었고 또 그리스도교 전통의 여러 신비가들이 가르친 내용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기를 원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라고 기구하며 고통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임종전 “내 영혼아! 아무것도 근심 말고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하느님만이 변함이 없으시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얻는 사람은 그 외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며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1582년 66세 나이로 “주님 저는 성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던 데레사는 1614년 시복되었고 1622년 시성됐다.

 

[가톨릭신문, 2005년 11월 6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8. 수도회 창설자편 (3) 가르멜산 은수자들

 

 

가르멜산에 있는 엘리야의 우물(왼쪽아래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고행, 가난 통해 하느님과 일치 꿈꿔

13c 은수자들이 ‘엘리야 우물’ 근처 살며 시작
맨발의 가르멜회 등 봉쇄, 활동 수도회로 구분

 

 

관상수도회를 일컬을 때 항상 그 맨 앞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가르멜회이다. 여타의 수도회들이 일정한 창설자에 의해 시작되고 그 창설자의 정신과 영성을 본받아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가르멜회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로부터 시작된 가르멜회는 봉쇄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로 구분되는데 봉쇄 수도회 중에서도 ‘맨발의 가르멜회’(Ordo Camelitarum Discalceatorum)는 O.C.D.라는 약칭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OCarm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이미 13세기부터 여성들이 이 수도회 규칙에 따라 서원을 한 사례가 보이지만 가르멜 수녀회는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인준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됐다.

 

현재 전세계의 가르멜회 회원들은 남자가 3700여명, 여자가 10만 5000여명이고 이 중 한국에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그리고 가르멜 전교 수녀회 등이 있으며 재속회로 가르멜 제3회가 있다.

 

엘리야가 기도했던 가르멜산

 

12세기 말경 제1차 십자군 원정 후 일단의 유럽인들이 팔레스티나 북부 갈릴레아에 있는 가르멜산에 정착한다. 이들은 13세기 초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있는 작은 암자들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고, 그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인근 성녀 마르가리타 수도원의 희랍 수도승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 가르멜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 곧 이스라엘의 하이파 동남쪽에 있는 거룩한 산이다.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는 언제나 가르멜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도 이렇게 믿고 있었고, 1281년 회헌 서두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가르멜산에서 경건히 생활하던 때부터 구약과 신약의 성조들은 엘리야의 우물 곁에서 거룩한 계승을 부단히 지속하며 칭송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약 570여 년경이었고 후대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던 알베르토(1205~1210)는 1206년에서 1214년 사이에 은수자들의 요청에 따라 은수자들 자신이 제시한 제안에 적합한 하나의 생활 규범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이 규칙서에 따르면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의 통솔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바로 이것이 수도회 설립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13세기에 팔레스티나 최북단 항구인 아코(Akko)의 주교였던 드비트뤼도 팔레스티나에 라틴 왕국이 설립된 12세기에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가르멜산에 정착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 규칙은 원장의 선출과 함께 시작돼 순종 아래 각 수도자에게 개인 숙소가 배당되며 거기서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머물러야 한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중단 없는 개인기도이고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전례기도가 개인기도에 부가된다. 규칙서는 은수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통합을 제시한다.

 

1226년 교황 호노리노 3세는 이 규칙을 승인한다. 이로써 초기의 규범은 참된 규칙이 되었는데, 1229년 그레고리오 9세는 가르멜 은수자들을 탁발 수도회들의 생활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하면서 가르멜 회원들에게 탁발 혹은 공동체적 가난을 부과했다.

 

탁발수도회로 인정 받아

 

은수자들은 1235년 서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회교도들의 탄압에 의해 서방으로 옮아간 수도회는 13세기말까지 150여개의 수도원이 12개 관구로 나뉘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15세기까지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과 포르투갈 등지까지 수도회가 확산됐다.

 

서방으로의 이전과 탁발의 부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수도회는 이제 은수적이고 관상적인 수도회에서 탁발수도회로 옮아가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상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가르멜회의 영성은 이제 관상과 활동간에 균형을 잡아나가게 되며 이 오묘한 두 축은 가르멜회 영성의 발전 안에서 중심축을 이뤄 왔다.

 

1274년 리용 공의회에서 탁발 수도회로서의 성격을 잠정적으로 인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1298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와 동일하게 탁발 수도회로서의 특전과 면제를 부여했다.

 

1317년 요한 22세 때 탁발 수도회를 향한 가르멜회의 발전 과정을 종결됐다고 할 수 있다. 즉 가르멜 회원들은 항상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수도회의 주된 목표, 즉 공동체 전례 기도에 밀접히 연결된 관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 종속시키면서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가르멜회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마리아 신심은 이 수도회의 상징이 됐다.

 

14세기에 들어와서 서방 교회의 분열과 함께 가르멜회도 지역에 따라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개혁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온 가르멜회는 쇠퇴와 부흥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17일, 박영호 기자]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스페인 아빌라
 
인생의 스승, 대(大) 데레사의 고향을 찾아
 
글 ∙ 사진 전용갑 요셉
 
 
사실 예전의 스페인은 내게 ‘태양과 정열’의 나라가 아니었다. 공부 욕심 하나만 믿고 홀로 십 년을 버틴 곳이기에 따사로운 기후도 외로움을 그다지 달래주지 못했다. 또한 늘 넉넉지 못했던 주머니 사정으로 마음에 열정 대신 차가운 현실의 냉기가 감돈 시간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내가 얻은 진정한 수확은 가시적인 학위증이 아니라 그 사회에 묻어 살며 경험한 일상과 갖가지 방황, 실수 등 대가를 치르고서야 체득한 인생의 소소한 교훈들이었음을 훨씬 나중에 깨달았다. 여기 소개하려는 아빌라 역시 가난한 유학생 시절 시간을 쪼개 성지순례 안내를 하며 찾던 곳이니, 그 느낌은 관광객이나 돈독한 신앙으로 무장한 순례자들과는 다를지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모 발현지나 사라고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등 스페인의 국가적 전통에서 유래한 추상적이고 웅장한 성지보다는 로욜라나 하비에르, 폰티베로스 같은 역사적 인물의 체취가 밴 소박한 성지를 더 좋아했다. 이 역시 종교적 감화를 느껴서라기보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이들의 삶이 대규모 성전 주변을 떠도는 믿기지 않는 기적이나 신화적 서사보다 훨씬 마음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돌멩이와 성인들의 땅
 
대 데레사라 부르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내가 ‘인간적’ 매력을 느낀 성인 중 하나다. 올해 초 학술연구차 스페인을 방문했다가 불현듯 그녀의 탄생과 죽음의 현장인 아빌라와 알바 데 또르메스를 다시 찾은 것도 성인에 대한 경외보다는 이를테면 존경하는 은사의 고향에 불쑥 들러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으리라.
 
16세기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맞서 스페인 교회 내부의 자발적 혁신운동을 이끈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중부 카스티야 지방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예부터 ‘돌멩이와 성인들의 땅(Tierra de cantos y santos)’이라 부르는데,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고원지대에 아빌라뿐 아니라 그녀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회 개혁운동을 주도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 태어난 폰티베로스가 서로 지척에 있어 이러한 별칭이 시적 수사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복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데레사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소녀였던 듯하다. 예닐곱 살 때 성인들의 이야기에 감화된 그녀는 두 살 위의 오빠인 로드리고와 함께 이교도의 땅으로 가 순교하고 싶어 가출했다가 말을 타고 쫓아온 삼촌에게 붙잡히고 만다. 민간전승에 따르면 그녀가 붙잡힌 곳은 아빌라 성벽 외곽 아다하 강 건너 ‘네 개의 기둥(58쪽 사진)’이라 부르는 지점인데, 여기는 중세부터 성 레오나르도를 기리는 네 개의 돌기둥과 돌십자가 하나가 세워진 곳이다. 현재의 석조물은 성녀의 생존 당시인 16세기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는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인 아빌라의 성벽(61쪽 사진)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참 인간적인 성녀
 
많이 걷는 노고를 줄이려면 구시가지로 들어가기 전에 성벽의 북쪽 외곽에 있는 강생 수도원을 먼저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수도원은 데레사가 스무 살 때 수녀로 입회한 곳이다. 어머니와 사별한 아버지를 두고 새벽에 집을 나서던 날의 심정을 그녀는 “뼈마디 하나하나가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기록하였다.
 
18세기에 개축한 현재의 건물은 여전히 가르멜 수녀원으로 쓰고 있으며 예전 공간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꾸몄다. 꽃다운 나이에 두드린 바로 그 문을 거쳐 내부로 들어서면 16세기 수도원의 분위기가 그대로 펼쳐진다. 아직도 그녀의 지문이 남아있을 듯한 당시의 돌기둥 밑에 수녀들이 사용하던 고문서함과 가구들, 기둥에 묶여 채찍질당하는 예수와 실물 크기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벽화가 보인다.
 
2층에서는 옛 수녀원의 부엌과 수녀들이 사용하던 악기들, 왼쪽 중앙층계에서는 인형으로 재현된 데레사의 다른 일화를 만나볼 수 있다. 수도원 전통에 따르면 어느 날 그녀는 이 층계에서 소년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나는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하는 소년에게 “저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답했다고한다. 하지만 역시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곳은 맨 위의 3층일 것이다. 성녀가 베고 잤다는 딱딱한 목침과 평생 두 벌만 지니고 번갈아 사용했다는 수도복의 도크(목둘레에 착용하는 흰 테두리)에 묻은 땀이 밴 얼룩은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 밖에 27년간 이곳에 머물며 원장수녀 시절 마지막 3년간 지낸 방, 서원할 때 사용한 방석, 직접 쓴 서간문 등 그녀의 체취와 손때가 묻은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강생 수도원에서 나와 성 비센떼 문을 거쳐 시가지로 들어서면 11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초기 고딕 양식 성당인 아빌라 주교좌성당에 발길이 닿는다. 고색창연한 이천년 성당은 외부에서 보면 단단한 성채를 연상케 하는데 이는 유사시에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 도시를 수비하려는 이중의 용도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로를 연상시키는 골목들을 지나 남쪽의 ‘성녀 데레사의 문’ 방향으로 10분쯤 걷다보면 성문 안쪽에 인접한 성녀의 생가를 찾을 수 있다.
 
