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제1저녁기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 학자 기념
1225년경 아퀴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먼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그 다음 나폴리에서 공부했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파리와 쾰른에서 성 대 알베르또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들을 남겼고, 많은 이들을 탁월하게 가르쳤다,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369년 1월 28일 툴르즈로 그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해 왔다.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겠습니까? 네, 극히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러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로 우리 행위의 모형으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죄의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닥쳐온 온갖 악을 치료할 치료제를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난은 우리의 모범으로서도 이에 못지 않게 유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전체 생활을 완전히 정향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하신 것을 멸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것을 지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멸시하는 모범을 찾고 있다면, "왕 중의 왕"이시고 "주님 중의 주님"이신 분을 따르십시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옷 벗기우고 조롱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매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침내는 쓸개와 초를 마시셨습니다.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 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
토마스는 이 가운데 산 세베리노 백작가의 로게로와 결혼한 누나 테오도라에게 특히 친근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며 토마스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도 누나를 방문한 적이 있음이 전기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는 가문 가운데 로카세카 계열을 타고났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붙여진 ‘데 아퀴노(De Aquino)’라는 칭호는 일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아퀴노 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출신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토마스는 박학하고 품위있는 귀족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백작보다는 낮은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 레지날도는 1246년 카파치오에서 황제를 암살하려던 음모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신앙과 정치가 매우 혼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을 도와 황제를 정복시킴으로써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려는 열정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퀴노 가문에서는 레지날도가 신앙과 교회의 이름으로 죽은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토마스의 생애와 저술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 세계가 말려들고 있었던 서글픈 무질서 상태에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응답했다.
토마스가 5살 되었을 때 그의 생활환경은 산성에서 부모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뀐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의 토마스는 성서, 교부들의 저작, 라틴어 문법, 기초수학, 음악이론 등을 배운 것으로 작가들은 적고 있다. 실제 토마스는 라틴어에서 매우 미숙하였는데 라틴어 교육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토마스의 사색과 탐구에 근원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침착했으며 말수 적은 소년으로 혼자 들어박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많은 시간을 독서에 보낸 탓임에 틀림없다. 토마스가 어린 시절 마을에서 떨어진 산꼭대기 수도원으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그가 그 후에 전생애를 통해 지켜온 생활습관을 형성한 것이, 그의 학자 또는 연구자로서의 생활을 여러가지 의미에서 좁고 편중된 것으로 만들었다는 해석도 성립할 것이다. 그래서 몬테카시노의 주위에 펼쳐진 산들의 풍경은 토마스 안에 자라나고 있던 영적인 소망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추진시키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고 본다. 작가 발츠(A. Walz)는 “산, 고독, 그리고 수도원의 침묵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도와 관상에로 이끌었으며,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최고의 것으로 상승해야 할 것을 배우고 이렇게 하여 남들보다 신속하게 신의 현존을 알아본다는 것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은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나폴리의 대학으로 보내 학업을 계속케 하도록 부모에게 권장하였다고 하였지만 당시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점령되는 등 전화에 휘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토마스의 신변 안전을 염려한 부모에 의해 로카세카 성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토마스가 도미니꼬회에 입회할 결심을 굳힌 것은 같은 나폴리 출신의 요하네스 데 산 줄리아노 신부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기작가 토코는 적고 있다(나폴리에는 1231년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이 이미 발족되었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침묵 속에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에 끌려있던 토마스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도미니꼬회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첫째로 토마스에게는 (그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권위와 명망에 대한 집착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자기가 택하려 하고 있는 길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적인 권위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친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또 몬테카시노는 당시 명백히 토마스가 바라고 있는 수도생활을 보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약 20년 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은 젊은 날의 토마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수도회의 다른 수도회에 대한 차이는 무엇보다 첫째로 목적면에서 파악되고 둘째로는 실천 면에서 파악된다. 만약 목적이 동일하다면 수도회 우월성은 2차적으로 실천의 양에서가 아니라 의도된 목적에 대한 실천의 대응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그 까닭은 빛을 발하기만 하는 것보다도 조명하는 쪽이 더 큰 것이듯이 관상만 하는 것보다도 관상한 것을 남에게 전하는 쪽이 보다 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신학대전 제 188문 제 6항).
