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라아 대축일 제1저녁기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라아 대축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340년경 이탈리아 트레비리의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시르미오(현재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직에 들어갔다. 밀라노에 있을 때인 374년 12월 7일 뜻밖에 주교로 선임되어 서품받았다. 힘을 다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신자들의 참된 목자요 스승으로서 모든 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꾸준히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 저서들을 통해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참된 신앙을 옹호했다. 397년 4월 4일 성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2,1-2. 4-5. 7; PL 16[edit. 1845], 847-881)
당신은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주교직을 맡았으나 이제 교회의 선미루 갑판에 앉아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를 조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센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방향타를 굳게 잡으십시오. 바다는 참으로 깊고 광대하지만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을 마련하시고, 강물 위에 그 물을 굳히셨기"에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온 세상의 암초 가운데서 의연히 흔들리지 않은 채 존속하며 그 견고한 기초 위에 서서 밀려 오는 바다의 성난 파도를 견디어 냅니다.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오지만 파선되지 않고 악의 세력들이 자주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밀려 왔다 물러가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수고하는 자를 받아들일 지극히 안전한 구원의 항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시달리기도 하지만 잔잔히 강들을 항해하기도 합니다. 이 강들은 "주여, 강물 소리 높삽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한 그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영적인 은총으로 흘러 넘칠 때 소리를 드높입니다.
폭우처럼 그의 성도들 안에 흘러 들어가는 강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잔잔한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성급한 물줄기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나 바울로 그리고 베드로처럼 이 강물에서 물을 충만히 받는 사람은 소리를 높입니다. 사도들이 마치 전령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로 복음의 메시지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 것과 같이, 이 물을 받는 사람 역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소리를 높이도록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여러 곳에서 비를 내리는 예언자들의 구름의 물을 받으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거두고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받는 사람 역시 구름처럼 이슬을 내립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을 물로 가득 채워 당신 지반이 내부의 가득 찬 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물로 축축하게 적셔지도록 하십시오.
많이 읽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득 채워져 넘치는 그 물로 다른 사람에게 물을 대줄 수 있습니다. "비를 싣고 오는 구름은 비를 땅에 쏟아 놓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유창하고 순수하며 명료한 말로 하고 윤리에 관한 훈계를 할 때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며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당신이 이끌어 가는 곳으로 그들이 기꺼이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말이 지혜로 가득 차도록 하십시오. 솔로몬은 "지혜 있는 자의 입술은 지혜의 무기로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네 입술이 생각과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듯이 당신의 설교가 명료하고 재빨리 이해를 주어 다른 사람의 설명이 필요 없고 설교가 그 내용의 힘으로 옹호받도록 하며, 당신 입에서 헛되고 뜻 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6: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활동하고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지상 장막의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도는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권고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죽음의 복됨’(De bono mortis) 3장 9절
[해설]
암브로시우스(339∼397)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에 속한다. 그의 생애에 관해 좀 더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죽음의 복됨’은 죽음에 관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강론이다. 불행하게도 이 강론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암브로시우스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가톨릭 신학에 정통함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의 복됨’에서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을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죽음. 둘째, 신비적인 죽음. 셋째,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은 죄이며 육적인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앙인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우리 인간 세계에 들어옴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죽음의 복됨’ 3, 9)
암브로시우스 교부에 의하면,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려면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을 본받는 것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깨뜨리는 것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본받는 삶을 죽음이 작용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삶에 작용하는 죽음을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비적인 죽음으로 간주하며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죽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은 삶의 가치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지혜를 찾고 있다. 현실 속의 불의를 외면하고 삶을 압박하는 멍에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부활의 희망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죽음을 본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외면한고 있다면, 먼저 신비적인 죽음이 작용할 영적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비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원히 남게 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참조: ‘죽음의 복됨’ 3, 9) 결국 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 아직도 사순시기가 그저 습관적인 전례의 일부분으로만 다가온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신비적인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 부활에로 다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을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 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에서 평온에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죽음의 복됨’ 3, 9)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해보자!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2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7 :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본문]
