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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암브로시오 주교 기념일 성무일도 ~

 

12월 7일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라아 대축일  제1저녁기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라아 대축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암브로시오 주교 학자 기념 

 

340년경 이탈리아 트레비리의 로마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시르미오(현재의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직에 들어갔다. 밀라노에 있을 때인 374년 12월 7일 뜻밖에 주교로 선임되어 서품받았다. 힘을 다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고 신자들의 참된 목자요 스승으로서 모든 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보여 주었다. 꾸준히 교회의 권리를 수호하고, 저서들을 통해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참된 신앙을 옹호했다. 397년 4월 4일 성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편지에서
(Epist. 2,1-2. 4-5. 7; PL 16[edit. 1845], 847-881)

당신은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주교직을 맡았으나 이제 교회의 선미루 갑판에 앉아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배를 조종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거센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방향타를 굳게 잡으십시오. 바다는 참으로 깊고 광대하지만 주께서 "바다 위에 그 터전을 마련하시고, 강물 위에 그 물을 굳히셨기"에 두려워 마십시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는 사도적 바위 위에 세워진 것으로서 온 세상의 암초 가운데서 의연히 흔들리지 않은 채 존속하며 그 견고한 기초 위에 서서 밀려 오는 바다의 성난 파도를 견디어 냅니다. 물결이 사방에서 밀려오지만 파선되지 않고 악의 세력들이 자주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밀려 왔다 물러가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수고하는 자를 받아들일 지극히 안전한 구원의 항구를 갖고 있습니다.


이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시달리기도 하지만 잔잔히 강들을 항해하기도 합니다. 이 강들은 "주여, 강물 소리 높삽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한 그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받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 나오는 강들입니다. 이 강들은 영적인 은총으로 흘러 넘칠 때 소리를 드높입니다.


폭우처럼 그의 성도들 안에 흘러 들어가는 강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잔잔한 영혼을 기쁘게 해주는 성급한 물줄기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나 바울로 그리고 베드로처럼 이 강물에서 물을 충만히 받는 사람은 소리를 높입니다. 사도들이 마치 전령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로 복음의 메시지를 온 세상 끝까지 전파한 것과 같이, 이 물을 받는 사람 역시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소리를 높이도록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주님을 찬미하는 그리스도의 물을 받으십시오. 여러 곳에서 비를 내리는 예언자들의 구름의 물을 받으십시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거두고 샘에서 솟아나는 물을 받는 사람 역시 구름처럼 이슬을 내립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을 물로 가득 채워 당신 지반이 내부의 가득 찬 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물로 축축하게 적셔지도록 하십시오.


많이 읽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득 채워져 넘치는 그 물로 다른 사람에게 물을 대줄 수 있습니다. "비를 싣고 오는 구름은 비를 땅에 쏟아 놓지 않고는 지나가지 않는다."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유창하고 순수하며 명료한 말로 하고 윤리에 관한 훈계를 할 때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며 고상한 말로 신자들을 이끌어 당신이 이끌어 가는 곳으로 그들이 기꺼이 따라가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하는 말이 지혜로 가득 차도록 하십시오. 솔로몬은 "지혜 있는 자의 입술은 지혜의 무기로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네 입술이 생각과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듯이 당신의 설교가 명료하고 재빨리 이해를 주어 다른 사람의 설명이 필요 없고 설교가 그 내용의 힘으로 옹호받도록 하며, 당신 입에서 헛되고 뜻 없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부들의 가르침: 암브로시우스
이단에 대항, 정통신앙 보호 앞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장인산 신부
 
생애
 
암브로시오는 성인이며, 주교, 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예로니모, 그레고리오 대교황과 더불어 라틴(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교부로 꼽히는 인물로서 339년 현재 독일 서쪽 도시인 트리어에서 출생하였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그가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 모습이 비쳐질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聖 암브로시오의 생애 : Vita S. Ambr osii)덕분에 잘 알려져 온다. 갈리아의 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부친의 별세 후 어머니는 암브로시오를 포함한 삼남매를 데리고 로마로 돌아갔다. 로마에서 누나 마르첼리나는 수녀가 되어 교황 리베리오로부터 머리수건을 받았고, 형 사티로와 함께 암브로시오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수사학, 철학, 법학 등을 배운 암브로시오는 일찍 관직생활에 들어가서 황궁이 있던 도시 밀라노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도시는 에밀리아-리구리아지역의 수도로서 암브로시오는 그 지역의 주지방장관이 되었다.
 
