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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성무일도 ~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끝기도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 
 
바실리오는 330년 카파도치아 지방체사레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덕행에서 특출했던 그는 은둔 생활을 시작했고 370년 체사레아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리우스 이단들과 투쟁했다. 훌륭한 저서들 특히 수도 규칙을 썼는데 오늘날까지 동방 교회의 많은 수도자들이 이 수도 규칙을 따르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뛰어났다. 379년 1월1일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오는 같은 해인 330년 나지안즈 근처에서 태어났다. 학문을 습득하고자 여러 곳을 여행했다. 자기 동료인 바실리오를 따라 은둔 생활을 하다가 사제와 주교로 서품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교구에서 발생한 분열 때문에 고향인 나지안즈로 돌아가 그 곳에서 389년 또는 390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웅변에 탁월하여 신학자(theologus)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강론에서
(Oratio 43, in laudem Basilii Magni, 15. 16-17. 19-21: PG 36,514-523)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가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강의 지류처럼 같은 조국의 샘으로부터 학문을 추구하고자 서로 다른 행로로 떠나갔으나, 흡사 둘이서 약속이나 한 듯 하느님의 안배에 따라 아테네가 우리 두 사람을 상봉케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나는 나의 친구인 우대한 바실리오의 무게 있는 행동과 말하는 데 있어서의 슬기와 완숙함을 보고 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를 모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권고해 주었습니다. 실은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한 명성을 이미 들어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과로 아테네에 처음 유학 오는 학생들이 보통 인정 받지 못하는 처지와는 달리 바실리오만은 이러한 통례를 넘어 특별한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우정의 서곡이고 상호간의 친밀성을 불붙여 준 계기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두 사람은 상호간의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서로의 친애감을 고백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같은 지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각자가 서로에게 모든 것이 되어, 같은 지붕 아래서 살게 되고, 식탁을 함께 하며, 마음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 둘의 눈은 한 목적에 고정되고 우리의 친애감은 더욱더 깊어져 힘차게 자라났습니다.
 
우리 둘 다 학문을 추구하고자 하는 같은 소망으로 이끌려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은 대개 학생들간에 질투심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지만 우리 사이에는 질투심이 결코 없었고 경쟁을 좋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경쟁은 누가 일등을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경쟁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상대방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육신 안에 하나의 영혼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으면 안되지만 우리는 각자가 서로 안에 있고 또 서로가 함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과업과 갈망은 덕을 쌓고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며 현세의 삶을 떠나기 전에도 여기를 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는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생활과 행동을 하느님의 가르침의 지도에 따라 이끌어 나가면서 동시에 덕행에 대한 사랑을 서로 분발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이 좀 지나치다고 볼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신은 서로에게 있어 선악을 식별하는 규범과 척도였습니다.
 
자기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귀족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얻은 칭호들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에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28. 교부편 (9) 대 바실리오

 

 

교회 사회활동 선구적 개척

구빈기관 세워 노인 등 돌봐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

 

 

4대 공의회로 일컫는 니체아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 에페소공의회(431), 칼체돈공의회(451)는 당시 교회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것은 대중의 대량 입교를 통해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한편 아리우스 이단, 단성론 등 여러 이단들에 대한 논쟁이 들끓었는데 각 공의회들은 그같은 이단들에 대항해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정 공포했기 때문이다.

 

325년 개최된 니체아공의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천주 성부의 첫 피조물이며 성부는 성자를 통해 성령을 창조하였다는 위계적인 성삼론을 폈던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포했다. 그의 의견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교 기본 교리인 성삼론과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단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이단은 황제와 정치권의 비호를 받으며 세미 아니아니즘 등으로 변형돼 계속해서 교회 안의 뜨거운 감자로 골치거리로 남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가빠도기아의 3대 교부로 꼽히는 대(大) 바실리오(329∼379)는 아리우스 이단을 거슬러 니체아공의회 결정 사항을 옹호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신학자다. 동방교회 4대 교부중 첫 번째로 꼽히는 그는 이름 앞에 「대」(Magnus)명칭이 붙을 만큼 학자로서의 업적과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바실리오는 가빠도기아 체사레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처음 아버지에게서 수사학을 배우다가 당시 일반 지식인들처럼 체사레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등에서 수학했으며 체사레아에 정착한 뒤 수사학 교사가 되었다.