그러나 토마스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토마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됨으로써 일족의 위세와 번영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의 아퀴노가의 아들이 희사에 의존하면서 활동하는 탁발 수도회에 몸을 바치는 것은 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테오도라가 나폴리의 도미니꼬 수도원으로 달려갔을 때 토마스는 가족의 반대를 피하려고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을 따라 볼로냐를 경유하여 파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토마스의 형 레지날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토마스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형 레지날도는 1244년 5월 초순에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에서 처음엔 설득으로 나중엔 강제로 토마스를 붙잡아 로카세카로 끌고 왔다. 토마스는 로카세카 성의 한 방에서 약 1년 동안 감금당하게 된다. 그 가운데 젊은 여자를 고용하여 유혹하려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245년 여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도미니꼬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년)를 통해 토마스의 해방을 종용하고 있던 터라 가족은 토마스의 해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토마스는 나폴리 수도원에 복귀하여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알프스를 넘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것은 통상 연구에의 전념과 겸손의 표시로 풀이되기도 하고 스승 알베르토와 자기 생각의 차이를 의식한 토마스가 스승의 견해에 대한 찬성을 보류하고 스스로의 견해를 쉽게 표명하지 않았던 신중성의 표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1250년(1251년) 사제로 서품된 토마스는 도미니꼬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으로부터 파리대학 신학교수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의뢰받은 알베르토에 의해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1252년 가을 토마스를 맞이한 파리대학 신학과는 환영이나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멀었고, 오히려 적의에 차 있었다. 반 도미니꼬회 운동의 배경에는 교구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수단과 수도회(시토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꼬회)간의 반목의 역사가 있다. 교구 성직자 교수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수도회 교수단들이 대학의 규칙이나 관행보다는 수도회 방침을 우선시키는 경향(파업불참)과 교황이 파리대학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하는 것에 봉사와 협력의 자세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이러한 상황은 급기야 수도회(도미니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대해 강좌수 제한 규정, 선서를 거부하는 교수들(수도회 소속)을 교수단으로부터 추방한다는 결정까지 나왔다. 특히 도미니꼬회에 대한 공격은 언론이나 문서로 그치지 않았고, 도미니꼬회 수사들은 교수 성직자들(생타무르기욤, 1272년 사망)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먹을 것을 구하러 수도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국왕 루이 9세가 수도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한 때는 경비병을 주둔시켰을 정도였다.
1252년 토마스는 성서학 강사로 임명되어 이사야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토마스의 강의내용은 성서에 관한 상세한 주석을 위한 입문 또는 준비로써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때로는 중요한 개념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하는 일도 있었으나 오로지 성서의 자구에 관한 간단한 해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적인 현시에 관한 강의는 훗날 ‘진리론’과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고찰되고 있다. 1253년 명제론집 강사에 임명되어 1256년까지 강의를 맡았다. 토마스는 강의 때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여 해결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해결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논증을 창출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탄하고 면학에의 열의를 불태웠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그러나 파리대학에서의 수도회 교수단(특히 탁발 수도회)에 대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들은 탁발 수도회에게 “육체노동은 않고 희사에 의존하는 것은 복음에 따라 완전한 생활 목표를 한다는 주장과 어울리지 않으며 사회 골치거리로 전락한다”며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1256년 10월 기욤이 쓴 ‘최근의 위험에 관하여’가 로마에서 단죄되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되고 반대파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토마스와 보나벤투라를 교수 공동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259년 6월 도미니꼬회의 방침에 따라 교수직을 물려준 토마스는 파리와 쾰른의 중간에 있는 발렌시안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에 출석토록 지시받았다. 