당시 밀라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던 아리우스주의 이단을 추종하던 아욱센시오 주교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후임주교를 뽑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작용하시어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교회-국가간 문제 다뤄
 
암브로시오 주교는 주교품을 니체아 공의회의 정통교리를 옹호하는 주교로부터 받은 후 단호하게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가톨릭 교회의 정통신앙을 보호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서방교회에서 니체아 신앙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암브로시오는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부이다.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제에게까지 인식케 하였다. 국가의 권력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대처함으로써 교회의 권리와 가르침에 대하여 황제의 간섭을 단호하게 물리침으로써 교회지도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교회와 국가간의 문제를 정식으로 다룬 최초의 교회학자였다. 또한 교회가 그 고유한 영역에서는 최고권을 가지며 도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황실에서도 인식케 하였다.
 
탁월한 강론가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직후 이렇게 고백하였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 그는 열심히 성서공부에 몰입하였다. 바쁜 사목활동 중에서도 그는 늘 성서를 읽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우구스티노가 증언한다(고백록 6, 3, 3).
 
암브로시오 주교는 특히 동방교부들의 저서를 심취하여 읽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전해 받았다. 필로와 오리게네스와 같이 성서의 3중(重)적인 의미(자연적, 신비적, 윤리적)를 받아들였다. 특히 윤리적, 유비적 해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성서의 각 사건 안에서 깊은 의미를 추구하였고, 신앙과 생활에 유익을 가져다주는 가르침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필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암브로시오 교부는 ’Philo Christianus’(그리스도교적 필로)라고 불리운다.
 
암브로시오 주교가 성서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열심히 준비한 강론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심어주었다. 아우구스티노도 그의 강론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받은 사실은 유명하다(고백록 6, 4, 6). 그는 이단으로 갈라진 신자들을 화해시키고, 성직자들과 신자와 비신자 군중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동방신학을 서방교회에 소개하고 자신의 교구 사제들이 주교관에서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생활 할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교구참사수도회의 시조가 된 사목자들의 아버지였다고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의 모범이 된 목자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곧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희사하였고, 자신은 수도자와 같이 청빈과 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사목활동에 전념하였다. 주교관을 개방하여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를 만날 수 있었고,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줄을 서서 그를 찾았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우는 사람이었다. 죄인들에게 항상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였던 그는 교회 사목자들의좋은 모범이 되었다. "매번 죄를 고해하러 사람들이 그에게 올 때마다 그는 항상 같이 울곤 하였습니다. 그는 죄에 떨어진 사람과 함께 자신도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죄의 고해를 들은 그는 항상 주님만을 신뢰하며 기도해 주곤 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후대 사제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제들은 사람들을 책망하고 고발하는 자세보다는 하느님께 그들을 위해서 전구해 주는 자세로 일해야 합니다"(전기 39).
 
암브로시오는 주님께 베드로의 눈물을 자신에게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눈물의 죄를 씻는 효력과 사람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영적 효과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이런 종류의 눈물을 ’좋은 눈물’이라고 불렀다. 그의 영향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지대하였다.
 
저술활동
 
암브로시오는 주교로서 사목활동에 여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위해 실천적이며 교육적인 목적으로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라틴교부 문헌 총서인 PL전집 14~17권에 수록되어 있고, 그 외에 CSEL, CCL과 SC 전집에 들어 있다. 성서에 대한 많은 주해서와 윤리-수덕에 관한 저서들과 교의신학적 저서들, 그리고 연설문, 서간과 찬미가들을 남겼다. 특히 치체로가 아들을 위해 쓴 저서 ’직무론’의 틀 안에 자신의 영적 아들들인 교구 사제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과 성직자의 직무를 담아서 완성한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은 라틴교회의 첫 윤리신학 총서로 꼽히는 작품이 되었다. 또한 ’찬미가’들을 지어서 신자들에게 부르게 한 공로로 암브로시오 주교는 서방교회의 성가작곡의 창시자로 불린다.
 
