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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학자 기념일 성무일도 ~

 

1월 28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제1저녁기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 학자 기념

 

1225년경 아퀴노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먼저 몬테 카시노 수도원에서, 그 다음 나폴리에서 공부했다,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여 파리와 쾰른에서 성 대 알베르또의 지도하에 학업을 마쳤다. 철학과 신학에 관한 위대한 저서들을 남겼고, 많은 이들을 탁월하게 가르쳤다, 1274년 4월 7일 시토회의 포사누오바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1369년 1월 28일 툴르즈로 그 유해가 옮겨졌고 그때부터 이날을 성인의 축일로 기념해 왔다.

 


아퀴노의 성 토마스 사제의 [강의록]에서
(Collatio 6 super "Credo in Deum")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겠습니까? 네, 극히 필요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러했습니다. 첫째로 죄를 기워 갚는 치료제로서, 둘째로 우리 행위의 모형으로서 필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죄의 치료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닥쳐온 온갖 악을 치료할 치료제를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난은 우리의 모범으로서도 이에 못지 않게 유익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전체 생활을 완전히 정향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완덕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멸시하신 것을 멸시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것을 지향하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는 온갖 덕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복음서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당하는 곤란이 어떤 것이라 해도 그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인내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 상에서는 그것을 더욱 위대하게 드러내 줍니다. 가장 위대한 인내는 두 가지 경우에서 나타납니다. 즉, 큰 어려움을 인내로이 참을 때나 또한 피할 수 있지만 피하지 않은 어려움을 견딜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다음의 성서 말씀대로 그것을 인내로써 견디어 내셨습니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면서 위협하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인내심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스도는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치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여러분이 겸손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바라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재판을 받다 죽임당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순종의 모범을 찾고 있다면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을 따르십시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 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것을 멸시하는 모범을 찾고 있다면, "왕 중의 왕"이시고 "주님 중의 주님"이신 분을 따르십시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지만"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옷 벗기우고 조롱당하시고 침뱉음을 당하셨으며 매맞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마침내는 쓸개와 초를 마시셨습니다.


옷이나 재물에 애착심을 두지 마십시오. "그들은 주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명예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조롱당하시고 매맞으셨습니다. 명예직을 구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예수께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었습니다." 쾌락을 탐하지 마십시오. "목마를 제 그들은 주님께 마실 초를 주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생애와 사상 
 
I. 토마스의 생애
 
1. 출생
 
토마스의 출생지와 출생년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가 사망한 해의 나이에 관한 초기의 전기 작가들의 증언,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에 들어간 나이로부터의 역산 등으로 인해 그가 1224년부터 1226년 사이에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태어난 장소는 그에 관한 자료의 상세한 검토 결과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지점인 아퀴노의 마을 근처에 로카세카(Roccasecca 마른바위 : 몬테카시노의 아빠스인 만소네가 994년 축조)에 축조된 산성이었다. 성주인 그의 아버지 란돌포는 시칠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령이라는 두 세력이 격돌하는 지점에 있는 영지를 지켜온 무장이었고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출신의 귀부인으로서 1243년경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 1255년경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에 아퀴노가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토마스가 유년생활을 함께 했다고 생각되는 형제, 자매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조금밖에 없다. 아버지 란돌포는 먼저 세상을 뜬 아내와의 사이에 몇 명의 아이를 두었으며 테오도라와의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남자 4명(또는 7명), 여자 5명으로 토마스는 막내아들이다. 큰 누나(장녀)는 베네딕도회의 수녀원장이 되고 그 밑의 누나 두 사람과 누이 한 사람은 각기 백작의 가문에 속하는 귀족과 결혼하였다.

토마스는 이 가운데 산 세베리노 백작가의 로게로와 결혼한 누나 테오도라에게 특히 친근감을 갖고 있었던 듯하며 토마스가 사망하기 몇 개월 전에도 누나를 방문한 적이 있음이 전기작가들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는 가문 가운데 로카세카 계열을 타고났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붙여진 ‘데 아퀴노(De Aquino)’라는 칭호는 일부 역사가들이 주장하듯 아퀴노 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출신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토마스는 박학하고 품위있는 귀족에 속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백작보다는 낮은 지위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형 레지날도는 1246년 카파치오에서 황제를 암살하려던 음모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명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신앙과 정치가 매우 혼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을 도와 황제를 정복시킴으로써 개인적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려는 열정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퀴노 가문에서는 레지날도가 신앙과 교회의 이름으로 죽은 순교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토마스의 생애와 저술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 세계가 말려들고 있었던 서글픈 무질서 상태에 한편으로는 이론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응답했다.
 