성당으로 개축된 내부로 들어가면 재현된 옛 정원의 일부에서 오빠와 함께 천진난만하게 노는 어린 데레사의 모습과 함께 16세기 스페인 신비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이기도 한 그녀의 확대복사된 서체를 볼 수도 있다. 정원 맞은편에는 데레사가 태어난 방을 개조한 경당이 있다. 제단벽화의 정중앙에 있는 황금빛 성상은 여전히 바래지 않는 그녀의 영성을 전하는 듯하다.
 
경당의 크리스털 창문에는 그녀가 남긴 ‘네 개의 기둥’과 강생 수도원의 예수 영접 일화가 햇살을 받아 선명한 빛을 발한다. 성당을 나와 오른편의 성물가게로 들어서면 성녀가 세운 18개 개혁수도원 사진과 함께 절단된 손가락 하나가 그녀가 역사적, 실존적 인물임을 다시금 주지시켜 준다.
 
 
부패의 수렁에서 교회를 구한 개혁가
 
데레사는 귀족의 딸로 태어나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기꺼이 형극의 길을 선택했다. 여러 기적과 일화들에 가려 지나치게 신비화된 감이 있지만 그녀는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했던 초연한 수녀는 아니었다. 불같은 성격으로 동료 수도자들을 매섭게 독려하였고, 십자가의 성 요한을 비롯해 많은 동지를 포섭할 만큼 논리와 설득력도 있었다. 개혁과정에서 숱한 음해와 중상모략을 이겨낸 정치력은 물론 수도원 건축자금 마련을 위한 대외적 로비에도 뛰어난 현실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개혁을 이상만으로 이룰 수 없음은 성녀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말이다.
 
16세기 부패의 수렁에서 교회를 구한 그녀의 ‘태양과 정열의 기질’에 비해 고작 개인의 정서적 문제나 경제적 불편으로 유학생활을 힘겨워했던 내 모습은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내가 성녀 대 데레사를 인생의 은사처럼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용갑 요셉 -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4-2004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 캠퍼스 스페인어 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세계 교회 신앙유산 순례 - 스페인 알바 데 토르메스
 
성녀 대 데레사의 마지막 흔적, 알바 데 토르메스를 찾아
 
글 전용갑 요셉
 
 
성녀 대 데레사의 탄생지인 아빌라를 뒤로하고 서북쪽 방향으로 한 시간 반가량 달리니 산등성이에 우뚝 솟은 살라망카가 눈에 들어왔다. 13세기 초 건립된 이 나라 최고(最古)의 대학이 있는 유서 깊은 도시 외곽을 수심이 깊지 않은 한 줄기 강이 감아 흐른 후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알바 데 토르메스(Alba de Tormes)로 이어진다. 이 물줄기가 16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악자(惡者) 소설인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배경이 되었던 토르메스 강이다.
 
450년 전 가난한 소년 라사리요는 그가 섬긴 여러 주인을 통해 16세기 스페인의 귀족과 교회의 위선과 탐욕을 해학과 풍자로 신랄하게 비판한다. 양식을 숨겨놓고 혼자만 배불리 먹는 신부, 사기행각으로 면죄부를 파는 수도승, 하녀와 불륜에 빠지는 고위성직자에 이르기까지…. 대 데레사가 생존하던 시절 종교재판에 회부될 것을 두려워한 익명의 작가가 쓴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왜 그녀가 힘겨운 개혁의 가시밭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
 
살라망카 입구에서 낡고 좁은 지방도로로 바꿔 타고 반시간쯤 더 가다보면 드디어 인구 5천 명의 호젓한 소읍인 알바 데 토르메스에 닿게 된다. 지명에서 스페인의 권문세가였던 알바 공작가문의 영지였음을 알 수 있는 이 마을 어귀 강가에 대 데레사가 1571년 지은 성모영보 수도원이 있다.
 
성녀는 1582년 가을의 어느 석양 무렵 이곳에 도착한다. 그해 여름,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운 부르고스의 수도원을 떠나 메디나 델 캄포와 바야돌릿을 거쳐 고향인 아빌라로 향하던 중 갑자기 공작부인을 만날 일이 생겨 일정을 변경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심장질환을 앓고 있던 성녀는 여독까지 겹쳐 쓰러지고 만다.
 
돌이켜보면 1562년 마흔일곱의 늦은 나이로 아빌라의 강생 수도원을 나와 20년 동안 척박하고 거친 카스티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수도원 신축사업과 개혁운동에 매진해 온 바였다. 도착하자마자 수도원에 몸져누운 그녀는 이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예감한다. 고향에서 임종을 맞을 수 없는 아쉬움이 컸으나, 그나마 알바 데 토르메스에는 맨발의 가르멜회 수녀들과 여동생인 후아나 데 아우마다가 시집와서 살고 있었기에 조금은 심정적인 위안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현재까지 맨발의 가르멜회에서 운영하는 성모영보 수도원 내부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 데레사의 생애 마지막 숨결이 묻어있는 조그마한 방(4월호 62쪽 사진)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10월 3일 병자성사를 받으며 성녀는 “주님, 마침내 그토록 소망하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주님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상에 누운 채 십자가를 보듬어 안고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후 의식을 잃고 10월 4일 밤 9시에 선종하게 된다.
 
대 데레사는 이튿날 수도원에 안장되는데 우연히도 그날은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게 되는 첫날이었다. 성녀의 축일이 10월 15일인 이유는 두 달력의 편차에 따라 10월 4일의 다음날이 바로 15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아무튼 민간전승에 따르면, 데레사가 선종하던 그 시각 토르메스 강의 물결이 마치 그녀의 마지막 심장박동처럼 숨 가쁘게 일렁였으며 임종 후에는 온 마을에 향기로운 꽃향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흩어진 성녀의 유해
 
성녀가 선종한 방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박물관이 꾸며져 있다. 여러 성물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유리벽 안에 놓여있는 성녀의 왼쪽 팔뼈와 심장이다. 순례객에게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느끼게 할 법도 하지만 이는 알고 보면 세인들의 불신과 다툼 그리고 기복신앙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대 데레사가 돌아가신 뒤 그녀의 탄생지인 아빌라와 임종을 맞은 알바 데 토르메스 사이에 서로 유해를 모시겠다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관을 열게 되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고 일부에서는 이 기적이 교회의 자작극이라는 소문도 돌았던 모양이다. 결국 성녀의 유해에 어떠한 약품이나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신에 칼을 들이대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몰래 아빌라로 빼돌려졌던 성녀의 유해는 알바 공작이 로마에까지 탄원하여 결국 알바 데 토르메스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복잡한 과정에서 성녀의 오른발과 턱의 일부는 로마에, 왼쪽 손은 리스본에, 왼쪽 눈과 오른손은 론다에, 그리고 손가락과 살 조각들은 아빌라를 비롯한 스페인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현재 알바 데 토르메스의 성모영보 수도원 내 중앙제대에 모셔진 유해는 나머지 부분인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세인들의 소동과 광기가 빚은 끔찍한 ‘카니발리즘’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수도원 오른쪽으로는 맨발의 가르멜 수사회에서 운영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성당’이 있다. 1695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년)에게 봉헌된 첫 성전으로서 의미가 있다. 성모영보 수도원과 십자가의 성 요한 성당을 끼고 마련된 조그만 광장 한 편에는 수도회가 운영하는 또 다른 박물관이 있으며 부속 성물가게에 들어가면 데레사와 관련된 성물들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다.
 
미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알바 데 토르메스를 돌아보는 데에 두어 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순례란 눈보다는 마음의 볼거리를 우선하는 여정이므로 이 마을을 방문할 이유와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토르메스 강을 건너 다시 살라망카로 향하는 비좁은 국도로 접어드니 석양이 지고 있었다. 4백여 년 전 어느 날의 이 시간, 지친 몸을 이끌고 저 지평선 너머 마을로 사라지던 대 데레사의 마지막 뒷모습과 귀족의 딸로 태어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감수한 그녀의 생애를 되새기다 보면 어느덧 순례자의 눈가도 노을처럼 붉게 물들기 쉽다.
  
[경향잡지, 2008년 5월호]

 

 

예수의 성녀 데레사
 
배문한(수원 가톨릭 대학장 · 신부)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자요 교회 학자란 칭호를 받았을 만큼 저술가로서 유명한 성녀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의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화 데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데레사라고도 불린다.
 
어렬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순교자전 읽기를 좋아하여, 7살 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읽고 감동한 뒤 자기도 순교하기로 결심하였다. 오빠를 설득시켜 순교자를 내는 아프리카로 향해 가출한 적도 있었으니 어릴 때부터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살 때 어머니를 잃은 충격이 컸으나 성모님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간청하며 의탁하였다. 14살 때 아버지는 딸의 교육을 위해 아우구스띠노 수녀회에 맡겼다. 그때만 해도 수녀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5년 후엔 자신의 구령을 위해 가르멜 회에 입회하였다. 입회 후 2년 만에 중병을 얻어 수녀원에서 나와 쉬면서 치료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다시 입회하였다. 처음 15년간 그의 영성 생활은 미지근한 편이었으나 45세 때 주님의 현시를 받게 되면서 회개하여 신비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의 자서전에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그가 느낀 것은 가르멜 회의 개혁이었고, 초창기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녀원은 수녀가 너무 많아 수녀들간에 경제적 불균등이 있었고, 내방객이 많고 기도 시간이 짧았다. 그 점을 고치기 위해 더욱 엄격하고 봉쇄적이고 청빈을 실천하며 묵상 기도에 전념하는 소수의 공동체로서의 수녀원으로 개혁코자 결심했다. 많은 반대와 오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562년에는 성 요셉 새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 후 20년간 17개의 수녀원을 설립하였고 남자 수도원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의 표어는 “활동하고 고통당하고 사랑하는 것”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를 생활화하였다.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편지를 쓰고 글을 썼다. 편지 내용은 요리법, 약초에 의한 치료법, 경제와 결혼을 위한 지침, 외교적인 처세술, 농담과 훈계 등으로 꾸며져 있어 그의 다양한 지식을 말해 준다. 그의 저서 중에는 “자서전” “영혼의 성” “완덕의 길”이 유명하다. “완덕의 길”은 영성 생활의 초보자에게, “영혼의 성”은 기도 생활을 더 깊이 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고 그의 문장은 뛰어나 읽는 이들을 매혹시켰다. 카나다 시인 오 하간 박사는, “그는 글을 쓴 여인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까지 칭찬했다. 그의 저서는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존중되고 있으며 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심오한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대로 기록한 책으로서, 말하자면 그 안에 계신 주님 자신의 저작이라고도 한다. 그의 신비 생활의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요, 나에게는 하느님이 전부”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에 있어서 주의 뜻을 이행함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와 여러 방면의 깊은 지식은 물론, 왕이나 고위 성직자에게도 바른 말로 충고할 수 있는 용감성과,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 백절불굴의 투지와 사람을 다루는 재치도 겸비하였다. 일부 수녀들이 그가 원장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을 때, 원장 자리에 성모상을 안치하고 수녀원 열쇠를 바치며 ‘이분이 여러분들의 원장’이라고 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역량을 보였다. 그는 또한 바위에 깔려 죽은 조카를 안고 기도하여 소생시킨 일도 있고, 유명한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된 그의 성상과 같이 기구 중에 불창을 든 천신이 나타나 그의 심장을 찔러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불탔다고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의 친구가 못되는가에 대해 답하길, 예수께서 고통을 주는 것이 친구를 대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기에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라고 기구하며 고통 아니면 죽음을 간청할 만큼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고통을 기원했다.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임종 전에 남긴, “내 영혼아! 아무 것도 근심 말고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가고 하느님만이 변함이 없으시다. 안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얻은 사람은 그외 아무 것도 필요치 않으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말로 주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표현하였다.
 