암브로시오의 정직하고 헌신적인 삶은 고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후대를 위해서는 정신세계에 기반을 닦아놓은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사도적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하던 암브로시오는 397년 4월 4일, 성주간 성토요일에 선종하여 그의 밀라노 주교좌 성당에 안치되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12월 7일에 지낸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엘리아와 같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제왕들과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꺼리지 않은’ 모범적인 주교였다(전기 47, 3).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27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6: 암브로시우스의 ‘죽음의 복됨’에서

 

죽음을 본받는 자

 

 

[본문]

사도는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복된 죽음이 있음을 압니다. 사도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생명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생명이 활동하려면 죽음이 먼저 작용해야 합니다. 죽음 후의 복된 생명이란 승리 후의 복된 생명, 곧 온갖 투쟁을 종식시키는 복된 생명을 말합니다.

 

영적인 법에 대항하는 육적인 법의 세력이 사라지고, 죽어야 할 육신 안에 모든 격정이 소멸되어 마침내 승리가 자리 하는 생명을 말합니다. 이러한 죽음은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 활동하고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활동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낡아지지만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지상 장막의 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열리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도는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권고합니다.

암브로시우스, ‘죽음의 복됨’(De bono mortis) 3장 9절

 


[해설]

암브로시우스(339∼397) 교부는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함께 서방 교회의 위대한 네 명의 교부에 속한다. 그의 생애에 관해 좀 더 알고자 한다면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을 참조하면 충분할 것이다.

 

‘죽음의 복됨’은 죽음에 관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강론이다. 불행하게도 이 강론이 언제 행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암브로시우스 교부가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적 용어들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 철학과 가톨릭 신학에 정통함을 반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의 복됨’에서 세 가지 종류의 죽음을 설명한다. 첫째, 영적인 죽음. 둘째, 신비적인 죽음. 셋째, 육적인 죽음. 영적인 죽음은 죄이며 육적인 죽음은 물리적인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란 신앙의 핵심을 깊이 묵상하면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앙인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에서 찾는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슬을 깨뜨리는 사람은 죽음을 본받는 사람이 됩니다. 이사야는 ‘온갖 불의의 사슬을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어라. 압박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려라’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죽음이 우리 인간 세계에 들어옴을 허락하신 것은 죄가 끝장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죽음의 복됨’ 3, 9)

 

암브로시우스 교부에 의하면,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려면 죽음을 본받아야 한다. 죽음을 본받는 것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그 사슬을 깨뜨리는 것이다. 위의 본문은 죽음을 본받는 삶을 죽음이 작용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 삶에 작용하는 죽음을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신비적인 죽음으로 간주하며 생명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 죽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신앙인은 삶의 가치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은총의 사순시기를 잘 보내기 위한 지혜를 찾고 있다. 현실 속의 불의를 외면하고 삶을 압박하는 멍에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부활의 희망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죽음을 본받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외면한고 있다면, 먼저 신비적인 죽음이 작용할 영적 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인해 인간 생명이 끝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신비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가 없어지고 부활을 통해 인간 생명이 영원히 남게 되도록 배려하셨기 때문이다.(참조: ‘죽음의 복됨’ 3, 9) 결국 신비적인 죽음은 우리의 시각을 이웃에게로 향하게 한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 6∼7) 아직도 사순시기가 그저 습관적인 전례의 일부분으로만 다가온다면,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을 천천히 묵상하면서 신비적인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 부활에로 다가 설 수 없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교부는 죽음을 징검다리에 비유한다.

 

“죽음이란 만인이 통과해야 할 하나의 징검다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의 영속적인 ‘건너감’이어야 합니다. 즉 부패에서 비 부패에로, 필멸에서 불멸에로, 혼돈에서 평온에로 ‘건너감’에 따라오는 축복을 생각하고 기꺼워해야 합니다. 실상 죽음이란 악의 매장이요, 덕의 일어남이 아니겠습니까?”(‘죽음의 복됨’ 3, 9)

 

그리스도의 죽음의 광채가 우리 육신 안에서 빛나도록,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이 죽음을 간절히 원해보자!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2일, 이성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7 :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에서
 
주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본문]