그 이유는 도미니꼬회 내부의 신학, 철학의 연구교육에 관한 근본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기록을 보면 도미니꼬회가 학문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도미니꼬회의 대학에 파견되어야 할 학생의 자격, 교수의 선정에 관한 엄격한 조건, 교수는 그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잡무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임이 규정되어있다. 신학자 사이에서는 세속의 학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불신이 보였던 당시의 전반적 상황에 비추건대, 이는 하나의 영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알베르토와 토마스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1260년 9월에 나폴리에서 열린 로마 관구의 회의에 출석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파리대학 교수를 그만둔 후 로마의 교황청 소재지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의 강사를 지내고, 교황청을 이전시킴에 따라 거처를 옮기며 교황청 신학고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는 1260년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열린 관구회의에 출석할 의무가 주어졌다. 토마스는 그 생애에 걸쳐 스승 알베르토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으나 수도회 고문이 된 그에게는 여러 사람들(교황, 도미니꼬회 총장, 군주나 영주에서부터 동료, 기사)로부터 많은 강의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체축일을 제정할 것을 포고함에 있어서 토마스에게 당일 미사의 전례를 포함하여 성무일도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토마스는 1265년 아나니에서 열린 도미니꼬회 로마 관구 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신학대학을 산타 사비나 수도원에 발족시켰다. 이 학교는 신학 외에 철학부문을 갖춘 종합적인 대학이 아니라 교수 토마스를 중심으로 로마 관구의 각 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회자들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연수센터였다. ‘신학대전’의 제 1부를 다 썼을 즈음 토마스의 이탈리아 체제는 끝나고, 약 5년간에 걸쳐 제 2부는 파리에서, 다시 미완으로 끝난 제 3부는 나폴리에서 쓰게 된다. 애초에 초학자를 위한 신학입문서로서 쓰여진 신학대전은 16-17세기 이후는 엄청난 주석서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주석가들에 의해 신학대전의 기본사상이 이미 해명된 것이 아님은 오늘날 토마스 학자들 사이에 학파가 형성되어 있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1272년 봄, 파리를 떠난 토마스는 피렌체에 도착한다. 6월 12일부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 로마 관구 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관구 회의는 토마스에게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도록 일임했다. 당시 로마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비해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의 도움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활기 넘치고 있었으므로, 토마스는 나폴리를 대학 설립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1272년 9월부터 나폴리 대학에 인접한 도미니꼬 수도원에서 강의를 개시했다. (토마스 시성을 위한 조사회에서의 전한 바에 의하면) 나폴리의 거의 모든 시민이 토마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운집했다고 한다.
1273년 부활절 끝무렵, 토마스는 다음 해 5월 7일부터 리옹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1271-1276)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았다. 이 제 14차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와의 재결합이였기 때문에 토마스는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저작한 ‘그리스인의 오류를 반박함’을 지참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와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아픈 몸으로 여행을 나서다가 길로 나와 있던 나무가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거의 기절하여 일어설 수가 없었다. 토마스 일행은 그대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몬테카시노, 아퀴노를 지나 로카세카 성에 들른 후 북쪽으로 향했다. 이 때 토마스는 쇠약과 피로가 심해져 병이 악화되고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토마스는 세속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라지 않아 이전부터 초대를 받고 있었던 거기에서 가까운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 수도원에는 토마스가 그 생애의 마지막 10여일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객실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구약성서의 ‘아가’ 강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사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토마스는 일요일에 대수도원장(테오바르도) 손으로부터 성체를 영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1274년 3월 7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토마스는 숨을 거두었다.
II.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제2부(제1편) 인간의 궁극 목적 및 지복, 인간적 행위, 정념, 습관과 덕, 악덕과 죄, 법, 은총.
제2부(제2편) 대신덕(신덕, 망덕, 애덕), 윤리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예언, 관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 직무와 신분.
제3부 그리스도, 성사(제 90문제, 고해 성사의 중도까지).