 
2. 성장배경
 
로카세카 산성의 분위기는 전란의 거친 분위기와 귀족 생활의 우아함이 뒤섞여 있던 것으로 보인다. 날마다 무기소리와 말발굽 소리의 울림들, 동시에 눈부신 복장의 기사들의 마장 시합, 당당한 기마행렬, 음유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 강력한 성주들의 지원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이탈리아 노래 등의 색채풍부하고 활기찬 전경은 토마스의 혼에 깊이 새겨졌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5살난 어린이와 같이 순결했다’(토마스의 동료 레지날도가 시성조사에서 증언)는 것은 로카세카의 지리적, 시대적 환경이 만들어준 결과라고 본다. 토마스가 술과 노래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고 후에 그와 수도회를 공격하는 반대파에 대해 당당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시절 그의 주변환경의 영향이 컸으리라 본다.

토마스가 5살 되었을 때 그의 생활환경은 산성에서 부모에 의해 수도원으로 바뀐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의 토마스는 성서, 교부들의 저작, 라틴어 문법, 기초수학, 음악이론 등을 배운 것으로 작가들은 적고 있다. 실제 토마스는 라틴어에서 매우 미숙하였는데 라틴어 교육의 결함이라기 보다는 토마스의 사색과 탐구에 근원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침착했으며 말수 적은 소년으로 혼자 들어박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많은 시간을 독서에 보낸 탓임에 틀림없다. 토마스가 어린 시절 마을에서 떨어진 산꼭대기 수도원으로 보내어져 그곳에서 그가 그 후에 전생애를 통해 지켜온 생활습관을 형성한 것이, 그의 학자 또는 연구자로서의 생활을 여러가지 의미에서 좁고 편중된 것으로 만들었다는 해석도 성립할 것이다. 그래서 몬테카시노의 주위에 펼쳐진 산들의 풍경은 토마스 안에 자라나고 있던 영적인 소망을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추진시키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고 본다. 작가 발츠(A. Walz)는 “산, 고독, 그리고 수도원의 침묵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도와 관상에로 이끌었으며,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최고의 것으로 상승해야 할 것을 배우고 이렇게 하여 남들보다 신속하게 신의 현존을 알아본다는 것을 배웠다”고 적고 있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은 토마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나폴리의 대학으로 보내 학업을 계속케 하도록 부모에게 권장하였다고 하였지만 당시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점령되는 등 전화에 휘말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토마스의 신변 안전을 염려한 부모에 의해 로카세카 성으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3. 도미니꼬회 입회
 
1239년 가을 나폴리 대학에 진학한 토마스는 인문과에서 여러 가지 자유학예(Artes Liberalis)를 공부하였는데 이는 수사학, 논리학 등이 주된 내용들이었다. 나폴리에서는, 토마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일과 삶에 결정적인 방향을 주는 두 개의 만남이 일어났다. 하나는 그가 철학을 배우기 시작한 발단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만나게 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미니꼬회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시도를 착실히 실행하고 후에 거인(Magnus)이라고 불릴 정도의 박학을 구가한 스승 알베르토(그는 1223년 파도바 대학에서 삭소니의 조르단의 설교에 감화되어 도미니꼬회에 입회를 결심했다)의 지도 하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게 된다.

토마스가 도미니꼬회에 입회할 결심을 굳힌 것은 같은 나폴리 출신의 요하네스 데 산 줄리아노 신부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전기작가 토코는 적고 있다(나폴리에는 1231년 도미니꼬회의 수도원이 이미 발족되었다). 그러면, 어렸을 때부터 침묵 속에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에 끌려있던 토마스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택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도미니꼬회에 들어갈 것을 결의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였을까? 첫째로 토마스에게는 (그의 생애가 보여주듯이) 권위와 명망에 대한 집착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것들은 자기가 택하려 하고 있는 길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세속적인 권위나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친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또 몬테카시노는 당시 명백히 토마스가 바라고 있는 수도생활을 보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약 20년 후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은 젊은 날의 토마스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수도회의 다른 수도회에 대한 차이는 무엇보다 첫째로 목적면에서 파악되고 둘째로는 실천 면에서 파악된다. 만약 목적이 동일하다면 수도회 우월성은 2차적으로 실천의 양에서가 아니라 의도된 목적에 대한 실천의 대응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그 까닭은 빛을 발하기만 하는 것보다도 조명하는 쪽이 더 큰 것이듯이 관상만 하는 것보다도 관상한 것을 남에게 전하는 쪽이 보다 큰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신학대전 제 188문 제 6항).