일반적으로 믿음을 요구하는 사람이 그 믿음을 북돋아주는 것이 윤리적인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천사 가브리엘이 신비를 전할 때, 동정 마리아에게 한 가지 예를 들음으로써 그 믿음이 북돋아지도록, 한 나이 많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잉태한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전갈을 불신했거나, 천사의 말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거나, 증거로 든 예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에 대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하려는 경건한 마음에 차서, 그리고 그 기쁨에 이끌려 급히 유다 산골마을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한 마리아가 높은 곳 말고 어디로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겠습니까? 성령의 은총은 느린 노력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부녀들이여! 여러분도 임신한 친척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할 근면함을 배우십시오. 전에는 가장 깊은 내면의 방에서 머물던 마리아를, 동정녀의 부끄러워함도 군중 앞에 나타나는 일에서 붙잡지 못했고, 산악의 험난함도 마리아의 열정을 저지하지 못했고, 여행의 먼 길도 마리아의 의무수행을 지연시키지 못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본분을 생각하면서, 손해는 생각지 않고,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성별을 생각지 않고, 급히 집을 떠나서 산골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루카 복음 주해’ 2장 19∼20절

 

 

[해설]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몇 가지 점을 함께 생각해 보자.

 

1) 주님은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당신의 구원사업의 계획을 알려주신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믿음을 도와주시고 북돋아 주시기 위해서 친척 엘리사벳이 주님이 베푸신 기적의 은혜로 아기,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사실을 알려주신다.

 

친척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갖도록 마음을 준비시켜 주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먼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도움을 주신 것을 언급한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은혜를 간직하도록 도움을 베푸는 주님이시다.

 

2) 동정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과 그 가족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는 방문이었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는 방문은 언제나 천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마리아의 방문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를 뛰놀게 만들었고, 엘리사벳의 입에서 찬미의 기도가 나오게 도와주었고, 마리아도 기쁨에 넘쳐 찬미의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처럼 은혜로운 방문은 여러 사람에게 기쁨과 축복을 안겨다 줌을 알 수 있다.

 

3) 성령께서는 지체함과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마리아는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분이시다.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길을 서둘렀다. 사실을 확인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라, 믿는 마음으로 주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찬양하러 길을 서두른다.

 

산위로 이끄심은 암브로시우스의 설명을 따르자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뜻한다.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거룩한 곳이며, 예수께서도 기도하시러 자주 산에 올라가셨다.

 

산에 오른다는 말은 암브로시우스 교부의 설명에 의하면, 주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심을 믿는 것,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여 낳으신 것을 믿는 것,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자가 되신 것을 믿는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산으로 올라감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천주의 모친 마리아는 믿음의 눈으로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신 은혜의 어머니가 되셨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9일, 장인산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청주교구 총대리)]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34. 교부편 (15) 암브로시오

 

 

암브로시오는 성직자와 신자, 비신자 등 모든 이들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성서주해서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단으로 갈라진 이들 화해시켜

학덕·성덕 갖췄지만 늘 겸손
주교로 추대된후 세례받기도

 

 

374년 밀라노, 거친 표정으로 성당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두 패로 갈려 서로를 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밀라노의 주교 아욱센시우스(Auxentius, ?~374)의 후임을 선출하기 위한 이 자리는 이미 커다란 소동과 어려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완고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전임 주교를 따르던 이들에 반대해 정통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은 일전을 결사할 태세였다. 바로 이 자리에 당시 밀라노에 관저를 둔 에밀리아 지방 총독 암브로시오가 공정한 주교 선출을 감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군중들에게 평화적인 방법과 대화로 화해를 추구하자고 권고하던 그의 목소리 사이로 한 아이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뽑자』고 소리쳤다. 순간 성당안은 정통파나 아리우스파를 막론하고 『암브로시오 주교』를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암브로시오는 당혹감 속에서 주교직을 사양했지만, 결국 세례를 받고 여드레 후인 374년 12월 7일 주교품을 받았다.


성인이자 밀라노의 주교로서,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인 암브로시오(Ambrosius
, 339~397)는 이로써 가장 완벽한 사목자의 전형으로서 자신의 주교 직무를 시작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의 생애는 자신이 남긴 저서들, 특히 서간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밀라노의 파울리노가 쓴 전기 「성 암브로시오의 생애」(Vita S. Ambrosii)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독일 서쪽 지역인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난 그는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갈리아 지방의 행정관이었던 부친의 사후, 가족들은 로마로 돌아왔고 거기서 암브로시오는 고등 교육을 받았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는 공직자의 길을 걸었고, 좋은 가문을 배경으로, 훌륭한 실력까지 겸비한 그의 출세는 탄탄대로였다. 처음에는 변호사로 있다가 밀라노의 총독이 됐다. 암브로시오가 주교가 된 사건이 바로 이때 발생했던 것이다.