1582년 10월 4일 저녁,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고, 1617년 스페인 국회는 그를 스페인 주보로 선언하였으며 1622년 사후 40년 만에 시성되고 1970년 9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축일은 10월 15일.
 
우리도 성녀처럼 고통을 청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우리가 당하는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사랑할 줄 알아야겠다.
 
[경향잡지, 1986년 10월호]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자서전 안에 나타난 기도와 활동의 관계성
 
김준년(대구 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머리말
 
많은 이들이 사도직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가끔 그 효과가 없는 경우도 사실이다. 그 이유를 알아보면 활동의 원천인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의 깊이 있는 기도생활을 하는 경우라면 자신의 활동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기도생활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초심자들에게는 활동에 앞서 기도하는 삶이 필수적이다.
 
데레사 성녀(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은 10월 15일이다.)는, 활동의 원천은 기도이며 기도의 목표는 하느님과의 일치이고 영혼은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더욱 효율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데레사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해주는 기도의 단계를 네 가지의 물로 비유하고, 기도자가 어떻게 물을 긷는지에 따라서 기도의 단계가 구분된다고 한다. 기도자는 마지막 네 번째의 물을 마심으로써 관상의 단계에 도달할 것이고 더욱 효율적인 사도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본 소고에서는 데레사 성녀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자서전』을 중심으로 하여, 기도에서 어떻게 활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도의 단계와 활동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팔의 힘으로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퍽 힘겨운 일이다. 이는 힘든 묵상에 비교된다. 둘째는, 두레박이 매달린 도르래를 손잡이로 돌리면서 긷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힘이 덜 들고 많은 물을 길을 수 있다. 이는 고요의 신비적인 기도에 비교된다. 셋째로는, 시내나 도랑에서 물을 끄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땅은 관개가 잘되어서 정원사의 일이 훨씬 줄어든다. 이는 일치의 신비적인 기도를 의미한다. 넷째는 다량의 비가 내리는 것인데 이 경우는 우리의 힘든 일은 아예 없고 주님께서 친히 물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황홀경의 일치의 신비적인 기도를 의미한다.1)
 
이렇게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법은 곧 기도를 하는 네 가지 방법을 의미한다. 정원을 비옥하게 하는 네 가지 관개의 방법은 기도의 네 가지 차원2)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정신적인 기도에 해당되고 두 번째 방법은 고요의 기도이며, 세 번째 방법은 활동의 휴지(休止)이다. 그리고 네 번째 방법은 일치의 기도이다.
 
데레사는 활동의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혼이 기도를 통해서 충분히 성숙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자기 자신에게도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하신 뜻은 이러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영혼이 그 양식으로써 넉넉히 보양되어 튼튼하게 될 때까지는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자서전 17,2).
 
실제로 데레사는 수년 동안 그녀의 불완전함 때문에 단지 세 명에게만 영향을 끼쳤음을 고백하고 있다. 반면에 그녀가 영적인 성숙의 단계에 도달할 때쯤에 (이 시기는 개혁의 시초와 일치하는데) 그녀의 영향력은 약 40명의 수도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3) 이제 기도의 성숙한 단계를 표시하는 네 가지 눈물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살펴보자.
 
 
1) 첫 번째 눈물
 
데레사는 정원에 물을 주는 네 가지 방법을 기도의 네 단계에 비유한다. 주님은 네 가지의 물로 정원에 물을 대며 묵상기도를 하는 사람을 도와주시는 것이다.
 
데레사는, 첫 번째 방법인 묵상기도를 시작한 영혼은 주님께서 즐기실 정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초보자는 우선 정원에 난 잡초를 뽑아야 한다. 그리고 정원사이신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식물을 가꾸고 물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동산에 피어나는 덕행의 꽃을 보러 오시고 그 향기에 흐뭇해하실 것이다(자서전 10,6 참조). 데레사는 기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인간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차츰 인간의 노력보다 하느님께서 더 많이 관여하신다고 한다.
 
묵상기도의 초기에서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데레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덕을 강조하였다. 실상 어떤 영혼은 자신에게도 허물이 많은데도 다른 사람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좋은 영향을 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녀의 삶의 명백한 모순이 그녀가 돕기를 원했던 사람들을 위한 유혹과 혼란의 동기가 되었다. 그 갈망은 좋은 것이었으나 덕들은 아직도 충분히 강하지 않았고 그 빛은 대단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초심자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다른 유혹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생활의 단맛과 유익을 맛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높은 완덕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 원의는 나쁘지 않으나,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중히 능숙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주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이 덕행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혹 거리가 됩니다(자서전 13,8).
 
그러므로 기도의 처음에는 오로지 하느님만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에 충실하도록 먼저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눈물
 
첫째 기도가 팔의 힘으로 물을 긷는 것이라면, 둘째 기도는 정원사가 양수기를 돌려 물을 긷는 것으로서 이때는 피로가 훨씬 덜하다. 또 늘 팔의 힘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쉴 시간도 주어진다. 이 기도를 고요의 기도라고 한다. 이 기도에서 영혼은 마음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제 영혼은 이전의 오성(悟性)으로만 하는 기도에서는 얻을 수 없을 정도의 덕이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영혼의 기능이 모아지는데, 의지는 하느님께 포로가 된다. 그러나 다른 두 기능 곧, 오성과 기억은 아직 방황한다.
 
다른 두 가지 능력은 의지를 도와서 이런 큰 보화를 즐길 수 있게 준비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때 의지는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으면서도 이 두 가지 능력 때문에 어색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의지는 그런 것에 상관하지도 말고 자신의 평화와 고요 중에 머물러야 합니다(자서전 14,3).
 
이 두 번째 기도에서는 물의 수면이 전보다 더 가까이 있어서 영혼은 물을 긷는 데 피곤함을 덜 느낀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초자연적인 활동의 시작을 알린다. 기도하는 자의 지성적인 피로함이 감소되고 그 안에서 위로가 시작된다.4) 그리고 주님께서 더욱 자기 가까이 계심을 느끼고 자기의 기도도 예전보다 잘 들어주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 고요의 기도에서 영혼은 주님의 현존과 도움을 한층 더 분명하고 확실히 느끼게 된다.
 
이 고요의 기도에서 이 지존하신 임! 우리의 주님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윤허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고 당신 현존의 효과를 느끼도록 하시려 합니다. 그분은 영혼에게 안팎의 큰 만족을 베푸시면서 특별한 양식으로 영혼 안에서 일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자서전 14,6).
 
이 기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느님 사랑의 불꽃이다. 이 기도에서 하느님은 사랑의 불꽃을 주시는데, 이 불꽃으로 영혼은 고요와 잠심의 상태를 유지한다.
 
이 고요의 기도는 주님께서 영혼 안에 불붙이시는 참사랑의 작은 불꽃입니다. 임은 이렇듯이 즐거움에 넘치는 이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영혼에게 조금씩 알아듣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고요, 이 잠심, 진정 이 작은 불꽃은 하느님의 얼의 효과입니다. 이것은 악마나 또는 우리의 노력에서 생기는 맛은 아닙니다(자서전 15,4).
 
데레사는 이 기도가 자기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느님의 얼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고요의 기도 역시 인간 자신의 노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잘 준비된 영혼에게 이 은총이 주어질 것이며, 하느님께서 이 영혼들에게 이러한 선물을 주시는 것은 다른 영혼들의 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어쨌든 이 고요의 기도를 시작한 영혼은 기도로써 다른 사람들을 돕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도 한다. 고요의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이 다른 이를 위한 기도의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기도의 은총이 온전히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된 것이고, 그 자비에 대한 응답의 행위가 그러한 봉사활동이기 때문이다.5)
 
또한 이 고요의 기도를 시작한 영혼은 이미 하느님과 벗의 관계를 시작하였기에 벗으로서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봉사를 시작하여야 한다. 곧 그리스도와 우정의 관계를 맺었으므로 이제 그분의 삶에 동참하고 그분을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도움으로써 보상을 받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보수 없이 임금님께 시중드는 헌신적인 용감한 기사를 본받는 일도 마찬가지로 중대한 사정입니다(자서전 15,13).
 
이 둘째 단계의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덕보다도 훨씬 뛰어난 덕을 얻을 수 있다. 곧 자신의 성찰로써 얻을 수 있는 겸손과는 다른, 그보다 더 뛰어난 덕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노예적인 두려움을 거두시고 효성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두려움을 일으키신다.
 
 
3) 세 번째 눈물
 
세 번째 눈물에서 기도자는 훨씬 쉽게 하늘의 물을 끌어온다. 데레사는 이를 시내 또는 샘에서 끌어오는 것에 비교하는데, 인간의 노력은 아주 조금밖에 들지 않는다.