 

교육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356년 세례를 받고 「복음 정신에 따라 하느님께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 이집트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사막을 다니며 수도승들을 만나는 수행 생활을 했다.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청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네오 체사리아의 이리스 강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아테네에서 만났던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가 찾아와 수도 생활에 합류하게 된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와 함께 가빠도기아 3대 교부중 한명으로 꼽힌다. 바실리오는 여기서 오리제네스 저서에 심취, 그레고리오와 함께 오리제네스의 작품들에서 여러 구절을 뽑아 사화집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공동으로 편찬했다.

 

체사레아 대주교 에우세비오의 설득에 따라 365년 사제품을 받은 바실리오는 이후 신자들이 복음 정신에 따라 생활할 수 있는 지침으로 80개 항목의 「도덕집」(Moralia)을 펴내기도 했다.

 

370년 에우세비오가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대주교직에 오른 바실리오는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목, 신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바실리오는 교회 사회 활동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깊은 가난 속에 제국이 부과하는 높은 세금에 휘둘리는 민중들을 보며 또 고리대금업이 활개를 칠만큼 황폐해진 사회 현실에 직면하여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것」, 「모든 인격은 고귀하다는 것」, 「탐욕과 축재 제한을 위해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 발전시켰다.

 

「바실리아데」라고 부르는 구빈 기관을 만들어 노인들과 환자들을 돌보는 시스템을 갖춘 것은 혁신적이었다. 이러한 바실리오의 노력에 대해 나지안츠의 그레고리오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평했다. 「복음의 내적 충동으로 움직인 최초의 사회활동가 가운데 한사람」이라는 바실리오의 면모가 드러난다.

 

니체아공의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업적외에도 심각한 분열 현상을 겪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교회 일치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로마 교회와의 일치 없이는 교회의 진정한 일치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신념으로 교황과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바실리오는 수도생활 전례 면에서도 탁월한 유산을 남겼다. 「성령론」 서두에서 새로운 영광송을 제시했으며 서간 207편에서는 새로운 전례 음악을 도입했던 그는 수도원들의 전례기도를 개혁했다. 또 「1시경」과 「끝기도」를 시간 전례에 처음 시도했다. 그의 전례는 수도원을 통해 동방 교회 및 이탈리아까지 널리 전파됐고 987년에는 블라드미르 대공에 의해 러시아 정교회에도 도입됐다. 비잔틴 예식을 지키는 교회에서는 아직도 바실리오 전례가 사순절과 연중 대축일급 전례에 사용되고 있다.

 

바실리오는 한편 자신의 수도생활 경험을 통해 「바실리오 규칙서」를 내놓음으로써 수도승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조직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이것은 바실리오가 사제 주교 서품 후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수도자들이 질문했던 내용과 응답을 모아놓은 것으로 「도덕집」, 「대수덕집」, 「소수덕집」 등이 있다. 모아진 응답들은 3차례에 걸쳐 편집됐고 편집 때마다 새로운 응답들이 첨가돼 여러 모음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소수덕집에는 수녀들에 관해 언급된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수도회 역사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수녀들에 관한 규정으로 볼 수 있다. 바실리오 규칙서는 복음적 성격과 형제들의 상호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수도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규칙서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동방교회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 「수도생활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8일, 이주연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 교부들의 영성

 

 

2) 카빠도키아의 교부들


(1) 성 바실리오(330~379)

 

카빠도키아라고 하면 소아시아 동부에 있던 고대 국가 (현재 터어키의 중부 지역)로서 후에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된 지역을 말하는데, 여기서 출생한 세 교부들 바실리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닛사의 그레고리오는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이단을 마지막 으로 격퇴시킨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리스 철학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교를 지식인들에게 전하려고 하였고 이단을 격퇴시킴으로써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수하였다. 그들이 남겨놓은 불멸의 영성생활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1) 성 바실리오(330-379)는 체사레아에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부친 덕분에 그 당시 카빠도키아에서 가장 부유한 계층의 문화에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수사학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할머니 마끄리나와 부모와 누이 마끄리나, 동생들인 니싸의 그레고리오와 세바스떼의 베드로는 모두 교회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젊을 때 콘스탄티노플과 아테네에서 공부할 때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를 만나 절친한 친구이자 선의의 경쟁자로 지내 다가 함께 세례를 받고(27세)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영향을 받아 속세를 버리고 수행생활에 힘쓰게 되었다. 그는 금욕생활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고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여행하면서 얼마동안 수도생활을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32세에 사제가 되고 40세에 체사레아의 주교가 될 때 까지 독수자로 살았다. 열심히 사목에 힘쓰다가 9년 후에 귀천 하였다.