 

암브로시오는 주교가 된 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에 나눠 주었다. 빼어난 학덕과 성덕을 함께 갖추고 있던 그는 주교가 된 후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다. 『학생도 되기 전에 스승이 되었구나, 배워야 할 내가 가르치게 되었구나』하며 주교로서 자신의 모자람을 고백한 그는 이후 사제 심플리치아노로부터 지도를 받아 성서공부에 몰두했다.

 

선배인 치프리아노, 자신이 교회의 사람으로 이끈 저 위대한 후배 아우구스티노와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오 역시 주교 직무를 수행하기에 앞서서 성서를 통해 양성된 사람이다. 특히 암브로시오의 수많은 주석 작품들은 책으로 쓰여지기 전에 이미 설교를 통해 태어난 것들이다.

 

그는 탁월한 강론가였다. 성서에 관한 해박한 지식, 여기에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심화시키고 더욱이 뜨거운 열정을 가미해 준비한 강론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이끌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그의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개종하는 은혜를 입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이단으로 갈라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성직자들과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냈다.

 

암브로시오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이 지난 후에 만들어진 밀라노의 한 모자이크는 그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작은 키에 여윈 몸매, 길고 갸름한 두상에 턱수염, 사색에 잠긴 표정, 권위 있는 검고 큰 눈, 절제된 열정. 그는 활동적이면서도 지적이고 명상적이면서도 타고난 연설가였다.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마찬가지로 거의 완벽한 사목자, 주교로서 알려진 인물이 바로 암브로시오 주교이다. 범상한 인물이었지만 고고한 귀족에 머물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의 변호자가 바로 그였다.

 

주교가 된 당시, 밀라노는 당시의 다른 여러 지역들이 그러했듯이 가난한 민중들은 세금과 부자들의 권세에 짓눌려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그는 이후에는 말씀과 행동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처럼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재화의 공정한 분배와 사유 재산의 권리와 한계에 대해 강하게 가르친 인물도 흔하지 않다.

 

『그대는 그대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함께 사용하라고 준 것인데, 그대는 그대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도둑질했다… 사람은 빵을 구하는데 그대의 말(馬)은 황금을 씹고 있다. 오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떨어질 단죄는 얼마나 무거운가!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대는 옥반지를 굴리고 또 굴리는구나. 그대 옥반지 하나면 모든 백성을 구하고도 남을 것인데…그대는 그대가 지니고 있는 재화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일 뿐인데, 그대는 황금을 땅속에 파묻고 있다. 차라리 황금을 팔아서 구원을 사라』(「나봇 이스라엘인」, De Nabuthe Jezraelita 중에서).

 

주교로서 그는 또한 성직자들의 자질에 늘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성직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을 위한 영적 지도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저술들은 많다. 성서 주해서와 윤리, 수덕에 관한 저서들, 그리고 교의신학적 저서들과 연설문, 서간, 찬미가들이 포함된다. 그리스어로 불멸, 혹은 「신적(神的)인」이라는 의미를 지닌 암브로시오는 오늘날 주교들이 따라야 할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10월 17일, 박영호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 교부들의 영성

 

 

5) 성 암브로시오(334-397)

 

플라톤 사상을 신앙에 접목

 

성인의 생애를 읽을 때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한층 더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인은 세례도 받기 전에 군중들로부터 주교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의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렇게 선출된 그는 그리스도교 생활에 있어서나 교회의 지도에 있어서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성인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34년 경 현재 독일의 트리예에서 출생한 그는 로마에서 귀족 교육을 받고 공직에 진출하여 에밀리아-리구리아 속주의 총독이 되어 수도 밀라노에 거주하였다. 374년 봄, 새로운 주교를 선출하던 날에 폭동을 예방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는데 주교 후보자들 편에서 환호하면서 모두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추대하였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던 것이다. 백성들의 요구에 주교직을 수락한 그는 공부하여 세례를 받고 주교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였다. 특히 그리스 전통을 학교로 삼아 오리게네스와 교회의 교리와 성서를 공부하였다.


