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1월 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2저녁기도
11월 10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끝기도
라파엘로 산치오의 성 대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알레산드로 알가르디의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의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태어나 440년에 교황이 되었다. 영혼들의 참된 아버지요 목자였다. 신앙의 완전성을 보존하고 교회의 일치를 수호하며 할 수 있는 한 야만인들의 침범을 격퇴시키거나 또는 무마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래서 "대 교황"이라는 응분의 호칭을 받게 되었다. 461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Sermo 4,1-2: PL 54,148-149)
우리 직분의 특수한 봉사
하느님의 보편적 교회가 여러 계급으로 되어 있어 교회의 거룩한 몸이 여러 지체들로 되어 있지만,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직분들이 서로 다르다 해도 그 다양성은 그들 중 가장 미소한 직분이라도 머리와 연결되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가 지닌 신앙과 받은 세례는 하나이므로 우리는 갈림 없는 친교와 공통의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된 베드로 사도는 거룩한 말씀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신령한 집을 짓는 데 쓰일 산 돌이 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다운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난 이들은 모두 십자가의 표시로 왕이 되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써 사제로 축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분의 특수한 봉사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도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왕다운 겨레와 사제직에 참여케 하는 그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특은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 예속되어 있는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께 정결한 양심을 바치고 마음의 제단 위에서 신심의 정결한 제물을 봉헌하는 일보다 더 사제다운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덕으로 말미암아 이것들은 모든 이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렇지만 본인이 성품에로 축성되는 이날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의 영예인 것처럼 기뻐하는 것은 거룩하고도 칭송받을 만한 일입니다. 교회의 온 몸 안에서 거행하는 사제직의 성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축성의 기름 부음은 높은 계급의 사제직에 더 풍성히 내리지만 그것은 또 낮은 부분에까지 모자람 없이 내립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모두가 이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적인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비천한 나에게보다 복된 베드로 사도의 영광을 관조하는 데에다 마음을 돌린다면, 우리 기쁨의 이유는 더욱 깊고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모든 은총의 원천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은총을 넘치도록 받으신 분을 기념하여 이 축제를 지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외적으로 자신만이 받은 수많은 은총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그분을 거치지 않는 은총을 하나도 자니고 있지 않습니다.
말씀께서는 이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의 구속을 위해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셨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 : 대 레오
중용과 타협으로 문제 해결
한님성서연구소 하성수 박사
생애
교회사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590~604)과 더불어 레오 교황(440~461)만이 후세에 「大」라는 경칭을 얻었다. 레오의 전기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이 전해지지만 그가 태어난 곳과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불확실하다. 430년 네스토리우스 논쟁 당시 네스토리우스와 치릴루스가 로마의 주교 첼레스티누스에게 지지를 요청하였을 그 즈음에 레오는 로마 공동체의 봉사자(아마도 수석 부제)였다. 이 시기에 그는 로마의 마니교도, 펠라기우스파, 아리우스파에 맞서 활발하게 투쟁하였다. 그의 선임자 식스투스 3세가 440년 사망하였을 때 레오는 화해사절로 남부 갈리아에 있었다. 로마 공동체에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이 임무를 맡고 있던 중에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레오가 로마의 주교직을 맡을 당시 서로마제국은 정치?사회적 질서가 와해되고 있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론 논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태였다. 레오는 21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활동하다가 461년 11월 10일에 사망하였으며, 베네딕도 15세는 1754년 10월 15일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수위권
레오는 자신이 모든 교회를 책임지고 있으며 모든 주교의 지도자라는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의 본보기는 베드로였다. 그가 자신의 축성일에 행한 모든 설교는 베드로에 관한 것이었으며,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인이라고 여겼다. 그의 베드로론은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의 탁월한 위치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전권을 베드로에게만 넘겨주었으며, 그 전권은 베드로를 통해서만 다른 사도들에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사도들의 수장」과 그 영예에서는 같지만 합법적인 지위에서는 같지 않다. 레오는 로마 상속법에 근거하여 「상속인」에 관한 이론을 줄곧 일관되게 전개하면서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탁월한 위치를 설명한다. 마태오 16, 18 이하에 따라 베드로에게 넘어간 전권은 유언자에게서 상속인에게 직접 그리고 전적으로 넘겨진다. 모든 주교들이 로마 주교의 중재를 통해서 자기들 교회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지도적 임무를 수행한다면 로마의 주교는 모든 주교들보다 우월하다.