‘신학대전’은 모두 512개의 문제를 포함하는데, 주목할 말한 것은 토마스 자신이 ‘윤리적인 사항’을 논하는 부분이라 하고 있는 제 2부가 303개의 문제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가 제 3부를 예정대로 썼다고 해도, 양적으로 ‘신학대전’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중세 고딕 대성당이 오늘날도 늘 새로운 찬미와 경이의 원천이듯이 ‘신학대전’도 허다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 첫째로, 믿음으로 영혼은 하느님과 맺어지게 됩니다. 그 까닭은 믿음으로 영혼은 말하자면 하느님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 신앙으로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을 아는 것이므로, 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이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요한 17, 3)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셋째로, 믿음은 현재의 생활을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착하게 살려면 착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넷째로, 믿음으로 우리는 유혹에 이길 수 있기 대문입니다. 히브리서(11, 33)에도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고 합니다. 유혹은 악마, ‘세속’이나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마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지지하지 않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배제됩니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관과 인식관은 중세 스콜라 학의 다양한 입장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러한 입장이 근대, 현대 사상으로 받아들여짐에 있어서, 그 이전의 오랜 지적․정신적 전통을 뛰어난 방법으로 종합한 토마스의 사상은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와 같은 실수에서 출발한 근대 사상의 답보 상태에 직면하여,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의 토마스 사상에 눈길을 돌리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참고문헌
- 와이스헤이플, OP.,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생애, 작품, 사상)”, 성바오로 출판사 1998.
- 이나가키 료오스케, “토마스 아퀴나스”, 도서출판 새남, 1995.
- 요셉 피퍼,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분도출판사, 1995.
- 코플스톤 F.C., “토마스 아퀴나스”, 성바오로 출판사, 1993.
* Aquinas : www.aquinas-multimedia.com
* Theology on line : www.op.org/aquinas/theology.htm
* Theological library : www.mcgill.pvt.k12.al.us/jerryd/cathmob.htm
* Religious studies : www.religion.ucsb.edu/resource/othrdept.html
* The Eckhart Society : http://www.op.org/eckhart
* Rosary Center : http://teleport.com/~rosary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7. 신학 철학자편 (4) 성 토마스 아퀴나스(상)
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독창적 그리스도교 철학 발전시켜”
진리 연구와 옹호 위해 일생 바치며 ‘신학대전’ ‘대이교도 대전’등 저술
「스콜라 철학의 왕」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로 존칭되는 중세 유럽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로 표현된다. 연구와 저술과 교수 생활로 일관하면서 진리 연구와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깊은 영성으로 충만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이교도 대전」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등 방대한 저작을 통해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꼽힌다.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서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 사상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한편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을 확립함으로써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 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으로 남아있다.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열네살 되던 1239년 교황 영토와 황제 영토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나폴리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 연구를 통해 복음 전파를 목표로 삼는 탁발수도회 도미니코회를 접하게 되고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 배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 선포를 향한 열정으로 풀이된다. 신학대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듯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리를 거쳐 알베르토 막뉴스 지도아래 쾰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토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기 철학과 신학의 도구로 받아들였다.
이후 알베르토의 추천으로 파리대학 교수 후보자로 추천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2년부터 파리에서 성서와 룸베르투스의 명제집을 강의했고 1254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아 1259년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신학과 교수의 주요 직무는 성서의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와 설교였는데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 등이 당시 저술한 대표적 저서다.
관례에 따른 3년간의 교수 직무를 마친후 이탈리아로 돌아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약 10년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코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 활동에 전념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사상을 두드러지게 성숙시킬 수 있었던 때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므스 번역에 힘입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했으며 교황 울바노 4세의 요청으로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스교부 및 교의사의 본격적 연구를 시도했다.
「대이교도 대전」, 정기토론집 「신의 능력에 대하여」, 4대 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 제1부 등이 당시의 대표적 저작이다.
1269년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됐고 작은형제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등 3개 파와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2부, 몇가지 정기 주석과 정기 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 주석 등을 펴냈다.
1272년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대학 설립을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저서와 병행하면서 「신학대전」 제3부를 연이어 저술했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니콜라오의 축일 미사후 돌연 집필 중단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대해 자신은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단 선언의 대상 되기도
1274년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이끌고 리옹공의회로 향하던 중 병세가 악화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에 있는 포사누바 시토수도원에서 눈을 감았다.
사후 그의 가르침은 동시대에 상당한 새로움으로 다가왔으나 학설 일부는 1277년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이단 선언 대상이 되기도 했다.