그럼 지금부터 정원의 관개에 쓰이는 세 번째 물에 대해 말해봅시다. 그것은 시내 또는 샘에서 흘러내리는 물입니다. 이 물을 끌어오는 데 약간의 수고는 들지만 관개의 노고는 훨씬 줄어듭니다. 사실 주님은 정원사를 크게 도와주시려 하시니, 말하자면 그를 대신해서 거의 모든 일을 당신께서 하십니다(자서전 16,1).
 
세 번째 눈물의 기도에서 영혼은 이전보다 훨씬 더 하느님과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영혼의 기능이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영혼은 하느님과 거의 일치되어 있으나 그의 능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모든 능력이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해 있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치가 앞서 말한 묵상기도에서보다 더 완전한 것임을 명확하게 인정했습니다(자서전 16,1).
 
세 번째 물에서는 일치의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분처럼 변모하게 되고 선을 수행할 능력을 갖게 된다. 이 단계에서 영혼의 특징은 자기가 받은 은혜에 취하여 이 은혜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는 크나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기리는 일 이외에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6)
 
이때 영혼은 새로운 열정, 다시 말하면 새롭게 변모된 영혼으로서 활동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은 나머지, 어서 이 세상을 떠나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어서 그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충분히 섬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므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세상에 머물면서 하느님께 봉사하고자 한다.
 
이때의 영혼은 초기 기도단계에서 자기 자신은 덕도 없지만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려는 지나친 열정과는 다른, 참된 열정을 갖기 시작한다. 이제 그에게 시작된 사도적인 활동은 더 이상 인간적인 열정이라고 볼 수 없다. 그가 사도직 활동을 하도록 충동시킨 힘은 저 옛날 사도들을 충동한 사랑의 큰불인 것이다. 영혼은 이 큰불로써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무수히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 이끌어올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데레사의 기도가 결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도직의 열정으로 이끄는 효율적인 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영혼은 더욱 강력한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에게 자라난 덕과 무관하지 않다. 영혼은 덕의 향기를 뿜어내고 이제 그 덕분으로 큰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데레사의 활동이 기도와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하여튼 이 묵상기도에서는 앞서 말한 고요의 기도에서보다 덕이 더 굳건하게 되어 영혼은 그것을 모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온통 딴판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설명은 못하면서도 꽃이 발산하는 아리따운 향기 덕분으로 위대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자서전 17,3).
 
영혼이 사도직 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에 마음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기도의 각 단계를 거치면서, 조금씩 자기 영혼의 기능이 집중되고 하느님과 일치됨을 느낀다. 이 3단계에서 영혼의 기능 가운데 오성의 기능까지 하느님께서 점령하고 계신다고 느끼게 된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일치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은 하느님께서 의지를 차지하고 오성마저 점령하시고 계신 것같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훌륭한 많은 것을 보고 관상에 젖어있어서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입니다(자서전 17,5).
 
영혼의 기능 가운데 의지와 오성의 기능을 하느님께서 차지하고 계셔서 영혼은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영혼은 자기의 기능이 하느님께 완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비탄하기도 한다. 영혼의 기능이 일치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사도직의 결실도 적어지는 것이다. 이제 영혼은 자기의 기능이 온전히 하느님께 봉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데레사는 이렇게 한탄한다. “오 나의 하느님, 도대체 그 언제쯤 내 영혼의 능력은 다 함께 당신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는 데 서로 일치하게 되겠습니까?”(자서전 17,5)
 
 
4) 네 번째 눈물
 
데레사는 마지막 단계의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영혼은 자기가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즐긴다. 그는 선 자체를 알지 못하고 즐기는데, 엄청난 영광과 위로가 따르며 기쁨도 따른다. 이 4단계에서 영혼은 무엇보다도 합일을 경험한다. 데레사는 이 합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혼은 달아서 불꽃과 변화된 거센 불, 그리고 어떤 때는 급격히 커지는 불덩이처럼, 자체에서 튀어나옵니다. 이 불꽃은 매우 높이 치솟아오릅니다(자서전 18,2).
 
이 4단계에서 영혼에게 주어지는 물은 정원사가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 내리며, 영혼은 이전의 단계보다 훨씬 더 많은 선익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에게 맺어진 열매가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의 네 번째 물에서 데레사는 인간 안에서 흘러나오고 인간을 엄습하기까지 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상징화한다. 영혼은 신비적 기도의 수동성에서 커다란 활동을 하게 된다.7)
 
그는 벌써 천상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표가 나타납니다. 그는 그것을 나누어 주고 싶다는 소망에 불타서, 자기만 그렇게 가멸게 하지 말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는 제 자신은 조금도 모르는 가운데, 또한 스스로는 그런 목적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웃에게 영신적 선을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걸 알아차립니다(자서전 19,3).
 
이와 같이 데레사는 기도의 4단계를 정원에 물을 대는 네 가지 방법과 비교하였는데 각 단계의 물은 눈물에 비교할 수 있다. 기도가 깊어짐에 따라서 회개의 정도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눈물이 더욱 순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불결한 경향들의 정화는 근본적으로 기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데레사는 말한다. 기도를 할 때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분의 살아있는 물을 주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신다.8) 진정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깨끗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데레사는 종종 주님께 그녀의 그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청하곤 하였다.9)
 
이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 영혼은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섬기며 봉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들의 미혹함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이 마지막 기도의 단계에 도달한 영혼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어둠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 특별히 묵상기도 생활에 전심하여 하느님께 자별한 은총을 받고 있는 분들에게 얼마나 동정심을 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얼마만큼이나 잘못에 젖어있는지 알리고자 그는 목청을 돋우어 부르짖고 싶어집니다”(자서전 20,25). 이 단계에 도달한 영혼은 진정한 의미에서 참된 겸손을 획득하게 되며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게 된다.
 
영혼이 참 겸손을 지니는 때가 바로 여깁니다. 누가 자기에게 대해 좋게 말을 하든 말든 그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정원의 과일을 나누시는 분은 정원의 주인이시지 그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손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가진 온갖 선을 하느님께 돌려드립니다. 만일 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자서전 20,29).
 
이 단계에 도달한 영혼은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한다. 또한 영혼 안에 오로지 하느님을 섬기려는 소망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힘도 주님께 받게 된다. 우리는 데레사의 다음 말로써 진정한 사도직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직은 주님께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행위인 것이다. 주님께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 무엇인가를 내어드리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이 4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일하도록 가려주신 강한 영혼이 된다. 그러나 그런 사도직 활동의 원천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하느님의 힘으로 모든 이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 영혼은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사귈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경박하고 악습에 젖어있을지라도 이 영혼은 그 때문에 조금도 뒤숭숭해지지 않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거기서 자극과 큰 선익을 얻는 수단을 얻습니다. 이제야말로 그는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일하도록 가려주신 강한 영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힘은 그 영혼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자서전 21,21).
 
우리는 기도의 첫 번째 경험(우물에서 물을 길어내는 것)에서 마지막 경험에 이르기까지, 무엇보다도 인간 영혼의 활동성에서 수동성으로의 이행의 구조 아래에서 기도의 발전을 보았다. 기도는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건네주게끔 성령의 활동에 더욱 절대적인 순응을 하게 된다.10) 이제 인간 영혼은 더욱 수동적이 되지만 사도직 활동의 결실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성녀의 주요 작품인 자서전 안에서 기도와 활동의 상호 관계성을 살펴보았다.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에서 말하는 요지는 기도의 성장 없이는 덕이 자라나지 않고 따라서 사도적인 활동이 효율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활동가이며, 진정한 활동가는 기도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혼은 기도의 성장으로 더욱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데, 하느님과 일치되면 일치될수록 더욱 활력 있고 덕스러운 사람이 되게 한다. 그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고 싶어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열망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실제로 사도직의 결실을 맺게 한다. 성인(聖人)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참된 활동, 하느님 앞에서 공로가 되는 활동을 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녀는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완덕의 절정을 목표로 하고 과감하게 내걷기 시작한 자는 결코 혼자서 천국에 가는 법이 없다고 나는 믿습니다. 언제나 항상 많은 사람들이 자기 뒤를 따르게 합니다(자서전 11,4).
 
 
1) Graziano G. Pesenti, La vita e le Fondazioni, In Teresa di Ges� Teresianum, 1981년, 148면.
2) Giovanni Tani, Castello Interiore di Santa Teresa d’Avila, Milano, Edizioni paoline, 1991년, 64면.
3) Francois Regis Wilhelem, Dio nell’azione, la mistica apostolica secondo Teresa d’Avila, Citta del Vaticano, 1996년, 56면.
4) Giovanni Tani, Castello Interiore di Santa Teresa d’Avila, Milano, Ed., paoline, 1991년, 69면.
5) 자서전 15,7 참조.
6) Giovanni Tani, 앞의 책, 72면과 자서전 16,3 참조.
7) 위의 책, 75면.
8) 위의 책, 64면.
9) 같은 곳. 타락시키고 죽음으로 이끄는 악의 유혹은 아주 더러운 물처럼 정체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고 데레사는 설명한다. 그것이 진전하고 그것의 연루시키는 힘은 영혼들을 타락하게 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10) 위의 책, 75면.
 
[사목, 2004년 10월호]

 

 

[새로 보는 교회사 34] 가톨릭 교회의 개혁 (2)
 
구본식
 
 
관상 수도생활의 변화와 완덕으로 나아가려는 신비사상의 발전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공이 아주 크다. 이들은 기존의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관상수도회의 수도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하였다.
 
 
가르멜회의 역사
 
가르멜회는 창설자가 없다. 수도회의 명칭은 엘리야 예언자가 살던 동굴이 있는 가르멜 산에서 유래하는데,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 산에 3~4세기경부터 사막의 은둔자들처럼 혼자서 동굴이나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가들끼리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12세기경부터 순례자들과 십자군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곳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경당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고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범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간단한 회칙을 만들어주었고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원장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관상기도 생활로 침묵과 가난한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 정착되는 수도원들은 탁발수도회로 분류된다.
 
1226년 호노리오 교황이 처음으로 규칙을 인준해 주었고 뒤에 여러 교황들이 가르멜회의 완화된 규칙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전처럼 한적한 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은수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탁발수도회처럼 사목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은 옥스포트, 파리, 볼로냐 등지에 학문을 연구하는 집을 지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첫째 관상생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설교와 사목도 하였다. 영성에서는 성모님과 엘리야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이름도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수도회’로 하고 성모님을 주보로 모셨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르멜회도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완화된 규칙을 선호하는 공동체와 좀더 엄격하게 살려는 공동체로 분리된다. 이때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가르멜회를 신비적인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회로 개혁한다.
 