 

바실리오는 위대한 목자와 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가정적인 배경과 수행생활 그리고 교회 행정과 올바른 가르침 등으로 인해 동서방 교회로부터 훌륭한 영적 지도자와 덕망있는 분 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 당시와 사후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이렇게 존경해 왔으므로 민심이 천심이 아니겠는가? 그는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을 이어 받아 자신의 실질적 교회론 을 결합시켰다. 그는 니체아 공의회의 전통과 교회 공동체를 옹호 하면서 나타난 아타나시오의 태도에 오리게네스의 학구적 태도와 신심을 결합시켰고 아리우스 이단을 반대하였다. 그의 중심 사상은 성령의 역할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사목적이고 전례적 관습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형성할 것을 주장하면서 구원의 경륜(oeconomia)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조사해봄으로써 그분의 신적 본성을 구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성령은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신적이므로 피조물들을 성화시키신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단죄하였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들을 성화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전례는 규범과 의식을 통해서, 성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록된 신구약의 책들을 통해서 영성생활의 직접적 근원이 되므로 이를 잘 이용해야 한다. 그는 이런 식으로 풍부한 교회론과 성령론을 강조하여 아타나시오의 강생적 영성을 발전시켜나갔다.

 

그의 수행생활은 교회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 들을 위한 규칙을 만들었고 오리게네스의 글을 모아 필로칼리아 (Philokalia)란 선집을 만들었다. 그 당시 세바스테의 유스따티우스의 제자들이 복음적 포기의 요구들을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받아 들여 교회에 방해가 될 정도로 하나의 큰 단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바실리오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복음의 정신과 반대되는 그들의 동기를 파악한 후 복음의 정신을 인문주의적 문화와 연결 시켜 지혜와 고결한 인품과 교화를 선호하였다. 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동정생활이나 청빈생활을 본질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시켰다. 그는 자선사업에 힘쓰는 목자였다. 나환자들을 직접 돌보고 병원을 방문하여 애덕 실천의 모범을 남겼다.

 

[가톨릭신문, 2000년 10월 15일, 전달수 신부(안동교구 다인본당)]

 

교부들의 가르침: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
사제직 사임, 은수자 삶 살아
 
광주가톨릭대 교수 노성기 신부
 
 
오늘은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를 만나러 터키의 카파도키아로 여행을 떠나자.
 
그레고리우스는 고대 저술가 가운데 유일하게 '신학자'라는 존칭을 받았던 교부이다. 326년경에 카파도키아 근처 나지안즈에서 태어난 그레고리우스는 여러 도시에서(카파도키아의 체사레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공부를 했다. 그는 유학시절에 만난 카파도키아의 대(大) 바실리우스와 평생 우정을 지켜나갔다. 공부를 마치고 나지안즈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의 영향을 받아 한 동안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했다(356?).
 
그레고리우스는 361년 성탄절에 아버지의 권유로 강제적으로 사제품을 받는다. 그의 아버지는 나지안즈의 주교였다. 서품식이 끝나자, 그레고리우스는 집을 뛰쳐나갔다가 다음해 부활절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은 아직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제직무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그의 고민을 들어보자.
 
"내 손을 깨끗이 씻는 거룩한 작업을 하기 전에… 내 눈이 오직 창조주 하느님만을 경배하는 데 익숙해지기 전에, 내 귀가 천상 학교에서 들려오는 지혜의 말씀들에 귀 기울이며 듣는 데 익숙해지기 전에, 내 입이 오직 하느님의 신비만을 선포하는 데에 익숙해지기 전에… 내 혀가 천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기 전에… 내가 감히 어떻게 그분께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으며, 사제라는 이름과 직분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도피의 변명서" = "연설" II, 95).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끝까지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연설" II, 98). 진정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선, 사제 자신이 먼저 거룩하고 합당한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당시 아직 그런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사제직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영혼을 돌보는 '하느님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종'이다. 예술 중의 예술이요, 학문 중의 학문인 사제직은 그 어떤 예술보다도 더 숭고하고, 육체를 치료해주는 의학보다도 더 월등하다. 따라서 "사제는 인간의 영혼들에 날개를 달아 주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만일 그들의 영혼 안에 각인된 하느님의 모상이 있다면 그것을 보존해주고, 또 만일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지켜 주고, 또 흠집이 났다면 치료해 주는 운명의 소유자이다"("연설" II, 22).
 