또한 친히 강론 원고를 작성하고 친필로 책을 저술하였다. 동정녀들과 과부들에 관하여, 성령론, 아브라함, 진복팔단, 성사론, 성직자들의 의무에 관하여, 루가 복음 주석서, 헥사메론 등 수없이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특히 수사학에 뛰어났던 젊은 아우구스티노가 성인의 강론을 듣기 위해 성전에 갔다가 감동되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외에도 성인은 로마 제국의 동부 지방과 서부 지방의 그리스도교 영성을 중개하는 인물로서 필로,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저서를 번역하고 쉽게 풀어 설명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의 유산을 서방 교회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플라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용시킨 인물 이다. 위기에 처해있던 그 당시 백성의 생활을 건전한 그리스도교 생활로 인도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5) 성 암브로시우스
 
① 평신도에서 주교가 된 당대의 대 신학자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초대교회 교부들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낸 성인을 꼽으라면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 축일 12.7)를 들 수 있다.
 
340년 독일의 트리엘에서 태어난 성인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다. 두 형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직으로 진출했고, 암브로시우스는 가톨릭 신자인 재판소장(프로부스) 밑에서 일을 배워 법관의 길을 걸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죄인을 대할 때, 엄한 재판관으로서가 아니라 자애로 충만한 모습으로, 정의에 입각한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곧 큰 인기를 얻고 존경을 한 몸에 받게됐다. 결국에는 총독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이때, 암브로시우스에게 있어서 중대한 삶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374년 밀라노의 주교 아우첸시우스가 서거하자 그 후임 선출이 매우 혼란한 상황에 빠져들었다. 당시에는 아리우스 이단이 성행했는데, 그 교단의 교직자들이 가톨릭 주교의 임명을 방해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밀라노는 곧 폭동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암브로시우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격분한 군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시위 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군중들을 설득했다. 이때 한 아이가 외쳤다.
 
“암브로시우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님이 주교가 되어야 한다!”
 
소리를 들은 군중들은 마치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은 듯, 이구동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암브로시우스 주교님!”
 
당황한 암브로시우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무리한 요구는 그만두라며 군중을 진정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그는 세례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중들은 멈출 줄 몰랐다. 거듭 주교 취임을 요구하며, 점점 더 소란을 피웠다. 이에 암브로시우스는 친구 집으로 피신해 군중들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숨어있던 암브로시우스를 직접 찾아내 다시 주교직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암브로시우스가 얼마나 군중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세는 기울어졌다. 결국 인근 지역의 주교들과 밀라노 교구의 사제들도 암브로시우스에게 주교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에 성인은 어쩔 수 없이 주교직을 수락했다.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당연히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해선 자세히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신심도 남달랐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교리를 받은 그는 세례와 신품성사를 잇달아 받고, 374년 12월 7일 밀라노 주교직에 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암브로시우스다. 그는 주교직에 오르자마자, 모든 열정을 다해 직무에 임했다. 특히 기도, 교리연구, 자선사업에 전념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침묵을 지키며 끊임없이 단식을 실천했으며, 기도로 날을 보냈다. 특히 순교자들을 공경했으며, 신학에 대한 열정으로 학문에 힘썼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신학을 이야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대 신학자가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또한 신자들에게 교리에 대한 이해를 북돋우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주일에는 반드시 강론을 했다. 가는 곳마다 그의 가르침을 듣기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자선 실천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선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었다. 당연히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몰려왔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넓은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죄인에게는 깊은 애정과 친절로 대했으며, 주어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교도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성녀 모니카가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눈물로 청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안심하시오. 그런 눈물을 가진 어머니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적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후 암브로시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회개하고 훗날 위대한 가톨릭교회의 성인이 됐다.
 
하지만 영광은 고통을 전제로 한다. 암브로시우스 성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4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6) 성 암브로시우스
 
②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살아
 
 
서기 390년, 테살로니카에서 큰 일이 벌어졌다. 이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 및 황후의 초상을 흙탕물 속에 집어넣는 등 모욕한 것이다. 로마 황제는 격분했다. 그리고 곧 엄명을 내려 유죄, 무죄 분별없이 해당 지역 사람을 모두 처형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암브로시오는 크게 놀랐다. 황제의 극악한 행동을 바로잡아야 했다. 언제 또다시 백성들을 박해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성인은 황제에게 서한을 썼다. 통회와 보속과 고행을 권유했고, 통회하지 않을 경우 당분간 성당에 나올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황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감히 황제에게 일개 주교가 대들다니…. 주교와 황제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드디어 사고가 터진다. 황제는 예수부활대축일에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그때 주교는 성당 입구를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직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중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청컨대 이 길로 다시 궁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폐하는 성당에 올 수 없습니다. 회개하신 후 오십시오. 그리고 죄를 다시는 짓지 말아 주십시오.”
 