 
신비신학의 발전
 
라틴계 나라 곧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더욱이 스페인은 루터가 나타나기 전부터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잘 조직되고 능동적인 살라만카 대학을 중심으로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루터파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유명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의 이단 색출도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성행하였다. 감성적이고 체험적이며 직접적인 종교심은 흔히 이단으로 흐르기 쉽다. 종교의 피상적인 관점만 취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치고 마귀적인 요소가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이단적인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비밀단체(Alumbrados)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의 종교적인 성향에서 유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위험에 대항하고 기도생활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통 신비주의가 발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과 관상생활의 발전을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가 높은 경지로 이끌어올린다. 신비신학적인 저술은 주로 기도로 나타나고 종교재판소는 이런 기도가 미신적인지 이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데레사 성녀의 “완덕의 길”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신비신학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저술이 있었다. 마드리드의 알퐁소(1485-1570년)나 오수나의 프란치스코(1492-1540년), 라레도의 베르나르디노(1482-1540년) 등이 침묵 속의 기도 등과 같은 신비적인 체험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1535년에 저술한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시온산에 올라서”라는 책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기도의 방향을 알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하느님과 영혼 일치의 방법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일치를 내 안에서 느끼고 있었고 여러 번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STORIA DELLA CHIESA, Vol. VIII. Ed., S.A.I.E.P. 266)라고 한다.
 
신비체험을 깊이 있게 하고 그것을 표현한 데레사 성녀 이전에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수도자와 사제들도 있었지만 살체도의 프란치스코같이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
 
 
신비주의 수도영성
 
스페인에서 데레사 성녀 이전에 더욱 심오한 영성으로 수도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수도회를 개혁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알칸타라의 베드로는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 아니라, 1560년경부터 데레사 성녀와 친분을 가지면서 가르멜회를 개혁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람으로 스페인 왕과 교황 바오로 4세의 후원을 입어 프란치스코회를 옷에서부터, 공동체가 가난을 실천하는 데까지 더욱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필리핀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개혁의 바탕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대해서도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살아가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기도와 묵상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그는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완전하게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이 영성의 깊이를 가지도록 설교하였다.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기도생활과 복음에 근거한 윤리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내적 생활의 강조는 데레사 성녀가 수없이 반복한 “수도복이 수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l’abito non fa il monaco)”라는 정신이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는 그라나다의 루이지가 1554년에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도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하는 방법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주제 준비’ ‘주제를 위한 독서’ ‘주제에 대한 묵상’ ‘감사의 기도’ ‘봉헌’ ‘청원’ 등이다. 여기서 그는 정신적인 기도는 다른 의무를 다 관면할 만한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소의 지적을 받고는 1559년에 수정하여 새로이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관상기도 방법은 주제를 준비하고 주제를 위한 독서를 천천히 하면서 독서를 통해 묵상에 빠져들고 계속 주제에 머무르는 묵상기도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기억이 한꺼번에 작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수의 성녀 대 데레사
 
성녀는 1515년 3월 28일에 출생하여 1582년 10월 4일에 사망하였다. 데레사 성녀가 살아 있는 동안 온 스페인 사람들은 그녀를 알았다. 또 가르멜회의 개혁에 대해서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데레사 성녀는 가장 스페인적이면서도 전세계적인 특성을 가진 성인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찾아 들어감으로써 가톨릭 교회 일치에 큰 기여를 한 분이다.
 
성녀는 20세 되던 때에 강생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아빌라의 가르멜회는 부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수도자가 1432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인가한 완화된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공동체의 분위기가 느슨하였다. 봉쇄구역에도 외부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하는 등 가르멜회의 엄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레사 성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서적을 즐겨 읽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훌륭한 신비주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완덕을 향한 갈망이 생성되어 있던 성녀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도 데레사 성녀에게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다. 성녀는 영성 서적을 탐독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 줄 알았고, 상상이나 감정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신비주의를 자신 안에 종합할 줄 알았다. 긍정적이고 확실한 사고를 가진 여성으로서 교리의 진리와 가톨릭 신심을 융합할 줄 알았다.
 
성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537년과 1538년 사이의 겨울에 심한 열병에 걸려서 수도원이 아닌 시골에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3년 동안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는 그 체험을 살려서 영적 수련을 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며 대화를 즐겼다. 이렇게 1542년부터 1543년 사이에 느슨한 생활을 하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체험하였고 겸손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1560년 관상기도를 깊이 체험할 즈음, 옆에 늘 있던 조카가 더욱 엄격하게 은둔의 삶과 관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자는 제안을 하여 수도회 장상들에게 이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란치스코회를 개혁한 알칸타라의 베드로와 예수회원인 보르지아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지의 후원으로 1562년 8월 24일에 개혁된 가르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첫 수도원을 요셉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47세였고, 이후 열여섯 개의 수도원을 더 창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여자 가르멜회를 이전과 구분하여 ‘맨발의 가르멜회’라고 하였고 데레사 성녀와 뜻을 같이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맨발의 남자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지도하였다.
 
성녀는 사망한 지 40년 뒤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622년에 시성되었고 1970년 바오로 6세는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걸어야 할 ‘완덕의 길’을 제시하였다. 루터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두려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방법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데레사 성녀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은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이 노력해야 하는 방향이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완덕에 이르는 기도의 상태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 단계를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으로 비유하고 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든 일은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고, 좀더 쉬운 일은 양수기를 통해 배수관으로 물을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강이나 시냇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 땅을 흠뻑 적실 수 있고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으며 정원사가 할 일이 별로 없는 마지막 방법은 바로 충분히 내린 비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께서 우리를 적셔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수고도 느끼지 않습니다”(상게, pp. 282-283).
 
 
구본식 안드레아/ 대구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 신부
 
[경향잡지, 1996년 10월호]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7)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1)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스페인 성지 순례를 갈 때 반드시 알아두고 가야할 성녀가 있다. 바로 아빌라의 테레사(Sta. Teresia Iesu de Avila, 축일 10.15)다. 이분은 동명의 소화 테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테레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맨발의 가르멜회’ 창시자이자, ‘예수의 테레사’로 불려지는 성녀는 사실 ‘대 테레사’라는 이름에 못지않게 교회의 대 성녀이며, 큰 공적을 남긴 분이다.
 
테레사는 1515년 3월 28일, 스페인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신심이 두터운 귀족이었는데, 자녀들을 모두 가톨릭 정신에 입각해 교육시켰다. 테레사는 그 영향으로 일곱 살 때부터 네 살 위인 오빠 로드리고와 함께 성인전을 즐겨 읽었다. 이때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감동하여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몰래 집을 나간 일도 있었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읜 테레사는 성모상 앞에 꿇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성모님이 자신의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후 19세에는 성 히에로니무스가가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치움에게 보낸 서간을 읽고 마침내 수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아빌라에 있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했다.
 
그녀는 처음에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 모든 정성을 다해 소임에 임했다. 이 일을 통해 테레사는 말할 수 없는 감미로운 위로를 맛보았으며, 나중에는 자신도 돌보는 환자의 병에 걸렸으면 하고 원하게 될 정도였다.
 
기도가 허락이 되었음인지 테레사는 병석에 눕게 됐고, 이후 몸이 늘 허약했다. 그녀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었다. 완덕을 열망했던 그녀는 세속화된 수녀원을 바라보며 영적으로도 큰 고통을 받았다.
 
그러던 중 테레사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상본을 보고, 자신의 냉담한 신앙을 깊이 부끄럽게 여겼다. 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는 스스로의 영혼이 처한 한심스러운 처지를 깊이 느끼게 된다. 테레사는 이 시점에서 영적으로 크게 변화되게 된다. 고해사제의 명령에 의해 기록된 자서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때까지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후부터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
 
‘나 자신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테레사 신비 생활의 첫 출발점이다. 그녀의 학식은 깊은 것도 아니었지만 ‘영혼의 성’을 비롯한 그녀의 저서들은 지금까지 신비 신학의 기초로서 가톨릭 영성의 위대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심오한 신비계의 진리를 계시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녀가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테레사 안에 계신 주님이 스스로 적으신 책이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안으로는 영(마음)을 신비계로 몰입함과 동시에 밖으로는 가르멜회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 이유로 테레사는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뜻은 막는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다. 마침내 테레사의 개혁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각처에 있는 여자 수도원은 물론 남자 수도원에까지 큰 자극을 주게 된다.
 
이는 테레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느님께선 테레사를 기꺼이 여기사 가끔 신비스러운 일이 그녀에게 일어나도록 허락해주셨다. 그런데 이러한 테레사의 신비 생활은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는 길이 아니고 가시덤불이 가로놓인 험악한 길이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녀에게 여실히 적용됐다. 고행, 겸손, 희생 등은 그녀가 평소에 지닌 십자가였다. 테레사는 그런 십자가를 열애했다. 이는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습니다”라고 한 그녀의 말이나, “테레사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녀를 학대하거나 또는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고 한 아빌라의 주교의 말에 비추어 알 수 있다.
 
테레사는 극기 수덕의 길을 걷는 도중 1582년 9월 2일, 67세에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눕고, 뒤이어 10월 4일 사랑하는 하늘의 배필을 만나 뵈러 영원한 길을 떠났다. 임종이 임박하자 그녀는 주님과 영원한 일치를 할 기회가 왔음을 즐겨 기뻐하며, 얼굴에 희색을 감출 수 없어 몇 번이나 “주님!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입니다”를 거듭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한다. 1622년에 시성됐으며 1970년 교회박사로 선포되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8)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2) 수많은 고통 이겨내는 방법은 오직 하느님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을 때, 테레사는 6살이었다. 테레사는 이후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라나게 된다. 그런데 그녀도 훗날 교회 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그녀의 선택은 루터가 선택한 ‘교회 밖에서의 개혁’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개혁’이었다. 테레사의 이러한 일이 어떻게 하느님의 형성 신비 안에서 이뤄졌는지 그 섭리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적으로 형성이 잘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미리 형성되도록 심어놓으신 그 어떤 신비를 잘 좇아야 한다. 그럴 때 최종적으로 형성하는 신적 신비 안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후에 이웃을 형성시키고, 사회를, 세계를, 우주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형성시킬 수 있다.
 