그러나 토마스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토마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장이 됨으로써 일족의 위세와 번영에 기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의 아퀴노가의 아들이 희사에 의존하면서 활동하는 탁발 수도회에 몸을 바치는 것은 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 테오도라가 나폴리의 도미니꼬 수도원으로 달려갔을 때 토마스는 가족의 반대를 피하려고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을 따라 볼로냐를 경유하여 파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래서 테오도라는 토마스의 형 레지날도에게 사람을 보내어 토마스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형 레지날도는 1244년 5월 초순에 로마와 피렌체의 중간에서 처음엔 설득으로 나중엔 강제로 토마스를 붙잡아 로카세카로 끌고 왔다. 토마스는 로카세카 성의 한 방에서 약 1년 동안 감금당하게 된다. 그 가운데 젊은 여자를 고용하여 유혹하려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1245년 여름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도미니꼬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년)를 통해 토마스의 해방을 종용하고 있던 터라 가족은 토마스의 해방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의 몸이 된 토마스는 나폴리 수도원에 복귀하여 수도원의 방침에 따라 알프스를 넘는 여행길에 올랐다.
 
 
4. 활동
 
1245년 5월 토마스는 파리에 도착하여 생자크 수도원에서 거주하며 파리대학 신학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던 대 알베르토와 에땀프의 굴리엘무스와 만났다. 토마스는 파리대학에 와서 유럽최고의 학문적 수준을 가지고 진행되던 성서연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복판에 서게 된 셈이다. 그곳에서 알베르토의 제자가 된 그는 침묵과 근면으로 연구에 투신하며 기도에 헌신했다. 토마스는 스승으로부터 “우리는 이 사람을 ‘벙어리 황소’라고 불렀지만 그가 앞으로 가르치게 될 때 그 소리는 세계로 울려퍼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알베르토는 토마스에게 오늘날로 말하면 청강하는 학생이 아니라 조교에 해당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실제 토마스는 알베르토가 행한 ‘신명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관한 강의의 기록을 했다. 토마스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대학원에 걸친 7년간 알베르토의 지도를 받았다. 두 사람은 도미니꼬회의 이상에 관해서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연구를 추진할 구상에 관해서도 생애를 통해 친밀한 사제 관계로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학문탐구 방법을 보다 자세히 비교하면 자연연구나 논리학에의 관심의 강약이라는 차이 말고도 알베르토가 스스로 철학적 입장을 자각적으로 확립하지 않고 다양한 철학사를 신학 속에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였음에 비해 토마스는 존재와 인식의 근본문제에 관한 스스로의 이해를 일관한 방법으로 심화시키고자 노력하고 그로부터 얻어진 철학적 통찰에 의해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을 성취했다는 인상을 준다. 전기작가들은 토마스가 쾰른에서 면학을 시작할 때 “그는 감탄할만할 정도로 말수 적고 침묵을 지키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이것은 통상 연구에의 전념과 겸손의 표시로 풀이되기도 하고 스승 알베르토와 자기 생각의 차이를 의식한 토마스가 스승의 견해에 대한 찬성을 보류하고 스스로의 견해를 쉽게 표명하지 않았던 신중성의 표출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1250년(1251년) 사제로 서품된 토마스는 도미니꼬 총장(요하네스 빌데스하우젠)으로부터 파리대학 신학교수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의뢰받은 알베르토에 의해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1252년 가을 토마스를 맞이한 파리대학 신학과는 환영이나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상당히 멀었고, 오히려 적의에 차 있었다. 반 도미니꼬회 운동의 배경에는 교구 성직자로 이루어진 교수단과 수도회(시토회, 가르멜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꼬회)간의 반목의 역사가 있다. 교구 성직자 교수들의 반발에 대해서는, 수도회 교수단들이 대학의 규칙이나 관행보다는 수도회 방침을 우선시키는 경향(파업불참)과 교황이 파리대학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려하는 것에 봉사와 협력의 자세 등이 이유로 거론된다. 이러한 상황은 급기야 수도회(도미니꼬,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대해 강좌수 제한 규정, 선서를 거부하는 교수들(수도회 소속)을 교수단으로부터 추방한다는 결정까지 나왔다. 특히 도미니꼬회에 대한 공격은 언론이나 문서로 그치지 않았고, 도미니꼬회 수사들은 교수 성직자들(생타무르기욤, 1272년 사망)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먹을 것을 구하러 수도원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국왕 루이 9세가 수도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한 때는 경비병을 주둔시켰을 정도였다.