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26일, 이주연 기자][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8. 신학·철학자편 (4) 성 토마스 아퀴나스(하)
신학대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7년이라는 시간을 저작에 바쳤으면서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완의 책이면서도 신학대전은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신학대전으로 중세학문 집대성”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근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도구로 행동”
-창조의 자율성, 고유 활동들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피조물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인도하고,
-인간 인격의 수용력, 독립성, 책임감으로 인도하며,
-창조에서 드러나고 예수에 의해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깊이로 이끌고,
-삶과 활동의 절정으로, 그리고 행복이라는 그들의 목표로 인도하며,
-삼위일체의 지혜와 사랑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원리를 부여받은 인류에게로 인도한다.
이상은 학자들이 밝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특성들이다.
그의 사상은 어떠한 「새로움」에 압도적 인상을 받았던 동 시대인들에 의해 일부가 이단으로 취급받기도 했으나 결국 아우구스티노를 기원으로 하는 「교부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신 플라톤철학」 「이슬람」 「유다사상」 등의 풍부한 유산을 계승하면서 「아퀴나스적 총체」로 불리는 독창적 사상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그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이것은 한편 「학」(學)으로서의 신학 정립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을 얘기할 때 많은 부분을 언급할 수 있지만 학자들은 『무엇보다 토마스는 마지막까지 대학의 위대한 스승으로 남는다』고 들려준다.
즉 토마스는 「가르친다」는 것을 가장 숭고한 정신적 삶의 형태라 보았고 진정한 스승은 신입생 입장에서 생각하고 학생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진리를 이끌어 낸다고 여겼다. 「신학대전」을 비롯한 그의 역작들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l)은 토마스가 7년이라는 시간을 저작에 바쳤으면서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완의 책이면서도 신학대전은 「대작」(opus magnum)으로 평가받는다.
3천 개의 논항을 포함하고 있는 신학대전은 흔히 고딕대성당으로 비유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부분이 상호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한점을 향해 수렴한다는 공통적인 근본 구조 때문이다.
신 창조론, 윤리론, 그리스도 성사 등 전 3부로 구성된 신학대전은 신학적 관점에서 「중세 학문의 집대성」이라 불리며 내용은 1) 존재로서의 하느님, 2) 선으로서의 하느님, 3) 구원받기 위하여, 강생한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타락한 상태의 인류가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술 양식도 독특한데 중세 대학 특유의 「토론」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를테면 2669개 항목 모두 「…인가?」라는 의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적 근원으로서 「필연적 존재」로 보았다.
하느님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분이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라는 것이다. 이밖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이러 저러한 분이 「될 수 없다」는 것 뿐 이라고 밝혔다.
또 「영원성」이란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하느님의 전능이란 당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발생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했다.
피조물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주장했는데 그러한 의견은 신학 안에서의 인간 이성의 위치,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전능, 정치 사회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결정하는 주요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토마스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자율적이라고 밝혔고 창조주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피조물이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라는 사고를 폈다. 즉 자유로운 행동들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자유란 하느님과의 어떤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하느님 능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곧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구별들을 함께 초월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으로 주장했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동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피조물을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에 필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육체로 하여금 인간 육체의 작용을 하는 인간 육체를 만드는 일 그 이상의 일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를 초월하면서, 또 그러한 활동들의 원리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체가 되더라도 영혼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며 부활이라는 계시 교리가 없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은 자의 소생이란 말할 수 없다」는 바를 명백히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0일, 이주연 기자]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진말) 성 토마스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귀 옆의 비둘기는 성령의 속삭임을 표현하고 있다.