이 같은 사제직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사제는 항상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남을 정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화시키십시오.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지혜의 가르침을 배우십시오. 빛을 밝히기 전에, 먼저 빛이 되십시오. 남을 하느님께 인도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가까워지십시오. 남을 성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성화시키십시오"("연설" II, 71). 그가 말하는 완벽한 사제상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그레고리우스가 왜 사제품을 받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 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 주교가 그레고리우스를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했지만(372), 그는 끝내 주교직을 수락하지 않고 나즈안즈에서 아버지(주교)의 일을 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374), 이제 더 이상 그를 사제직에 붙잡아둘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사제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은수생활로 되돌아가면서 노래했다. "성령의 바람에 나의 양 날개를 펼치리. 그분이 원하는 곳이 그 어디든지, 그분이 원하는 모습이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그 누구도 다른 길로 가도록 나를 재촉할 수 없으리"("연설" 10,4~5).
 
사실 그는 거룩한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을 생각하는 은수생활에 대한 갈망과 사제가 되어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권유 사이에서 갈등했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속으로, 고독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일체의 육체적인 것들을 피하여 오직 영적인 것에만 마음을 쏟아 모든 흠과 결점을 정화시켜 하느님을 닮고 가장 순결한 영적인 빛을 비추고 싶어했다.
 
한편 발렌스 황제가 죽자,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소규모 니체아파 공동체가 그레고리우스를 찾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어달라고 청했다(379). 당시 콘스탄티노플에는 데모필루스 총대주교가 이끄는 아리우스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신자 집에 머물며 교회의 평화를 위해 약 3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데모필루스에게 콘스탄티노플를 떠나라고 명령하고(380),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에서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인정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데모필루스를 지지하던 아리우스파 주교들이 공의회에 늦게 도착하여, 그레고리우스가 사시마의 주교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는 것은 위법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몇 주 후에 그레고리우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공의회 도중에 신자들과 공의회 교부들 앞에서 유명한 '고별사'("연설" 42)를 남기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직을 사임했다(381). 요나가 풍랑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졌던 것처럼, 자신도 교회의 평화를 위해 총대주교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리우스파를 거슬러서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자신의 결백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했던 일에 대한 상급으로 자신을 다시 은수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보내달라고 신자들에게 간청했다. 이제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의 사목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영원히 자신의 신자로 남아 있을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의 유산을 지켜나가라고 당부했다. 그의 고별사를 듣고서, 어떤 신자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또 어떤 신자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한 마디로 은수생활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가득 찬 삶이었다. 사목자로서 살기보다는 수도자로서 살고 싶어했던 그는 사제직과 주교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은수자의 삶을 살았던 훌륭한 교부였다.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6일]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37]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전집에서

 

 

묘비명 삼 수

 

본문

 

① 아버지 묘비명

 

선한 목자 나 그레고리우스는 큰 양떼를 기꺼이 양육했다. 나는 거룩한 그루터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가장으로서 고결한 아내와 세 아이를 거느렸다. 잘 따르는 양떼를 돌보고 지상과 천상의 연수를 채운 다음 이승을 떠났다.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8권에서)

 

② 어머니 묘비명

 

어느날 논나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저 높은 데서 하느님이 “오너라”하고 부르셨다. 논나는 기꺼이 육신을 떠났다. 한 손은 (봉헌)상을 붙잡았으며, 또 한 손은 간구하는 모습이었는데 “오, 그리스도 임금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것 같았다.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8권에서)

 

③ 자기 묘비명

 

오, 그리스도 임금님, 왜 저를 육신 그물에 가두셨나이까? 왜 저를 적의에 찬 삶에 내맡기셨나이까? 나는 매우 경건한 아버지와 편협하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나는 어머니의 간구로 햇빛을 보았다. 어머니는 기도하여 얻은 어린 아들을 하느님께 바쳤다. 나는 꿈에 환시를 보고 독신생활을 열망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을 이룩하신 주인공은 그리스도시다.