일반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 윤리적인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이 신비를 전할 때, 동정 마리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음으로써 그 믿음이 북돋아지도록, 한 나이 많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잉태한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전갈을 불신했거나, 천사의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거나, 증거로 든 예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에 대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하려는 경건한 마음에 차서, 그리고 그 기쁨에 이끌려 급히 유다 산골마을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마리아가 높은 곳 말고 어디로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겠습니까? 성령의 은총은 느린 노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부녀들이여! 여러분도 임신한 친척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할 근면함을 배우십시오. 전에는 가장 깊은 내면의 방에서 머물던 마리아를, 동정녀의 부끄러워함도 군중 앞에 나타나는 일에서 붙잡지 못했고, 산악의 험난함도 마리아의 열정을 저지하지 못했고, 여행의 먼 길도 마리아의 의무수행을 지연시키지 못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본분을 생각하면서, 손해는 생각지 않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성별을 생각지 않고, 급히 집을 떠나서 산골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 2장 19∼20절
[해설]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주님은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당신의 구원사업의 계획을 알려주신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믿음을 도와주시고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친척 엘리사벳이 주님이 베푸신 기적의 은혜로 아기,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신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갖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신 것을 언급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은혜를 간직하도록 도움을 베푸는 주님이시다.
2) 동정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과 그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방문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방문은 언제나 천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를 뛰놀게 만들었고, 엘리사벳의 입에서 찬미의 기도가 나오게 도와주었고, 마리아도 기쁨에 넘쳐 찬미의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처럼 은혜로운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안겨다 줌을 알 수 있다.
3) 성령께서는 지체함과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마리아는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분이시다.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길을 서둘렀다. 사실을 확인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마음으로 주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찬양하러 길을 서두른다.
산위로 이끄심은 암브로시우스의 설명을 따르자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거룩한 곳이며, 예수께서도 기도하시러 자주 산에 올라가셨다.
산에 오른다는 말은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설명에 의하면, 주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심을 믿는 것,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신 것을 믿는 것,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자가 되신 것을 믿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산으로 올라감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신 은혜의 어머니가 되셨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9일, 장인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청주교구 총대리)]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34. 교부편 (15) 암브로시오
암브로시오는 성직자와 신자, 비신자 등 모든 이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성서주해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단으로 갈라진 이들 화해시켜
학덕·성덕 갖췄지만 늘 겸손
주교로 추대된후 세례받기도
374년 밀라노, 거친 표정으로 성당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두 패로 갈려 서로를 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시우스(Auxentius, ?~374)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이 자리는 이미 커다란 소동과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완고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전임 주교를 따르던 이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은 일전을 결사할 태세였다. 바로 이 자리에 당시 밀라노에 관저를 둔 에밀리아 지방 총독 암브로시오가 공정한 주교 선출을 감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군중들에게 평화적인 방법과 대화로 화해를 추구하자고 권고하던 그의 목소리 사이로 한 아이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뽑자』고 소리쳤다. 순간 성당안은 정통파나 아리우스파를 막론하고 『암브로시오 주교』를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암브로시오는 당혹감 속에서 주교직을 사양했지만, 결국 세례를 받고 여드레 후인 374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성인이자 밀라노의 주교로서,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암브로시오(Ambrosius
, 339~397)는 이로써 가장 완벽한 사목자의 전형으로서 자신의 주교 직무를 시작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자신이 남긴 저서들, 특히 서간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Vita S. Ambrosii)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독일 서쪽 지역인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난 그는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갈리아 지방의 행정관이었던 부친의 사후, 가족들은 로마로 돌아왔고 거기서 암브로시오는 고등 교육을 받았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공직자의 길을 걸었고,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훌륭한 실력까지 겸비한 그의 출세는 탄탄대로였다. 처음에는 변호사로 있다가 밀라노의 총독이 됐다. 암브로시오가 주교가 된 사건이 바로 이때 발생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 나눠 주었다. 빼어난 학덕과 성덕을 함께 갖추고 있던 그는 주교가 된 후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하며 주교로서 자신의 모자람을 고백한 그는 이후 사제 심플리치아노로부터 지도를 받아 성서공부에 몰두했다.