성녀의 내면 형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 속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성인전을 즐겨 읽는 등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기름진 내면을 가꾸어 나갔다. 실제로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이겠다고 울며 기도할 정도로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영감을 많이 받았고, 그 영감을 자신의 내면에서 소화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아빌라의 테레사의 선형성을 완성시켜 나간 방법은 육체적 고통이었다. 그녀는 몸이 나약해 평생 동안 병마와 싸워야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병을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건강하고 부유한 것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병의 고통이 전적으로 악이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큰 기둥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지닌 나약성, 즉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고, 두 번째는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 잠재력이다. 테레사 성녀는 이 두 가지의 성향을 정확히 이해하신 분이다.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신 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완벽해 지려고 하고, 늘 완벽한 삶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나약성과 한계를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만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고, 진정한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로부터 힘을 받아서 생활을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삶이라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자신의 힘으로만 생활을 하면 언젠가 모든 것이 허무해 지고,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제 테레사가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해야지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때 하느님께서 형성하는 신적신비께서 테레사에게 ‘책’을 연결해 주신다. 그렇게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등을 읽고, 수녀원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완덕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테레사에게도 첫 번째 시험이 다가온다. 장상 수녀님께서 중병에 걸린 병자들을 간호하는 소임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임을 받은 것 자체가 하느님의 큰 은총이었다. 더욱 깊이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히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 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나는 어떤 모습이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지금 나는 돈 좀 벌었다고, 높은 지위에 올랐다고 해서 우쭐한 모습인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겸손한 모습인가.
 
아빌라의 테레사는 병자들을 간호하면서 인간 존재에 대해, 또 이 사회에 대해 좀 더 깊이 깨닫게 된다. 당시의 의학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별다른 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는 의학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주위에는 의술로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삶을 원하는 만큼 꽃피우지 못한채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테레사는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환자들의 고통을 통해 테레사는 그 넘어설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제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치유될 수 없는 수많은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면서 진정으로 매달릴 곳은 오직 우주를 형성하고, 세상을 형성하고, 이웃을 형성하고, 나 자신을 형성하는 하느님 한 분 뿐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5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59)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3) 하느님과의 일치 체험 위해 ‘고통’ 청해
 
 
테레사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면서 단순히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 이제 자신도 환자들과 같은 병에 걸리고 싶다는 기도를 바치게 된다. 대단히 높은 경지의 갈망이다.
 
테레사는 “하느님 제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습니다”라고 갈구했다. 그래서 “저도 이 병에 걸려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테레사가 보기에 환자들의 눈빛과 마음은 하느님께 대한 간절한 일치의 갈망을 담고 있었다. 또 하느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환자들과 같은 뜨겁게 달궈진 마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병에 걸려서 하느님 당신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그 환자들처럼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지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갈망은 은총을 불러온다. 은총의 결과가 갈망이기도 하지만, 그 갈망의 은총을 받아들이면 갈망은 더 큰 합치의 은총으로 이어진다.
 
이제 테레사에게는 그 은총의 첫 단초가 주어진다. 테레사의 영적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회심의 기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면 소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다.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성당에서 이뤄진다. 테레사는 기도 중이었다. 그때 테레사는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상본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이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등 지금까지 해온 몇 가지 사랑 행위들은 그 매질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레사 자신이 이웃에게 베푼 사랑은 인류의 죄를 위해 인간에게 매질 당하는 그 사랑에 비하면 티끌보다도 작은 것이었다.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테레사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기 위해 더 깊은 기도생활로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는 책을 통해 왔다. 테레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을 읽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의 참회를 보면서 진정한 감동을 받았으며, 이를 자신의 참회를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체험은 테레사의 내면을 더욱더 깊은 형성의 신비의 내면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두 가지 포인트는 바로 테레사 말년에 저술로 드러나는, 신비신학의 태동 기점이 된다.
 
아마도 이때가 한 30세 정도 되지 않았겠는가 추정된다. 그 열매는 약 17년 후에 나타난다. 47세 때 드디어 개혁 가르멜회인 ‘맨발의 가르멜회’(The Discalced [Barefooted] Carmelites)를 창설한다.
 
여기서 개혁 가르멜회라고 표현한 것은 기존에 가르멜회가 있었고, 그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넘어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테레사의 맨발 가르멜회를 알기 위해선 우선 기존 가르멜회에 대해 알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가르멜회(Order of Our Lady of Mountain Carmel)는 계율이 엄격한 관상(觀想)수도회로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1열왕 17-19장)까지 소급된다.
 
가르멜 수도회의 순수 관상의 정신은 하느님과 직접적이고 내적인 삶의 체험을 무엇보다 선행시키며 중요하게 본다. 그 기원은 이렇다. 가르멜산은 하느님이 인간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으로 예언자 엘리야가 이 산에서 늘 기도를 올렸다. 가르멜 수도회는 특별한 창설자가 없는데, 엘리야의 모범을 따라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구약을 거쳐 신약에 이르면서 성서를 토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수도회 삶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다 1205년부터 1210년까지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성 알베르토(St. Albertus)에 의해 성 브로카르도(St. Brocardus) 수사에게 공동체 삶을 위한 첫 규칙서가 주어졌다. 이 규칙서는 1247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인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이후 가르멜 수도회도 한때 규율이 해이되고 쇠퇴해 갔는데, 많은 이들이 초기 정신을 잊고 살기 시작했다. 이때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해 가르멜의 중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개혁된 수도회를 ‘맨발 가르멜회’라고 한다.
 
테레사는 17개의 수도원을 창설을 하고 저술을 남기는 등 왕성한 활동에 본격 나서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 있는 가르멜회가 바로 이 테레사 성녀에 의한 ‘맨발 가르멜회’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0)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4) 육체적 나약함·고통으로 ‘합치의 신비’ 체험
 

47세에 수도원 개혁이라는 대장정을 시작한 테레사는 이후 67세까지 살면서 20여년 동안 17개의 남녀수도원을 창설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테레사의 저술 작업도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된다.
 
첫 발걸음은 소박했다. 지도 신부님은 고결한 영혼을 지닌 테레사에게 책 집필을 요청했고, 테레사는 이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체험을 담담히 기록해 나갔다. 그렇게 나온 것이 불후의 명저인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 등이다.
 
이 과정에서도 테레사는 끊임없이 자신의 병과 싸워야 했다. 병은 평생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은총으로 받아들였다. 테레사는 그렇게 병의 고통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불평한다. 나약함과 못남에 대해 불평한다. 나는 왜 키가 작을까. 나는 왜 코가 낮을까. 나는 왜 머리가 나쁠까….
 
자신의 약점이 사실은 장점으로 주어진 은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실수를 하시는 분이 아니다. 나를 지금 있는 모습으로 창조해주신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있다. 이 깊은 섭리의 신비를 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테레사는 육체적인 나약함과 이로 인한 질병의 고통을 하느님과의 깊은 합치를 이루는데 좋은 도구로써 사용했다. 이러한 조건들은 나 자신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내면 형성의 길이다.
 
이제 테레사의 이러한 내면형성은 상호형성으로 이어진다. 내면이 형성되면 이 형성의 신비는 곧 이웃으로 확장되고 파급된다. 테레사는 환자를 돌보는 행위 자체도 사회적 차원에서 하느님과 합치를 이루는데 도구로써 활용했다. 테레사는 자신의 나약함과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초자연적 생활을 한 것이다. 더 나아가 테레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수도원이라는 상황을 잘 적응해 나가며, 상황 형성을 했고, 이 상황 형성을 바탕으로 무한히 세계적인 차원으로 이해를 넓힘으로써 세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계 형성이 바로 오늘날 모든 이들을 영성적 삶으로 이끌어 주는 저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테레사는 이렇게 보석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형성하는 신적신비의 뜻을 온전히 실현시킨 분이다.
 
하느님은 이처럼 육체적으로 나약한 한 인간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그릇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문제는 그 하느님의 의지와 섭리에 우리가 얼마나 호응하느냐에 있다. 호응한다면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불만족하며 건조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교회와 사회가 하느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한 삶을 거듭하던 종교 분열 시기에 태어난 테레사는 탁한 구름과 공해를 깨끗이 벗기고 인간이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하느님 당신께서는 어떤 분이신지를 종합적으로 깨닫고 공명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다. 이런 분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따르고 배울 삶의 모델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테레사 이후 교회의 모습,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해야할 몫도 크다. 우리는 테레사 성녀를 본받아 하느님 안에 합치하고 그 합치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더욱더 초월적으로 변형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러한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 겸손하게 청해야 한다. 우리가 당신의 모상으로서 닮은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진정으로 신비신학의 절정에 이르셨던 분이다. 테레사는 그 체험한 것을 과학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저술로 남겼다. 만약 테레사 성녀가 신비 체험을 설명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신비의 언저리 조차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과연 테레사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체험했느냐 하는 문제다. 테레사 성녀의 영혼의 성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성녀가 말한 기도의 단계는 과연 무엇일까.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19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1)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5) ‘영혼의 성’에 들기위해 겸손 · 순종의 덕 필요
 

하느님 신비를 어설프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단순화 시키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지극히 신비스런 내용을 담고 있는 테레사 성녀의 저술들을 쉽게 설명하다 보면 자칫 잘못된 내용을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가진 한계를 감수하고서라도 성녀의 신비 체험을 가능한한 쉽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영혼의 성’을 보자. 우리는 영혼의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성 밖에서 살며 혼란과 번뇌 속에서 산다. 세상과 나를 해석하지도, 하느님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이 먹다 보면 어느때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 우리는 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쉬고 싶은 것이다.
 
이 영혼의 성에는 7개의 방이 있다. 소위 말하는 1궁방에서 7궁방까지의 방이 그것이다. 1궁방, 즉 첫 번째 방에는 독충과 벌레들이 득실거린다. 기도를 하려는데 파리가 나타나면 기도가 되겠는가. 성체조배를 하려는데 모기가 팔 위에 앉았다면 조배가 되겠는가. 이렇게 우리는 기도를 하고 하느님을 찾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독충과 벌레가 가득찬 마음으로는 올바른 기도에 정진할 수 없다. 여기서 독충과 벌레는 과거의 삶에서 습관화 되었던 많은 것들을 의미한다. 육신과 정신적인 무의식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어서 기도를 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 영적 지도가 필요하다. 모기와 파리를 쫓는 방법을 알려줄 스승이 필요하다. 수영을 배우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훌륭한 수영 강사로부터 수영 기법을 배우면 자신감 있게 물 속에 뛰어들 수 있다.
 
