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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무일도 ~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아침기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저녁기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끝기도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요한 1서 주해]에서
(Tract. 1,1.3: PL 35,1978.1980)

생명 자체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말씀을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육신이 되신 이 말씀께서 육신을 취하신 것은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였습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말할 때 표현하는 대로 말씀의 존재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방금 들은 서간의 말씀은 다음의 복음서 말씀으로 확증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에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손으로 만져 본 그리스도의 실제 몸이 아니고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은 덧붙여 말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지만 아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시고 당신을 보고 천상 빵으로 받아 모시는 천사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무엇을 또 말합니까? "마침내 사람들도 천사의 빵을 먹게 되었다."고 성서는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나타나심으로 영적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어 영혼이 치유되었습니다. 사실 말씀은 영적으로만 봅니다. 그러나 육신은 육신의 눈으로도 봅니다. 우리가 육신을 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씀으로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이 되시어 우리 마음을 고쳐 주심으로 말씀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복음 사가는 또 말합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라는 이 말을 좀더 명확히 말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사도들은 육신으로 현존하시는 주님 자신을 보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실제로 들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듣기는 했지만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직접 보고 들은 사도들보다 덜 복된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덜 복된 사람들이라면 복음사가는 다음 말씀을 덧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과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가는 다음 말씀으로 끝마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보냅니다." 충만한 기쁨은 바로 이 친교에, 이 사랑에 그리고 이 일치에 있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6. 사도와 성서저술가 (2) 사도 요한 

 

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겼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간 유일한 제자였다.

 

묵시록 통해 구원의 희망 제시

예수님이 가장 아꼈던 제자
초대교회 건설·선교에 매진

 

 

『에페소 교회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황금등경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신다』(요한묵시록 2,1)

 

다도해로 불리며 400여개의 섬들이 몰려 있는 터키 서부 지역의 에게해는 일찍이 트로이, 베르가모, 에페소 등 고대 도시들의 유적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이 지역에는 성서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등경, 곧 일곱 개의 교회가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인구 300만명의 에게해 최대 도시 이즈마르에서 80㎞ 가량 떨어진 곳에 로마의 소아시아 행정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지였던 고대도시 에페소가 숨쉬고 있다.

 

이 에페소에서 예수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사도 요한이 공동체를 세우고 주교들을 임명했으며 복음서와 서간들을 저술했다. 요한 사도는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묵시록에 기록된 일곱 개의 지도적인 교회들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서 사망한 뒤 4세기경부터 주요 순례지 중의 하나가 됐으며 6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해 요한의 무덤터에 6개의 돔과 130m 길이의 십자가 모형으로 된 거대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폼페이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몇 개의 건물벽과 기둥, 받침대 등만이 남아있을 뿐이어서 그 흔적을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요한 사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바오로 등 초대 교회 중요 인물들의 삶이 배어 있기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제베대오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이다. 전승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제4복음서와 묵시록, 3편의 편지를 쓴 저자이다.

 

부친의 업을 따라 겐네사렛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요한에게 어느날 예수가 찾아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마태 4, 21~22)

 

예수의 제자가 된 후 요한은 친형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예수가 가장 가까이 두는 제자가 됐다.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내내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섬겼으며 요한복음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에도 감히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21, 7)라고 표현할 정도로 그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극진했다.

 

예수는 요한과 야고보 두 형제를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고 불렀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예수가 사마리아의 한 동네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 54)라고 분개할 만큼 격렬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인 듯하다.

 

그 뜨거운 사랑으로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간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하여 요한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로부터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 27)라는 당부를 받아 성모 마리아를 위탁받고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가 부활해 승천하신 뒤, 요한은 베드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초대 교회의 건설과 복음 선포에 힘썼다. 바오로 사도는 요한이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중추적 인물로 49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후 요한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며 파트모스(Patmos)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묵시록을 저술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요한이 예루살렘을 떠나 에페소로 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돼 유배되기 전까지 에페소에 머물러 있었고 유배 후에는 다시 돌아와서 서간과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요한이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는 묵시록은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이며 유일한 묵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묵시록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영광과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에 큰 관심을 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미 역사 안에 와있지만 그 공동체의 승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따라서 묵시록은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학서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미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공동체 역시 결국은 승리를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결국 묵시록을 통해 요한 사도는 교회를 위한 희망을 보여주며 그것은 곧 역사를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현시로 제시하는 것이다.

 

요한 사도를 일러 혹자는 사랑의 사도로 부른다. 신약성서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구절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사도 요한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 요한복음, 요한의 편지 세 권, 그리고 요한묵시록이다. 이 5편에 나오는 사랑이 모두 92번으로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랑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복음서에서도 요한복음은 총 39번이나 나와 마태오 12번, 마르코 6번, 루가 13번과 비교해봐도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자기 중심적이고 급하고 격렬한 성격에,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모친을 통해 높은 직책을 부탁할 정도로 개인적 야심에 빠져있기도 했던 요한 사도가 이처럼 사랑의 사도로 변모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은 결과일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25일, 박영호 기자]

 

 

[교회상식 교리상식] 12 사도에 대해 알고 싶어요 (6) 요한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큰(大)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복음사가이며 신약성경 서간 3편과 묵시록의 저자이기도 한 요한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본 요한
 
요한은 성경의 12사도 명단 가운데서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형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시몬. 큰야고보에 이어 세 번째로(마르 3,17), 마태오와 루카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에 이어 네 번째로(마태 10,2; 루카 6,14) 등장합니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다음 두 번째로 언급됩니다(사도 1,13). 이 사실은 12사도 가운데서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큰야고보에 대한 설명에서도(979호, 7월 20일자) 언급했습니다만, 요한은 12사도의 으뜸인 시몬 베드로 및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신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마르 5,37 ; 루카 9,28; 마태 26,37). 예수님 지시에 따라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러 간 제자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였습니다(루카 22,8).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께서 12사도 가운데서 갈릴래아 호숫가의 고기잡이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와 요한을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당신이 세우실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신다는 공적 차원을 띤다고 할 수 있겠지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다거나(마태 16,18-19),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신신당부하시는 말씀에서(요한 21,15-19)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에 대한 각별함은 좀더 개인적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후 만찬 때에 요한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은 것이나(요한 13,2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신 것에서(요한 19,27)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부활 후에도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수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고(요한 20,5),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이야기해 준 제자도 요한이었습니다(요한 21,7).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요한'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밝힐 뿐입니다. 이는 요한의 겸손함과 함께 예수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신했는지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전면에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다가 불구자를 고쳐주고(사도 3,1-10),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또 최고의회 앞에서는 담대하게 설교를 합니다(사도 4,1-22). 나아가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를 통해 그곳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리도록 합니다(사도 8,14-25). 바오로 사도는 이런 요한을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부르지요(갈라 2,9).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요한의 생애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중에 묵시록을 썼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묵시 1,9).
 
 
전승에서 본 요한
 
2~3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요한은 생애 후반기에 소아시아의 에페소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저술한 곳도 에페소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에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유배되기 앞서 로마에서 체포돼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요한은 에페소에서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제위 98~117) 치세인 100년에 사망했습니다. 요한은 죽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형 큰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반면에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복음사가로서 요한을 나타내는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요한은 또 뱀이 있는 성작으로도 상징되는데 요한이 독이 든 잔을 받고 축복을 하자 독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