선배인 치프리아노, 자신이 교회의 사람으로 이끈 저 위대한 후배 아우구스티노와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오 역시 주교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서 성서를 통해 양성된 사람이다. 특히 암브로시오의 수많은 주석 작품들은 책으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설교를 통해 태어난 것들이다.
그는 탁월한 강론가였다. 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 여기에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심화시키고 더욱이 뜨거운 열정을 가미해 준비한 강론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의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입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이단으로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성직자들과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냈다.
암브로시오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밀라노의 한 모자이크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작은 키에 여윈 몸매, 길고 갸름한 두상에 턱수염, 사색에 잠긴 표정, 권위 있는 검고 큰 눈, 절제된 열정. 그는 활동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타고난 연설가였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마찬가지로 거의 완벽한 사목자, 주교로서 알려진 인물이 바로 암브로시오 주교이다. 범상한 인물이었지만 고고한 귀족에 머물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의 변호자가 바로 그였다.
주교가 된 당시, 밀라노는 당시의 다른 여러 지역들이 그러했듯이 가난한 민중들은 세금과 부자들의 권세에 짓눌려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그는 이후에는 말씀과 행동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와 사유 재산의 권리와 한계에 대해 강하게 가르친 인물도 흔하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함께 사용하라고 준 것인데, 그대는 그대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도둑질했다… 사람은 빵을 구하는데 그대의 말(馬)은 황금을 씹고 있다. 오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떨어질 단죄는 얼마나 무거운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대는 옥반지를 굴리고 또 굴리는구나. 그대 옥반지 하나면 모든 백성을 구하고도 남을 것인데…그대는 그대가 지니고 있는 재화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일 뿐인데, 그대는 황금을 땅속에 파묻고 있다. 차라리 황금을 팔아서 구원을 사라』(「나봇 이스라엘인」, De Nabuthe Jezraelita 중에서).
주교로서 그는 또한 성직자들의 자질에 늘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을 위한 영적 지도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저술들은 많다. 성서 주해서와 윤리, 수덕에 관한 저서들, 그리고 교의신학적 저서들과 연설문, 서간, 찬미가들이 포함된다. 그리스어로 불멸, 혹은 「신적(神的)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암브로시오는 오늘날 주교들이 따라야 할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7일, 박영호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 교부들의 영성
5) 성 암브로시오(334-397)
플라톤 사상을 신앙에 접목
성인의 생애를 읽을 때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한층 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인은 세례도 받기 전에 군중들로부터 주교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의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선출된 그는 그리스도교 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의 지도에 있어서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성인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34년 경 현재 독일의 트리예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서 귀족 교육을 받고 공직에 진출하여 에밀리아-리구리아 속주의 총독이 되어 수도 밀라노에 거주하였다. 374년 봄,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던 날에 폭동을 예방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는데 주교 후보자들 편에서 환호하면서 모두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추대하였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던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에 주교직을 수락한 그는 공부하여 세례를 받고 주교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였다. 특히 그리스 전통을 학교로 삼아 오리게네스와 교회의 교리와 성서를 공부하였다.
또한 친히 강론 원고를 작성하고 친필로 책을 저술하였다. 동정녀들과 과부들에 관하여, 성령론, 아브라함, 진복팔단, 성사론, 성직자들의 의무에 관하여, 루가 복음 주석서, 헥사메론 등 수없이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특히 수사학에 뛰어났던 젊은 아우구스티노가 성인의 강론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갔다가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외에도 성인은 로마 제국의 동부 지방과 서부 지방의 그리스도교 영성을 중개하는 인물로서 필로,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저서를 번역하고 쉽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유산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용시킨 인물 이다. 위기에 처해있던 그 당시 백성의 생활을 건전한 그리스도교 생활로 인도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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