테레사의 기도 9단계에서 이 상태가 바로 구성기도 1단계다. 이 단계에서 지도 방법은 극히 간단하다.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이 단계에선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칠 수 없다. 그냥 동화책을 많이 읽어 주고, 감성과 지성을 훈련하면 된다. 성당에 처음 온 예비신자에게는 신학적인 논쟁이 필요 없다. 처음에는 그냥 주요 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묵주기도 방법을 알려주고, 성경을 읽게 할 따름이다. 성경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영성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주어도 알지 못한다.
 
자 이제 2궁방으로 넘어가 보자. 이 방에는 큰 독충이나 큰 벌레는 없다. 하지만 작은 독충과 작은 벌레들이 아직 남아 있다. 기도 덕분에 큰 벌레는 없어졌지만 아직 작은 벌레들은 남아 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갈등의 시기다. 기도를 하다보면 무릎이 아플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 같지도 않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괜히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머리 아프게 살지 말고 옛날로 돌아가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살고 싶을 수도 있다. 듣기는 듣되 말할 수 없고, 알기는 하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다.
 
3궁방으로 들어가면 작은 벌레도 이제 어느 정도 제거 되어 있다. 마음의 평정이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다. 대죄는 모두 사라지고 아주 작은 소죄만이 남겨지게 된다. 그런데 과거에는 대죄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소죄 조차도 이제는 크게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소죄마저도 없애려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희생을 바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이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권태기도 이때 찾아온다. 어느 정도 육신적 정신적으로 활동적인 노력은 했지만, 비례적으로 영적인 성장 노력은 부족해 영적 진보가 이뤄지지 않다보니 지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득도 별로 없어 보이고, 영적 성장을 위한 노력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3궁방까지 설명한 이 글을 읽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실제로 수행을 하다 보면 3궁방까지 들어가는데 1년이 걸릴 수도 있고, 3년이 걸릴 수도,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많은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더 이상의 영적 성장을 포기하게 된다. 열심한 마음으로 본당 사목회와 교회내 각종 단체들에서 봉사하다가, 지치게 되면 더 이상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주저앉게 된다. 여기에서 제일 필요로 하는 덕이 겸손의 덕과 순종의 덕이다. 그렇지 않으면 더 높은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영혼이 메마르게 되면서 4궁방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는데….
 
4궁방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4궁방은 어떤 모습일까. [가톨릭신문, 2010년 12월 26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2)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6) “하느님과의 맞선 자리에 초대합니다”
 
 
본당 사목회를 비롯해 각종 교회내 단체에서 봉사하는 신앙인들은 참으로 열성적으로 일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그냥 머무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어진 교회 직책은 그런대로 수행할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장님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3궁방을 넘어, 4궁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4궁방에선 초자연적 기도가 가능해진다. 3궁방까지 지성과 이성과 기억, 인간적 의지를 가지고 기도를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초자연적인 기도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초자연적 기도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시는 은총의 신비를 바탕으로 하는 기도다. 지금까지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왔지만, 이젠 그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능동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수동적 차원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3궁방까지는 나 자신이 노력을 해서 물을 길어먹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직접 물통을 들고 수고스럽게 수 킬로미터 떨어진 우물까지 가서 물을 길어서 먹었다. 하지만 4궁방에서는 집까지 연결된 수돗물에 입만 대면 된다. 조금 다른 비유로 들자면,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젖과 비슷한 분유를 먹었다면, 이제는 직접 어머니의 가슴에 입을 대고 젖을 빨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돗물이나 어머니의 젖이 그리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단계다. 그래서 일부는 직접 물을 길어도 마시고, 분유도 함께 먹어야 한다.
 
진정한 하느님과의 합치는 5궁방에서 구현된다. 이 단계에 대해 테레사 성녀는 기막힌 비유를 들었다. 하느님과 맞선을 보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동안 전화 통화만 하고, 글만 주고 받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는 단계다. 그분을 직접 보게 되니 더욱 매력이 넘치는 분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사랑의 감정은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한층 더 불타오르게 된다. 불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 단계는 ‘일시적’ 해탈의 단계로 볼 수 있다.
 
맞선은 직접 만나는 것이다. 정식미팅(meeting, blind date)이다. 일반적으로 미팅을 할 때 우리는 처음에 정신적인 차원에서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묻고,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묻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파악한다. 이렇게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대화가 끝나고 마음이 끌리면 그 다음에는 정감어린 대화를 시작한다. 그렇게 정감으로 끌리고 나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앞에 있는 미팅 대상자를 진정으로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A도 만나고 B, C, D 등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A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B와 C, D를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주로 A와 많이 만나게 된다. 온전히 A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지금까지 1~4궁방까지는 소위 펜팔과 전화 통화의 단계였다. 그 과정을 통해 상대방이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많은 좋은 것을 줬는데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따질때가 많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얼굴을 맞대고 정식으로 맞선을 보니, 그동안 상대방이 이야기 했던 것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을 모두 열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맞선을 볼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부모님과 함께 나간다. 앞에 있는 상대가 마음에 든다고 해도, 분별이 필요하다. 그 분별을 해 주는 분이 부모님이다. 여기서 부모님은 바로 영적 지도자다. 5궁방에서는 초자연적 기도 단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주시는 여러 은총에 대해 잘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함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잘못된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거짓된 환상을 보고 진정한 체험으로 착각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환시와 환청을 하느님의 계시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맞선에 나선 여성은 나이가 어리기에 자칫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 부모님이 옆에 있어서 네가 선택한 A가 정말 바른 사람이다 라고 분별을 해 주어야만 딸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기 결혼하는 사람(악마)은 나이어린 젊은 여성(영적 초심자)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부모님까지 속이긴 힘들다. 부모님은 얼굴만 보고서도 “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다. 물론 부모님의 판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 지도를 받을 때 올바른 결혼을 할 확률은 높아진다.
 
자! 이제 맞선이 훌륭히 끝나면 무엇을 하는가. 약혼을 한다. 약혼 뒤에는 결혼을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3)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7) “영혼의 성에서 제2의 그리스도 삶을 살다”
 
 
5궁방에서 하느님과의 맞선 후,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면 의외의 현상이 찾아온다. 고통이 찾아온다. 당신 얼굴을 뵈옵는 그 환희의 신비 뒤에 고통의 신비가 따라온다. 그 고통의 신비를 뛰어 넘어야,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이라는 영광의 신비, 빛의 신비가 가능해 진다.
 
1∼4궁방까지도 물론 고통이 있었다. 희생과 봉사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5궁방에서의 고통은 그 차원이 다르다. 여기서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고통이다. 그 고통을 고스란히 내가 느낀다.
 
이 단계에서 만나는 또 다른 변화는 정신적 차원이 약해지고 영적인 차원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진복팔단의 신비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이제 과거의 독충과 벌레들이 빠져나가고 당신께서 주시는 것,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다 보니 머리로 이해할 수 없었던,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진리를 ‘오오!’하고 무릎을 탁 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그 밑바닥까지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 3궁방까지는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있었던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5궁방에 들어오면 조금 안심을 할 수 있다. 한때 신앙에 심취했다는 사람도 3궁방 수준에 머물면 언제든지 다시 냉담할 수 있다. 5궁방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평신도 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는 든든한 영혼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전인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 다음, 6궁방으로 들어서게 되면 우리는 점차 약해지고 하느님이 강해진다. 주도권은 이제 하느님께 넘어간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것이 별로 없다.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 얼마나 좋고 신비스로운지 나는 다만 가만히 응시하고 만끽할 뿐이다. 세계를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이 6궁방의 신비를 체험하면 참으로 강해진다. 당신이 이끄시는 힘이 얼마나 센지,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합쳐도 당신의 힘에는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의 모함과 공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게 된다. 하늘에서부터 오는 진정한 행복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모든 당신 가르침에 순응하고 순명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가르침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모함 때문에 목숨을 잃게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전혀 흔들림이 없게 된다. 순교자들이 목숨까지도 쉽게 내 놓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체험 때문이다. 이 6궁방에서 느끼는 행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반적인 행복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제 하느님이 눈 앞에 늘 아른거린다. 결혼 초창기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옆에 없어도 늘 보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군대에 가면, 여인의 마음은 애인과 군대에서 함께 훈련을 받는다. 사랑하는 남편이 직장에 가면 아내의 마음은 늘 남편과 함께 있다. 이렇게 이제는 하느님이 그냥 보이고, 그분이 계속 옆에서 말씀해 주신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가지 놀라운 체험을 한다. 이곳에서 설명하기가 조금 조심스럽긴 하지만, 바로 죽음에 대한 원의다. 죽음을 원하게 된다. 하느님을 빨리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지복직관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 7궁방에 들어가면 이런 체험도 없어진다. 죽고 싶지 않고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하느님과 완전히 합치된 상태다. 단지 영(마음)으로만 하느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과 지성으로 완벽하게 하느님을 느낀다. 눈과 귀가 영적인 눈, 영혼의 귀가 된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적인 몸으로 음식을 섭취한다.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온전히 잠기게 된다. 나는 완전히 초월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 묶여있던 내가 하느님 능력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상태로 변화된다. 이 같은 영혼의 성 각 궁방을 테레사 성녀가 말한 기도 7단계로 나눠 보면, 구성 기도(1궁방)와 추리적 묵상(2궁방), 정감의 기도(3궁방), 단순함의 기도(4궁방), 일치의 기도(5궁방), 순응일치의 기도(6궁방), 완전히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변형 일치의 기도(7궁방)가 된다.
 
7궁방 변형 일치의 기도는 완전히 없어지는 무(無)이지만 동시에 초월(超越)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하느님을 닮은 제 2의 그리스도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9일]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아빌라의 성 데레사 · 십자가의 성 요한
 
맨발 가르멜회 개혁 · 창설자
 
 
가르멜 수도회의 첫 시작은 가르멜 산에서 까마귀들이 날라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살았던 엘리야 예언자(열왕기 상 17-19장 참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중세기에 와서 새롭게 거듭난 ‘맨발 가르멜회’ 남녀 회원들은 수도회 개혁의 주도자였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을 창설자로 모시고 있다.
 