레오는 이러한 사상을 그의 설교들과 서간들에서 전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에 대해 서방에서 부분적인 반대 의견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레오는 갈리아 지방의 전 교회에 우월적 지위를 요구한 아를의 힐라리우스를 단호하게 논박하였다. 한편 동방은 레오의 보편 교회적 지도권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교의적 분규에 그의 관여는 부분적으로만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수위권을 두고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같은 권리를 요구하여 칼케돈 공의회가 이를 부여하는데, 레오는 칼케돈 공의회의 규범규정 28조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나 그것도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1054년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의 분열은 이전에 오랫동안 곪아온 여러 증상이 마침내 터진 것이었다. 그 증상 가운데 하나가 수위권이다.
신학적, 교회정치적 역할
44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극단적인 단성론을 주장한 콘스탄티노플 욥 수도원의 원장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다. 이 때문에 에우티케스는 몇몇 주교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 역시 로마의 레오에게 편지로 이 문제를 문의하였다. 레오는 449년 6월 13일 장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유명한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간」을 보냈다.
황제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8월 1일 에페소에 교회회의를 소집하였으며, 레오도 교회회의에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8월 8일에 디오스쿠루스 사회로 열린 교회회의는 레오의 교의서간은 낭독하지 않은 채 로마 사절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에우티케스를 복권하고 플라비아누스를 면직하였다. 플라비아누스는 유형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런 까닭에 레오는 이 교회회의를 「도둑 교회회의」라 부르며 그 결정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레오는 황실에 또다시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45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낙마하여 갑작스레 죽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그의 누이 플케리아가 원로원 의원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로 공포하였다. 바뀐 황제가 레오의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간」을 인정하고 수위권 문제가 해결되면서, 레오는 더 이상 공의회 개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 황제 부부가, 레오가 그렇게 소집하려고 애썼던 공의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레오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절을 의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이 공의회를 주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칼케돈 공의회는 교회사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그의 사절이 의장으로 임명된 첫 번째 전 세계 공의회가 되었던 것이다. 공의회는 레오의 「교의서간」을 추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경을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신경의 수용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어 레오는 죽을 때까지 이 논쟁에 관여했다.
정치적 역할
레오는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왔을 때, 그는 황제의 특사와 함께 만투아까지 아틸라를 마중나가 그를 감동시키고 훈족의 침입을 저지하여 로마시를 보호하였다. 455년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쿠스가 로마 앞에 포진하였을 때, 레오는 그들이 로마를 약탈하는 것은 못 막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로마시를 보호하는 데 성공하여 로마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보존하였다. 이 일로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국민의 수호자로 존경받았다.
레오의 활동 가운데 이 세 가지 두드러진 업적은 교회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몰락해가는 서로마제국에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빈 공간을 채운 그의 폭넓은 사목활동 가운데 정점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며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레오는 신학적.규율적.정치적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용과 타협이라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16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5] 레오 대 교황의 ‘사순시기 강론’에서
“단식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다”
본문
“하느님의 지배를 받는 영혼은 육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 만일 우리가 단식하면서 우리 생활이 완전한 절제에서 오는 순결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면, 불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 단식의 핵심은 음식의 절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일 마음이 불의에서 되돌아서지 않고 혀가 악담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육체에 음식을 줄이더라도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합니다.”
레오, ‘사순시기 강론’ 4, 2
“단식의 경기장에서 음식만 절제하면 만족스런 결과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체에 음식을 줄이면 영혼은 강해집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약간 고통을 당하겠지만 내적으로는 영양을 섭취하게 됩니다. 육체에게는 육적 풍만이 줄어들지만 정신은 영적 즐거움으로 강인해질 것입니다.”
레오, ‘사순시기 강론’ 1, 5
“단식에는 자선과 선행이 뒤따라야”
해설
레오 대 교황(440 ~461)은 452년에 훈족이 로마를 침공하려고 하자 훈족왕을 만나 설득하여 로마침략을 포기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455년에 반달족이 로마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반달족을 설득하여 로마를 구해냈다.