황제는 아직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 굴복할 마음이 없었다. 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음해 성탄대축일이 다가오자 마음이 흔들린다. 신자인 만큼 대축일 미사에 참례해야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성탄대축일에 다시 성당에 갔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성당 앞을 가로막고 섰다. 성인은 황제의 진정한 회개만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황제께서는 어찌해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시려 하십니까.”
 
그제서야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 회개한다고 말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의 통회의 마음을 읽고 성당 안으로 모시고, 성사를 집행했다. 이로써 로마에선 한층 하느님의 법이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법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동안 헌신하던 암브로시우스 주교에게도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죽음을 앞두고 한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말은 유명하다.
 
“오!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는지! 아!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치 마시고 저를 거절치 마옵소서.”
 
성인은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고 갈망했던 것이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다, 성 금요일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시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평생 동안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살던 성인에게 주어진 은총이었다. 397년 4월 3일, 57세의 나이였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삶을 보면, 중대한 전환점이 몇 곳 있다. 사법계에서, 행정가로, 다시 사도직의 길로 들어선 것이 그것이다. 성인은 재판소장, 즉 법조계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한 것이 28~32세 때까지로 추정된다. 지금의 변호사와 비슷한 일을 했다. 이후 그는 지역 총독으로 선출돼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지역의 주교가 선종하자, 그 자리를 물려 받는다.
 
정치인 암브로시우스가 갑자기 주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세례도 받지 않았고, 사제도 아니었다. 성인이 주교직을 거부하고 친구의 집에 숨어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군중들은 그를 찾아내 주교직에 강제로 추대한다. 평소 성인의 덕망이 참으로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덕행도 결국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결국 성인은 374년 34세가 되던 해에 세례성사를 받고 주교품까지 일사천리로 받는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위대함은 이때부터 더 빛을 발하게 된다. 그는 단순히 모범적인 정치인이자 행정가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영적 차원에서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다.
 
암브로시우스 성인 스스로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주교직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느님은 암브로시우스를 선택하셨고, 암브로시우스는 그 선택에 응답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제 그 응답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27) 성 암브로시우스
 
③ 순교자 공경하며 소외된 백성 위해 헌신
 
 
암브로시우스는 주교직에 오른 후, 본격적인 내면형성에 전념한다. 내면 형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의 뜻대로 형성될 수 있도록 마련하신 섭리를 깨닫고 수련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다양하다. 성경 공부와 순교자들에 대한 공부도 여기에 속한다. 기도생활, 묵상생활은 물론이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이제 이 모든 일에 전념하며 스스로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순교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내면형성은 내면 형성 그 자체로 그쳐선 안 된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상호형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면형성이 나와 이웃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서로에게 형성을 시켜주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내면형성은 완벽한 상호형성으로 저절로 이어진다. 상호형성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내면 형성 또한 안됐다고 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이제 감옥에 갇힌 죄인 등 소외된 백성들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 시점에 만난 분이 바로 모니카와 그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다. 당시 이단에 빠졌지만 뛰어난 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종이 된다.
 
교만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시킨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암브로시우스 성인은 거룩한 사람이었다. 거룩함만이 교만을 물리칠 수 있다. 암브로시우스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순교자들에게 푹 빠진 그가 죽음을 두려워 하겠는가. 그에게는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제까지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것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살 때다. 거리에 보니 행복 예식장이 있다. 행복예식장에서 결혼한다고 해서 행복해 지는가. 아니다. 쓰러져 가는 성당이라도, 성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결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한 행복은 교회의 성사 안에 있다. 황제는 성사의 행복을 원했고, 결국 암브로시우스 앞에서 회개하고 행복의 성사를 받게 된다.
 