1252년 토마스는 성서학 강사로 임명되어 이사야서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토마스의 강의내용은 성서에 관한 상세한 주석을 위한 입문 또는 준비로써의 역할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며 때로는 중요한 개념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설명을 하는 일도 있었으나 오로지 성서의 자구에 관한 간단한 해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언적인 현시에 관한 강의는 훗날 ‘진리론’과 ‘신학대전’에서 상세히 고찰되고 있다. 1253년 명제론집 강사에 임명되어 1256년까지 강의를 맡았다. 토마스는 강의 때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여 해결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해결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논증을 창출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경탄하고 면학에의 열의를 불태웠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그러나 파리대학에서의 수도회 교수단(특히 탁발 수도회)에 대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들은 탁발 수도회에게 “육체노동은 않고 희사에 의존하는 것은 복음에 따라 완전한 생활 목표를 한다는 주장과 어울리지 않으며 사회 골치거리로 전락한다”며 거세게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파의 움직임은 1256년 10월 기욤이 쓴 ‘최근의 위험에 관하여’가 로마에서 단죄되어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되고 반대파들이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그칠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토마스와 보나벤투라를 교수 공동체에 받아들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259년 6월 도미니꼬회의 방침에 따라 교수직을 물려준 토마스는 파리와 쾰른의 중간에 있는 발렌시안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에 출석토록 지시받았다. 그 이유는 도미니꼬회 내부의 신학, 철학의 연구교육에 관한 근본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의 기록을 보면 도미니꼬회가 학문 연구의 수준을 높이고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도미니꼬회의 대학에 파견되어야 할 학생의 자격, 교수의 선정에 관한 엄격한 조건, 교수는 그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체의 잡무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임이 규정되어있다. 신학자 사이에서는 세속의 학문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과 불신이 보였던 당시의 전반적 상황에 비추건대, 이는 하나의 영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알베르토와 토마스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되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1260년 9월에 나폴리에서 열린 로마 관구의 회의에 출석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파리대학 교수를 그만둔 후 로마의 교황청 소재지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의 강사를 지내고, 교황청을 이전시킴에 따라 거처를 옮기며 교황청 신학고문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마스는 1260년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열린 관구회의에 출석할 의무가 주어졌다. 토마스는 그 생애에 걸쳐 스승 알베르토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으나 수도회 고문이 된 그에게는 여러 사람들(교황, 도미니꼬회 총장, 군주나 영주에서부터 동료, 기사)로부터 많은 강의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1264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체축일을 제정할 것을 포고함에 있어서 토마스에게 당일 미사의 전례를 포함하여 성무일도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토마스는 1265년 아나니에서 열린 도미니꼬회 로마 관구 회의 결정에 따라 새로운 신학대학을 산타 사비나 수도원에 발족시켰다. 이 학교는 신학 외에 철학부문을 갖춘 종합적인 대학이 아니라 교수 토마스를 중심으로 로마 관구의 각 수도원으로부터 파견된 수도회자들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연수센터였다. ‘신학대전’의 제 1부를 다 썼을 즈음 토마스의 이탈리아 체제는 끝나고, 약 5년간에 걸쳐 제 2부는 파리에서, 다시 미완으로 끝난 제 3부는 나폴리에서 쓰게 된다. 애초에 초학자를 위한 신학입문서로서 쓰여진 신학대전은 16-17세기 이후는 엄청난 주석서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러한 주석가들에 의해 신학대전의 기본사상이 이미 해명된 것이 아님은 오늘날 토마스 학자들 사이에 학파가 형성되어 있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대로이다.

1272년 봄, 파리를 떠난 토마스는 피렌체에 도착한다. 6월 12일부터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열린 도미니꼬회의 총회, 로마 관구 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관구 회의는 토마스에게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도록 일임했다. 당시 로마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비해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의 도움으로써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활기 넘치고 있었으므로, 토마스는 나폴리를 대학 설립의 장소로 선택했다. 그는 1272년 9월부터 나폴리 대학에 인접한 도미니꼬 수도원에서 강의를 개시했다. (토마스 시성을 위한 조사회에서의 전한 바에 의하면) 나폴리의 거의 모든 시민이 토마스의 설교를 들으려고 운집했다고 한다.