 

그 후에 나는 격랑에 시달렸다. 나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표적이 되었다.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나는 성직자들과 싸웠는데, 그들 가운데 친구는 없고 만나느니 불신이었다. 죄악의 소굴을 멀리하면서 나는 내 아이들을 잃었다.

 

이게 그레고리우스의 삶이다. 나의 앞날은 나를 지어내신 그리스도의 배려에 맡긴다. 이글을 비석에 새겨라. (미뉴, 그리스 교부 전집, 37권에서)

 

 

“동정녀꿈 꾼후 독신 결심”

 

해설


① 아버지 묘비명 해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6년경~390년경)의 아버지도 그레고리우스로서(275년경~374년) 45년 동안 소읍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재직했다. 그는 쉰 살까지 유다교 이단종파인 ‘지극히 높은 신의 경배자들’ 모임에 나갔는데, 이를 두고 “나는 거룩한 그루터기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이라고 했다. 그는 덕성스런 아내 논나의 염원에 따라 325년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부부는 한 동안 자녀가 없다가 늦게 장녀 고르고니아, 장남 고레고리우스, 차남 카이사리우스(369년 사망)를 낳아서 잘 길렀다. 이 시대에는 성직자들이 결혼 생활, 독신생활을 각자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결혼생활을 택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100세를 살았으므로 지상의 연수를 다 채웠다고 하고,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 동안 사목했으므로 천상의 연수를 다 채웠다고 한다.

 

② 어머니 묘비명 해설

 

그레고리우스 1세의 동갑내기 아내 논나도 남편처럼 천수를 누리고 374년에 선종했다. 논나는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여 늦게 득남하자 장남을 하느님께 바치기로 작정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서전에서 이를 두고, 어머니는 마치 안나 같고 자기는 마치 사무엘 같다고 했다. 돌계집 노파 안나가 실로 성전에서 간구하여 사무엘을 낳고 그를 실로 성전에 바친 고사를 상기했던 것이다(1사무 1장).

 

어느날 논나는 성당에서 기도하다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기쁜 모습으로 선종했다. 그 때 “한 손은 (봉헌)상을 붙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교우들이 이 상 위에 생필품을 바치면 교회에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런 상을 가리킨다.

 

그레고리우스가 어머니를 칭송하는 데는 끝이 없다. 어머니를 두고 “몸은 여자 몸이었지만 성품은 남자 이상 이었다”고 하는데, 논나의 대범한 성품을 지적한 것 같다. 논나는 물심양면으로 교우들을 돌보는 큰 손이었다. 동서방 교회는 다 같이 논나를 성녀로 추대했다. 다복하게 살고서도 성녀가 된 이는 매우 드물다. 축일은 8월 5일. 이승에서도 복 많이 받고 저승에서도 복 듬뿍 받고 싶으면 논나를 주보성녀로 택하라.

 

③ 자기 묘비명 해설

 

우선 아들 그레고리우스의 생애 윤곽부터 그려보자. 그레고리우스의 부모는 신심에 더해서 교육열이 강하고 경제적 여유도 있어서 장남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그레고리우스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리아, 팔레스티나의 카이사리아, 에집트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아테네 학당에서 수사학 교육을 받았다. 아테네에선 친구 바실리우스와 합숙하고 함께 공부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356년(30세) 고향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361년 말 또는 362년 초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사제품을 받았다. 자서전에서 “나는 등에에 쏘인 황소마냥 상심을 달래려고 폰투스로 가서” 바실리우스와 함께 한 동안 수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370년 바실리우스는 카파도키아 전체를 다스리는 대주교가 되었는데, 이태 후 372년 발렌스 황제가 카파도키아 지방을 행정적으로 양분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 행정도 영향을 받아,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우스는 북부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었고, 티아나의 안티무스는 남부 카파도키아의 대주교가 되어 서로 패권을 다투었다. 바실리우스는 자기를 지지하는 주교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372년 절친한 친구 그레고리우스를 북·남 카파도키아 경계선에 있는 소읍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에 그레고리우스는 분개한 나머지 사시마에 부임하지 않고 자조적인 말을 내뱉었다. “어제까지는 우리가 사자였는데, 오늘은 내가 원숭이 꼴이 되었구나.”