그 결과 반달족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모두 황폐화되었지만 로마만은 그 화를 면했던 것이다.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해서 ‘반달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처럼 레오 대 교황은 야만족의 침략으로 멸망의 위험에 처한 로마를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소중한 문화 유산과 그리스도교를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전해 주었다.
레오 대 교황은 박해시대의 영성과 단식의 영성을 연결지어 설명함으로써 단식의 의미와 가치를 발전시켰다. 박해시대에 순교가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었다면, 박해가 끝난 평화시대에 하는 단식도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듯이 단식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해야 한다.
고대 교회에서는 단식일에 식사를 몇 끼 해야 하며 식사량은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세한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건강상태나 신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음식을 절제하였다. 또한 레오 대 교황의 시대에는 아직 금육(禁肉)이란 개념이 없었다. 오늘날에는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만 단식을 하지만, 당시 로마 교회에서는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했고, 사순시기에는 주일을 뺀 모든 날에 단식을 하였다. 하지만 단식이란 음식을 절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날 건강이 나빠서 단식하거나 미용이나 웰빙으로 단식하는 경우가 있고, 투쟁이나 수행을 위해 단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레오 대 교황은 그리스도인의 단식에는 반드시 영적 단식과 자선과 선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적 단식이란 죄와 악행을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병자나 육체적으로 단식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적 단식은 반드시 해야 한다. 레오 대 교황은 단식을 한다 하더라도 순결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 이단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육적 단식’과 ‘영적 단식’을 절묘하게 연결시켰다. “육신이 음식을 단식하듯이 영혼도 악행을 단식하게 됩니다.”(레오, ‘사순시기 강론’ 12, 2)
교회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단식을 하거나, 단식을 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고 하니까 마지못해 하는 단식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식한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면,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단식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단식하여 절제한 것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베풀라고 가르쳐왔다.
이 같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레오 교황은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단식을 하는 지금이야말로 더욱더 자비의 행위들로 열심히 완덕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사순시기 강론 8, 4)라고 강조하였다.
단식에는 자선과 선행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순시기를 지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며 본분인 것이다. 따라서 매일 단식을 해야 하는 사순시기는 슬프고 괴로운 시기가 아니라 빠스카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으로 빠스카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는 기쁨의 시기인 것이다.
단식과 자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단식의 완성은 자선의 실천에 있다.
따라서 단식한 금액을 가난한 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자선 행위야말로 단식을 완성하는 행위이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는 것이다. 자선은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세례성사(‘세례의 물’)와 참회의 성사(‘참회의 눈물’)와 더불어 자선을 사순시기에 맞는 가장 적절한 행위라고 강조하였다. 죄사함을 받는 구원의 시기가 바로 사순시기인 것이다.
“물이 불을 끄는 것처럼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 30)라는 말씀을 근거로, 레오 대 교황은 “세례의 물과 참회의 눈물이 죄를 씻어주지만 자선도 죄를 없애줍니다”(레오, ‘사순시기 강론’ 11, 6)라고 설명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단식의 길로 들어서도록 초대하고 있다.
[노성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광주가톨릭대학교), 가톨릭신문, 2005년 12월 4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3. 교황편 (2) 성 대 레오 1세
(사진설명)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아틸라 왕을 설득하러 나서는 레오 1세 교황(바티칸박물관 소장)
‘정통 신앙 옹호’ 고대 교회 초석 마련
‘이탈리아의 구원자’ 로마 시민 신뢰 절대적
173편 서간, 100여편 강론 등 방대한 저술
교회 역사 안에서 교황으로서는 처음 「막뉴스(Magnus, 大)」로 불리게된 45대 교황 성 대 레오 1세(St. Leo Magnus I, 440~461).