암브로시우스가 이처럼 거룩함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성인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성인의 삶에는 늘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식을 많이 쌓게 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했고, 특히 주교가 될 때 어린아이를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렇게 하느님은 성인을 주교로 이끌었고, 더 나아가 당신과의 합치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다. 기도와 교리공부, 성경공부 등을 바탕으로 수련을 통한 내면 형성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셨다. 합치의 성향은 본질적으로 연민의 성향을 기르는 계기가 된다. 하느님과 합치하면 이웃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 결국 하느님은 암브로시우스 성인의 마음에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시어 소외된 이웃과 버림받은 이웃을 돌보는 상호형성의 길로 이끌었다. 연민은 또 더 나아가 정의로 연결된다. 이웃을 향한 연민은 이웃이 고통받는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확고함이 바로 황제와의 마찰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마찰은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하는 첫 사례로 기록됐다.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물러서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교회의 품위를 확고함과 완벽한 신앙으로 지켜낸 것이다.
 
우리가 암브로시우스 주교를 훌륭하다고 보는 것은 이래서다. 내면형성과 상호형성, 세계 형성의 완벽한 성취와 조화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의 덕, 분별의 덕, 합치의 덕, 연민의 덕, 사회정의 실현 등이 암브로시우스 성인이 이룬 위대한 모범이다. 물론 모든 것은 섭리다. 인간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러한 신적신비의 사랑으로 주어지는 은총과 섭리를 우리 각자가 어떻게 개발하고 가꾸어 나가는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8일]

 

 

[이달의 성인] 성 암브로시오(340-397)
 
윤 클레멘트 신부
 
 
이탈리아 밀라노의 주보성인인 그는 독일의 트리에에서 태어나는데, 교회 역사상으로 유일하게 세례를 받기 전에 주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로마에서 공부했고, 그가 밀라노의 주교가 될 당시에 북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리구리아 지방의 주지사였고, 밀라노는 로마제국의 중심도시였다. 당시 교회는 아리아니즘(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설)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교회에는 많은 세속적 힘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밀라노는 아리아니즘을 따르는 주교 아우센치우스가 있었는데, 그 주교가 죽고 나자, 그의 후임을 둘러싸고 가톨릭교회와 아리아니즘을 따르는 세력간에 혼돈과 소요가 있었다. 그때 암브로시오는 밀라노 대성당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주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다. 그 연설 도중 누군가가 “암브로시오를 주교로!” 하고 외치자, 곧 군중은 모두 그렇게 외치기 시작한다. 그는 두려움으로 숨으려다가 결국에는 군중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는 일주일 이내에 세례와 견진을 받은 후, 이어서 사제품과 주교서품을 받으니, 그날이 12월 7일이었다. 당시는 아직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때라서, 그렇게도 사제와 주교서품이 가능했던가보다. 우리 교회는 그의 축일을 그가 지상을 떠난 4월 4일이 아닌, 그의 주교서품 기념일인 12월 7일에 지낸다.
 
세례를 받고 주교가 된 후 그의 생활은 전적으로 변한다. 땅은 교회에, 돈은 가난한 이들에게 다 준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교부들과 성서를 열심히 공부하는데, 그는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심할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한다. 또한 그는 그를 만나거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최대의 시간을 내주지만, 그 어떤 외적인 일도 그의 내적인 시간보다 우선하지는 않았다. 로마제국의 전 행정가로서 그는 그 도시의 정치적인 일들에도 영향들을 주게 되는데, 그는 황제 그라치안에게 아리아니즘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해 주기를 요청하기도 한다. 한편 그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아우구스티노에게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387년 부활절 이브에 세례를 준다.
 
그와 그의 교구는 한때 아리아니즘을 신봉하는 황제 발레티안 치세에 어려움을 겪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신앙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과 설교는 굳세고 한결같았다. 그는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테살로니카에서 약 7천명의 군중을 학살한 사건 이후, 그가 회개와 고백성사와 보속을 하기 전에는 성체도 모실 수 없다고 강력하게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동정녀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탁월하였다.
 
그는 많은 책들을 쓰고 남겼는데, 그는 자신이 가르쳤던 것들보다도 어려웠던 시대에 거룩한 교회와 그 가르침에 대하여, 부지런히 돌보았던 사람으로 더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는 그가 평생 믿고 가르치며 지키려던 하늘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57세가 되던 해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성 금요일 날, 이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복된 영원의 길을 향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