중세 하면 우리에게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아마도 「암흑기」란 말일 것이다. 이런 오해는 중세시기의 모든 문화와 학문이 신 중심적, 교회 중심적이었던 것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반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사상이란 없다.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근대 서구적 사상도 200~300년에 걸친 총체적인 사회변화였다. 이는 근대의 뿌리가 찬란한 중세 문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 후 고려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새로운 지배 사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왕조 찬탈을 위한 당연한 명분이지만 그렇다고 고려불상의 미려함과 청자의 우아함을 부인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중세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는 서양다운 서양을 형성하는 시기로 이미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한 인물을 통해 중세를 관통하고 근대를 여는 사상을 볼수 있으니 그가 바로 보편적이고 천사적인 교회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생 애
토마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 마을 인근의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던 토마스는 5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봉헌자로 보내졌다. 열 네 살이 되던 1239년 교황영토와 황제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결정할 운명적인 두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회를 만나게 된다. 나폴리는 시칠리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동서방의 경계지역이자 전투지였다. 따라서 국경지역의 특성상 그리스나 아랍 등의 외래문화가 상존해 있었다. 여기에 나폴리 대학은 프레드리히 2세에 의해 세워진 순수 국립대학으로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어느정도 비켜나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공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을 글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 아래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배우게 된다. 또 나폴리에는 1231년부터 도미니코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19살이 되던 해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를 선택한 것은 진리선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귀족이었던 그의 가문은 토마스가 구걸승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가족을 피해 파리로 가는 도중 형제들에게 납치돼 아버지의 성에 감금된다. 1년 후 풀려난 토마스는 파리대학으로 가 알베르토 마뉴스의 지도아래 1250년까지 5년간 공부하고 알베르토가 쾰른에 수도원 대학을 세우기 위해 갈 때 동행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편으로 알베르토에게 강의를 들었다. 1252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한 알베르토는 토마스를 파리대학에 보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함께 파리대학교 교수가 됐다. 이때 성서학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하며 명제집을 간결히 정리하고 논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원리를 도입한 신학을 전개했다.
1259년 이탈리아로 파견된 토마스는 같은 수도회 소속으로 희랍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던 뫼르베케 빌헬름을 알게된다. 그가 번역해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그리스어를 잘모르던 토마스의 철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흔넷이 되던 1269년 토마스는 다시 수도회에 의해 프란치스코회와의 학문적 대립이 첨예해진 파리대학교로 가게 됐다. 신앙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와 이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노선을 추구하던 토마스는 이 시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술을 하게되고 방대한 신학대전 2부도 이때 씌여진다. 1272년 로마로 되돌아온 토마스는 나폴리에 수도원 대학을 설립하라는 명을 받고 나폴리로 갔다가 1274년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리옹으로 가던 중 1274년 3월 7일 선종했다.
사 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받아들여 구체적인 사물에서 사고를 시작했다. 결국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경험적 사물들에서 출발해 그 존재가 무엇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함으로써 모든 존재사물의 근거로서의 최고 존재 곧 하느님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사물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자체」에 참여(participatio)하고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 설명을 교회용어로 풀면 창조가 된다. 그리고 이 창조는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의 원리인 존재자체에 대한 탐구를 창조론과 연결시킴으로써 토마스는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섰다.
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창조된 모든 사물은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에게로 되돌아가려는 근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구원이다. 창조가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것처럼 구원도 사물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라 이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토마스가 쓴 명제집 주해서에 따르면 『피조물이 그들의 제일원천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은 「일종의 윤회」와 같은 것이며 여기서 모든 사물은 태초에 그들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바로 그곳을 목적으로 삼아 되돌아간다』고 했다.
이처럼 토마스는 사물의 세계에서 출발해 신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토마스는 인간의 행복을 『신을 직관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토마스의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선종하기 얼마전인 1273년 12월 6일 미사 중 신비 체험을 한 이후 더 이상 저술을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자신의 친구요 비서였던 레지날드에게 『내가 바라본 그것과 비교한다면 이제껏 내가 저술한 모든 것이 지푸라기와 같다』고 대답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5일]
1261년의 일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대 최고의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 주요 사상들은 곧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특히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간의 경계를 허문, 하느님 섭리에 의한 위대한 보화들이다. 이제 그의 영성에 대해 묵상해 보자. 하느님께서 그의 삶 안에서 어떻게 형성의 원리를 섭리하셨고, 토마스 자신도 또한 그 형성의 원리를 어떻게 실현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성이란 세상 만물을 당신을 향해 형성되도록 초대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포함한다.
사람은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부유한 사람도, 명예와 지위가 높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가슴 철렁철렁 내려 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위기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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