 

374년 부모가 귀천하자 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오늘날 터키 지중해변 항구 실리프케)로 가서 은둔생활을 했다. 당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아리우스 이단, 아폴리나리스 이단 등이 득세하여 전통교회는 소수로 전락했다. 387년 아리우스 이단을 지지하던 발렌스 황제가 죽고, 379년 동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는 380년 11월 24일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면서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5~7월)는 그레고리우스의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추인하고 그를 공의회 의장으로 뽑았다. 그러나 왕년에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된 바 있었던 그가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된 것은 위법이라는 논란이 일자, 그는 공의회 주교들과 교우들 앞에서 그 유명한 고별사(연설 42)를 하고 나지안주스로 물러갔다. 383년 그의 사촌 에울라리우스가 나지안주스 주교로 취임하기까지 임시로 나지안주스 주교좌 일을 보살핀 다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족 영지 아리안주스에서 칩거하다가 390년경에 귀천했다. 생애 약전을 염두에 두고 그 자신의 묘비명을 감상할 차례다. 그는 자다가 꿈에 환시를 보고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정결과 절제라는 이름들을 지닌 두 동정녀가 나타나서 그레고리우스에게 독신을 권했다고 한다. “죄악의 소굴을 멀리하면서 나는 내 아이들을 잃었다”는 말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도중에, 콘스탄티노플 주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떠나다 보니, 수도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다정다감한 성품이라 공부하고 글줄이나 썼으면 좋았을 터인데, 어쩌다 사제·주교·대주교가 되어 제대로 일도 못하고 마음의 상처만 입었다. 성인 주교의 축일은 동방교회에선 1월 25일, 서방교회에선 1월 2일.

 

[정양모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성공회대 초빙교수), 가톨릭신문, 2005년 12월 18일]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29. 교부편 (10)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그림설명)

주교 논쟁이 일자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는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그레고리오의 총 44개의 연설문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아 신앙고백을 해설하고, 삼위 일체 교리를 변호한 5개의 신학적 연설문이다.

 

삼위일체 교리 심오하게 설명

상류층이지만 금욕생활 선택
인문주의자며 시인 저술 왕성

 

 

4세기 이후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 세 명을 일러 이른바 「가빠도기아 3교부」라 일컫는다. 이들은 바로 대 바실리오와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오, 그리고 바실리오와 절친한 우정을 나눈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이다.

 

이들 세 명의 교부들은 그들이 교회사 안에서 보여준 특유의 위치와 중요성 때문에 이러한 칭호를 얻었고, 그들의 집안은 이미 수세대에 걸쳐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생활에 적극 참여한 뿌리 깊은 가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당시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회 지도층 출신으로 이에 걸맞는 빼어난 교육을 받았고 상류층 인사들이 출세하기 위해 밟아온 수사학, 변호사,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따르면서 고독한 금욕 생활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출신과 교육에 바탕을 둔 정치적 지도력과 교회에서의 지도력에 따라 주교로 임명됐고 교회 역사 안에 걸출한 발자취를 남겼던 것이다.

 

바실리오와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는 특별히 서로 물과 불처럼 다른 개성을 갖고 있었지만 깊은 우정을 나누며 바실리오는 탁월한 교회 정치가로, 그레고리오는 수사학자와 신학자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이 두 사람은 아타나시오,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비오 5세 교황의 성무일도에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로 선언되기도 했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신의 편지, 자서전적인 시 「자기 자신에 관하여」(De se ipso)와 바실리오에게 보낸 편지 외에 「수다」(Suda, 사본 끝에 실린 사서류)를 통한 전승, 예로니모의 위인전 「De viris illustribus」 등이 있다.

그의 아버지 그레고리오 1세가 45년 동안 주교로서 활동했던 소도시 나치안츠, 또는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리안츠의 가족 영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서 읽기를 배웠고 가빠도기아와 팔레스티나의 가리사리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는 아테네에서 저명한 학자들을 사사했다.

 

그는 특히 356년까지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바실리오와 교분을 쌓았고 장래의 황제인 율리아누스와 만났다. 이후 358년에 나치안츠로 돌아와 세례를 받은 그는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하며 바실리오와 함께 폰투스(Pontus) 지방의 이리스 강가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오리게네스 작품 가운데 교의에 관한 선집인 「필로칼리아」(Philokalia)를 함께 펴냈다.