심오한 기도 체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교회에서 ‘영성의 어머니’, ‘신비신학의 박사’로 불리우는 성녀 데레사는 1515년 스페인에서 출생했다. 매력과 재치가 넘치는 소녀로 성장한 데레사는 13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기도 했다.
 
다른 평범한 여성들처럼 아름다워지기를 바랬던 데레사는 자라면서 외적인 몸치장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이런 그녀를 세속적인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여보냈고, 데레사는 20세 때 완화된 가르멜 규칙을 따르는 강생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강생 가르멜 수녀원은 매우 세속화돼 있었다. 수녀들은 개인 재산을 소유했으며 가문 좋은 수녀는 특혜를 누렸다. 수녀원에서는 침묵이 지켜지지 않았고 외출이나 외부인의 방문도 자유로웠다.
 
데레사는 그곳에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고 오랫동안 기도 생활에도 어려움을 겪는 등 많은 시련을 당했다. 그러나 1554년 상처투성이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완전한 회심에 이른 데레사는 엄격한 초창기 정신을 찾아야겠다고 결심, 1562년 개혁된 첫 수녀원인 성 요셉 수녀원을 창설하고 1582년 선종할 때까지 모두 17곳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맨발 가르멜회를 개혁 이전의 완화 가르멜회로부터 분리, 독립시켰다.
 
데레사는 자신의 영적인 신비 체험을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천주 자비의 글’ 등에 기록했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인간의 영혼을 ‘7 궁방(宮房)’으로 나눠 가장 내밀한 7궁방에 하느님이 내재하며 그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또한 교회를 더없이 사랑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수녀들로부터 중상모략과 추방까지 당하면서도 교회를 위해 끝내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데레사의 성덕과 탁월한 지식을 인정, 1970년 그녀를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남자 수도원 개혁을 꿈꾸던 1567년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요 고해 신부가 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만났다. 그녀는 52세였고 요한은 25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인 기도 체험을 서로 이해하고 영혼의 친교를 나눌 수 있었기에 영적으로 깊이 일치했다. ‘거룩한 가난’이 성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를 일치시킨 것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혼띠베로스에서 출생,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청년시절 예수회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 살라망까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567년 그는 고향에서 첫 미사를 드렸는데 이때 개혁 가르멜의 두 번째 수녀원을 세우려고 준비 중이던 데레사를 만나게 된다. 데레사의 수도회 개혁 의지에 동감한 요한은 두루엘로에 있는 작은 농가를 개조, 개혁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가르멜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가 됐다. 물론 요한도 49세로 선종할 때까지 감옥에 감금당하는 등 완화 가르멜회의 반대자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박해를 받았다.
 
저서 ‘갈멜의 산길’, ‘어둔 밤’ 등에 나타난 대로 요한의 영성 또한 그 깊이를 잴 수 없이 심오하다.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요한은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과 영을 정화함으로써 자신을 비워내고, 그곳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전(全, toda)과 무(無, nada)’의 영성을 제시했다.
 
산의 정상에 쉽게 도달하려면 지고 있는 배낭을 가볍게 비워야 하고 하느님을 얻기 위해 자신은 빈 그릇이 돼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를 “자기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이는 마치 날개털 하나도 빠지지 않은 새처럼 가볍게 영을 따라 날아간다”고 표현했다.
 
데레사와 요한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에 물들지 않았다. 자신을 비운 그들의 영혼은 새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세속화된 수도회에 초창기 정신을 불러일으키려는 책임감은 누구보다도 무거웠고, 수도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을 조화시키려는 쇄신에의 열정은 그들을 온전히 불태웠다.
 
[평화신문, 1996년 6월 30일, 남기은 기자]

 

 

스페인의 유구한 가톨릭 역사를 좇다 (2) 맨발의 성녀 테레사의 땅 아빌라(Avila)
 
‘성녀의 땅’ 아빌라에 고요한 평화 깃들다
 
 
1515년.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일이다. 스페인의 한 시골마을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신심 두터운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12살 때 어머니를 여읜 후 성모상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성모님 당신이 나의 어머니가 돼 달라”고 기도했다. 어린 시절 성인전을 통해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을 보고 감동해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며 집을 나선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였던 그는 19세가 되던 해, 마침내 평생 동안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이 마을에 있는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했다. 이후 그는 세속화된 수도원을 개혁하는데 앞장섰고, 영적인 풍요로움을 다지는 데도 매진했다. ‘맨발의 가르멜회’의 창시자이자 ‘예수의 테레사’로 불리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이야기다.
 
동명의 소화 테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테레사’로도 불리는 테레사 성녀의 탄생지이자, 그가 평생을 헌신했던 가르멜 수녀회가 자리 잡고 있는 아빌라의 구 시가지와 아빌라 대성당은 1985년 그 종교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성녀의 땅 아빌라를 찾아가봤다.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도 간 전쟁 치른 아픈 역사 간직
 
성녀가 태어난 땅은 달랐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약 85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은 도시 아빌라에는 평화로운 새 소리와 청량한 바람, 그리고 맑은 햇빛이 가득했다. 아빌라를 찾은 이라면 누구든 절로 마음이 고요해지는 평화가 도시 전체에 깃들어 있었다.
 
성채(城砦) 도시로도 유명한 아빌라 구 시가지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빌라는 해발 1131m의 높은 곳이 위치해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때문에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 간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8∼10세기 약 300년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공방전이 펼쳐진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아빌라 구 시가지는 높이 12m 두께 3m의 견고한 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태양빛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더욱 아름답다.
 
 
714년 이슬람교도 지배하에 있던 아빌라는 11세기 말 다시 그리스도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국왕이었던 알퐁소 6세의 사위인 라이문도 백작은 이슬람교도들의 반격에 대비해 1090년부터 9년에 걸쳐 이 성벽을 완성했다.
 
그러나 아픈 역사의 상징처럼 아빌라 구 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이 견고한 성벽을 마주한 느낌은 아프기 보단 오히려 아름다웠다. 은은한 갈색빛을 띤 둥근 성벽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황색과 적색으로 변하며 도시 전체에 따듯한 자연의 빛을 선사하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2000명이 투입돼 9개의 성문과 88개소의 타원형 탑을 비롯한 총 길이 2526m, 높이 12m, 두께 3m의 성벽을 완성한 것이다. 9개의 문 가운데 대성당 근처에 있는 산 비센테(San Vicente) 문과 알카사르(Alcazar) 문이 가장 크고 웅장하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아빌라 구 시가지와 대성당은 이 성벽 안에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빌라 대성당(Avila Catedral)은 12세기 중엽 착공해 16세기에 완성됐는데, 대성당 한쪽이 성벽의 반원형 탑을 겸한 채 성벽 밖을 향해 무게감 있게 자리 잡고 있어 요새의 본진과도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산 비센테 문에서 도보로 3분 정도 걸어오면 나오는 이 대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으로 지어졌다. 알바르 가르시아가 설계한 이 성당은 한눈에도 구별되는 여러 종류의 벽돌로 지어졌다.
 
 
- 아빌라 성벽 일부와 이어져 있는 아빌라 대성당. 요새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좌측의 소 성당은 이후 증축된 것으로 이 소성당에서는 르네상스 양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아빌라 대성당에서 아빌라의 중심지인 메르카도 치코(Mercado Chico) 광장에 이르는 길에는 중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옛 건물들과 식당,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성녀 테레사 수도원
 
아빌라 성벽에서 또 하나의 웅장한 문인 알카사르(Alcazar) 문 옆 성벽 앞에는 이탈리아 베르니니의 작품인 성녀 테레사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돌에 기대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는 성녀 테레사는 조각상에서 맨발 차림인데, ‘맨발의 가르멜회’ 창시자로서 엄동설한에도 샌들만 신고 다닌 그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동상이다. 도시 곳곳에서 성녀 테레사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알카사르 문에서 나와 성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라스트로(Rastro) 문이 나오는데, 이 문을 통과해 약 100미터 정도 걸으면 오른쪽에 산타 테레사 광장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성녀 테레사 수도원(Convento de Santa Teresa)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성녀 테레사의 생가 터에 지어진 이 수도원은 1636년 건립됐고, 성녀 테레사가 태어난 방이 성당으로 돼 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다소 소박한 느낌이다. 성녀 테레사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그림과 조각상이 성당 곳곳에 배치돼 있다. 수도원 옆에는 성녀 테레사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성녀 테레사가 보던 책이나 쓰던 묵주 등 유품이 가득하다. 성녀 테레사가 쓰던 도토리 묵주가 눈길을 끈다.
 
 
성녀 테레사가 태어난 생가터에 지어진 수도원. 성당은 성녀 테레사가 태어난 방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네 기둥 십자가
 
성벽이 감싸듯 안고 서 있는 아빌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살라망카로 가는 길에 있는 로스 쿠아트로 포스테스(Los Cuatro Postes, 네 개의 기둥). 성 밖 외곽에 있는 이 네 기둥 안에는 십자가가 서 있기 때문에 ‘네 기둥 십자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곳은 로마시대 그리스도인을 처형한 순교지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 성녀 테레사가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봉사하겠다며 아프리카로 떠날 것을 다짐하고 가출했을 당시, 테레사 성녀의 삼촌이 어린 테레사 성녀와 그녀의 오빠를 찾아서 데리고 들어온 곳이다. 해질 무렵, 네 기둥 십자가에 서서, 아프리카로 떠날 것을 다짐하며 자신의 고향이자 훗날 자신 스스로가 수도원 개혁의 불씨가 됐던 아빌라 시내를 내려다 봤을 어린 성녀 테레사를 떠올려봤다. 성녀 테레사가 태어났던 600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인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 보다 더 엄격하고 순수한 신앙을 강조했던 수도원 개혁의 불꽃이 일어났던 곳,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한 성녀 테레사의 땅 아빌라가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났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고요한 평화와 함께 ‘순명’의 은총이 밀려왔다.
 
 
아빌라 구 시가지의 전경을 가장 잘 관망할 수 있는 곳이다. 로마시대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가톨릭신문, 2011년 9월 25일, 아빌라(스페인) 임양미 기자]

출처 : 가르멜산 성모 재속가르멜회
글쓴이 : † 다미아노† 원글보기
메모 : 죽음도 사랑으로 받아들인 성녀 데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