그에 대한 평가는 위대한 행정가, 신앙의 보존자, 고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황으로 요약된다.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교회 역시 여러 가지 이단 사상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신학적 사목적 정치적 난제들을 훌륭하게 해결해 냈던 그는 대내적으로 로마 교회의 최고 통치권 기반을 확립한 수장이었으며 대외적으로도 사실상 로마시의 수호자가 되었던, 당시 서방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3세기경 교회의 가장 큰 논쟁 꺼리중 하나는 그리스도론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인가?」「그리스도는 단지 하느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은가?」「그리스도는 한분 이신 하느님의 현현에 지나지 않은가?」 등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단일성 또는 상이성 문제에 대한 관심들이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 인근 수도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가 주도한 단성론은 그리스도안에 내재하는 신성과 인성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돼 있어 실제로는 신성 하나만이 있다는 주장으로 예수의 인성이 의문시되고 또 예수의 구원 업적과 교회의 구원 신비도 의문시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451년 10월 8일 개최된 칼체돈 공의회는 레오 1세 교황의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신학 논술, 「토무스 앗 플라비아눔」이라고 불리는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한」(Epistola dogmatica ad Flavianum)을 기초로 이같은 단성설을 단죄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에서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결합되어 있음」을 신조로 선포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이 서한은 역사가들에 의해 교황의 첫 「무류적 성좌선언」(無謬的聖座宣言)으로 평가된다.
바티칸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라파엘로 작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아틸라 왕을 설득하러 나서는 레오 1세 교황」은 452년 훈족의 침공을 받아 로마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적군의 왕을 만나 직접 담판, 멸망 직전에서 구해냈던 레오 1세의 용감성과 권위 위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레오 1세 교황이 재위하던 시절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한 로마대제국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 서고트족의 로마 공격에 이어 훈족이 로마를 침입했고 속수무책이었던 발렌티누스 3세 황제는 교황에게 강화 중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레오 1세는 만토바의 회담을 통해 화평을 얻어내고 아틸라 왕은 진지를 거두어 돌아가게 됨으로써 로마를 지킴과 동시에 교황의 위상을 크게 부각시켰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이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또한 455년 가장 야만적인 반달족이 가이세릭을 앞세우고 로마를 쳐들어 왔을 때도 레오1세는 적들의 진영으로 들어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로마를 그들 손에서 완전히 구출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로마 시민들을 살육에서, 로마시를 방화로부터 구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같은 노력들을 통해 레오 1세는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부각됐고 로마 시민들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교황직이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레오 1세는 173편의 서간들과 100여편의 강론들을 남겼다. 공식 문헌적 성격을 띠고 있는 서간과 강론은 신학적인 의미뿐 아니라 라틴문학사안에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서간은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전까지 가장 광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당시 교황들 중에서 레오 1세는 대부분의 강론이 전해져 오는 유일한 교황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서간 내용이 교황 재직시에나 사후에도 교회 안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사제로서의 설교 직무에 충실했던 모습, 종교적으로 매우 돈독했던 신심을 엿보게하는 레오 1세의 강론집은 그후 전례적인 용도로 자주 이용돼 왔던 것과 함께 로마의 마니교 이단과 아르스의 힐라이우스주의와의 논쟁, 에우티케스 이단에 대한 반박 내용 등 교의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그 가치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은 또 이들 강론을 통해서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했다. 재위기간중 로마의 수위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던 그는 이런 면에서 베드로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세 교황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황 인명록은 이와관련 레오 1세가 황제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권위에 의존해서」 결정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레오1세는 성서가 진술하는 두가지 근거를 들어 교황의 수위권을 역설했다. 즉 사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위임된 것은 단지 베드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 이유는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좌에 등극하는 후계자들을 통해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학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베드로의 대리자」라는 교황 칭호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와함께 레오 1세는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황은 전체 교회를 위해 책임을 진다고 밝혔고 결국 자신들의 교구 내에서 행사하는 주교들의 지도권 , 그리고 자신들의 지역 내에서 행사하는 수도 대주교와 총대주교들의 지도권은 폐지되지 않고 오히려 교황과의 일치로 통합된다고 밝혔다.
레오 1세는 신앙에 관해서도 탁월한 가르침을 제시했던 교황이었다. 1754년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레오 1세를 「교회 박사」(Doctor Ecclesiae)로 선포, 그같은 업적을 기렸다.
461년 11월 10일 서거한 레오 1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됐다. 축일은 11월 10일.
[가톨릭신문, 2004년 1월 11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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