 

그레고리오는 자신의 일을 돕길 원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361년 혹은 그 이듬해에 아버지에게서 사제로 서품됐다. 하지만 이를 원하지 않은 그는 집을 나가 다음 부활절이 돼 돌아와서 비로소 첫 강론을 하고, 바로 이 유명한 첫 강론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황제 발센스가 가빠도기아 지방을 분할했을 때, 바실리오는 축소된 영향력의 확대를 위해서 그레고리오를 「사시마」(Sasima)의 주교로 임명하지만 그레고리오는 이를 거부하고 부친이 세상을 떠난 374년 나치안츠 교구를 맡아 일하게 된다. 하지만 또 다시 이듬해 이사우리아 지방의 셀레우키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나서 고독한 금욕의 생활을 계속한다.

 

379년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그레고리오를 찾아와 자기들 교구의 총대주교가 되어 줄 것을 청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아리우스주의로 인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발렌스 황제의 죽음으로 자유를 얻었다.

 

그레고리오는 이곳에서 5편의 「신학적 연설」(Orationes theologicae)을 저술한 바 이는 진정한 고전의 품격을 지닌 것으로, 정통 신앙에 입각해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관해 정의를 내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오는 381년 3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도시의 주교로 공식 인정받았으나,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그는 공의회 도중에 고별 연설을 하고는 아리안즈에 있는 가족 소유지로 물러남으로써 논란을 잠재웠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온전히 저술에만 몰두했다.

 

그레고리오의 저작 중 그 정수가 담긴 것은 총 44개의 연설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니체아 신앙고백을 해설하고 에우노미오파와 성령 신성 부인론자들을 반박하며 삼위 일체 교리를 변호한 5개의 신학적 연설문이다. 이러한 연설문 안에서 그는 특유의 심오하고도 엄정한 표현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

 

『시작이 없으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부이시다. 시작 없이 나신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자이시다. 나지 않고 발출하시는 분, 혹은 오시는 분의 고유한 이름은 성령이시다』(「신학적 연설」 30, 19).

 

한편 다양한 면모를 지닌 그레고리오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요 시인이기도 했다. 특히 산문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시적 리듬은 만년의 시 문학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가 저술한 대부분의 시는 생애 말기에 쓰여졌다. 그 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De vita sua)로서, 출생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활동까지 포괄하는, 그의 생애에 대한 중요한 문헌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8월 15일, 박영호 기자]

 

그리스도교 영성사 - 교부들의 영성

 

 

2) 가빠도기아의 교부들

 

(2)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오(약 329~390)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이자 동방 교회에서는 "그 신학자" 로 불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데모스테네스" (기원 전 4세기 경 아테네에서 유명했던 웅변가이자 정치가였던 데모스테네스의 명성이었다)라고 불리면서 존경받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는 바실리오 성인과 친구였다. 그는 말씀 선포자로서도 열심히 사제 직을 수행하였으나 침묵과 관상생활 및 금욕과 단식 등에 더 매력을 느껴 실천하였고 설교가와 시인으로 많은 영향을 준 뛰어난 목자였다.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지닌 그는 400편 이상의 시를 저술하여 역사와 교의 및 자신의 염원들을 자서전식으로 표현하였고 많은 부분은 다분히 헬레니즘적 신비주의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의 자세를 지양한다. 따라서 그 당시 사조를 지배 하던 그리스 철학을 근절시켜버리지 않았고 흡수하였다. 그리스 철학 에서 제시한 영원한 진리들과 가치들은 그리스도교에 전승되어 진지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역사의 외적 현실은 바뀌었으나 그 철학은 유스티노와 그레고리오 성인들과 같은 그리스도 교 사상가들에 의해 보호되고 승화되었던 것이다. 성인의 작품들이 후대의 위인들, 에라스무스와 멜랑크톤, 기본, 뉴만 등에게 영향을 준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필가였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부분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과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자신의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끼친 공헌은 삼위일체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노력한 점과 성령을 "하느님" 이라고 과감하게 표현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바실리오 성인은 이렇게까지 표현하지는 않았다). 좀 더 발전하여 그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언급하면서 세 위격(성부 성자 성령)과 본질(한 분 하느님)을 구분하고 교회의 정통 신앙을 보존 하기 위하여 공적 가르침이었던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강조하였 으며 철학을 연구하고 관상생활에 뛰어난 사제들을 우대하였다. 그 당시 공격을 받고 있던 아타나시오 성인을 지지하여 그가 강조한 성서 연구를 강조하였고 성직자들을 위한 성서 훈련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