1273년 부활절 끝무렵, 토마스는 다음 해 5월 7일부터 리옹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1271-1276)로부터 공식 요청을 받았다. 이 제 14차 공의회의 주요 의제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와의 재결합이였기 때문에 토마스는 우르바노 4세의 요청으로 저작한 ‘그리스인의 오류를 반박함’을 지참하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와 다른 수사들을 데리고 아픈 몸으로 여행을 나서다가 길로 나와 있던 나무가지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혀 거의 기절하여 일어설 수가 없었다.
 토마스 일행은 그대로 여행을 계속하면서 몬테카시노, 아퀴노를 지나 로카세카 성에 들른 후 북쪽으로 향했다. 이 때 토마스는 쇠약과 피로가 심해져 병이 악화되고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작가들은 적고 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토마스는 세속의 집에서 죽음을 맞기를 바라지 않아 이전부터 초대를 받고 있었던 거기에서 가까운 시토회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 수도원에는 토마스가 그 생애의 마지막 10여일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객실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토마스는 마지막으로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구약성서의 ‘아가’ 강해를 했다고 하는데 그 사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토마스는 일요일에 대수도원장(테오바르도) 손으로부터 성체를 영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1274년 3월 7일 수요일 이른 아침에 토마스는 숨을 거두었다.

 
II.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토마스는 성서 가운데 난해한 곳을 만나면,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고자 힘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토마스의 악필은 유명하다. 그 문자에는 ‘판독 불가능’하다는 별명이 붙었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미 첫번째 파리 대학 교수 시절부터 그의 곁에는 늘 몇 사람의 필기자가 딸려 있어서, 그의 저작 활동을 돕고 있었음이 알려져 있다. 도미니꼬회는 일찍이 ‘동료’라는 제도를 두고서, 교수나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이 잡무에서 가급적 해방되도록 조치했던 것이다.
 
 
1. 토론
 
토론에는 통상의 수업의 일환으로서 행해지는 ‘정기 토론(또는 정규 토론)’과 성탄절과 부활절 전주에 일반 공개로 행해지는 ‘임의 토론(또는 자유 토론)’의 두 가지가 있었다.
 
 
2. 진리론
 
이 「진리론」은 “진리에 관하여”라는 제 1문제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어서 신의 앎, 이데아, ‘말’, 천사의 인식, (인간) 정신 등, 주로 인식에 관계되는 문제가 제 20문제 “그리스도의 영혼의 앎”까지 언급되어 있다. 제 21문제 “선에 관하여”의 다음에는 주로 욕구에 관한 문제가 제 26문제 “영혼의 정념에 관하여”까지 고찰되며, 최후의 세 문제(제 27-29문제)에서는 은총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 만물의 발원, 만물의 정점인 이성적 피조물의 하느님에의 귀환, 이 회귀의 ‘길’로서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구상에 기하여 배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토마스는 진리의 개념을 가장 중요한 줄거리로 삼았다고 말할 수 있고, 이는 나중에 ‘신학대전’에서 성숙한 형태를 띠게 된다. 여기서는 그의 독자적인 신학적 종합의 구상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3. 교사론
 
토마스는 인간에 의한 새로운 지식의 획득은, 모든 확실한 지식의 기초인 자명한 제 1원리가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이성의 빛이 신에 의해 우리 안에 심어져 있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며, 인간에 의한 모든 교수 활동은 이 빛 덕분에 유효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서는 신만이 ‘내적으로, 그리고 주로’ 가르치는 자인 한에서, 아우구스티노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신만이 가르친다고 하는 아우구스티노의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신만이 ‘내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토마스는 지적한다.
 
 
4. 페트루스의 108개 명제
 
총장(요하네스)으로부터 동료의 ‘이단적’ 견해를 검토하라는 명을 받은 토마스는 이 108개의 명제 하나하나에 관하여 엄정히 그리고 주의 깊게 논평한다. 전체를 통하여 토마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페트루스에게는 개념 규정의 불명확성과 용어상의 혼란은 있으나 그러한 것들을 ‘이단적’이라고 고발하는 것은 오히려 고발자측의 이해의 부족과 악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중상의 의도가 빤하다는 것이다.
 
 
5. 대 이교도 대전
 
토마스 자신은 이 책의 제 1권의 제 1장에서, 지혜있는 이의 직무는 최고의 의미에서 진리인 신적 진리에 관해 숙고하고 진술하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립하는 오류와 싸우는 것이라고 서술한 후, 제 2장에서 인간이 종사하는 모든 탐구 가운데 지혜의 탐구야말로 가장 완전, 고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고 하며 지혜의 탐구를 찬미한다. 이 책의 집필에 나선 것은 라이문도의 요청이었을지도 모르나 이 책 속에서 토마스는 여러가지 형이상학, 인간학, 윤리학적 문제에 관하여 다른 어떤 저작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상세히 철학적 논의를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이 이 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체로서 「대 이교도 대전」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진리를 해명하고, 이론을 반박한다는 호교적 색채가 강한 신학적 저작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6. 신학대전
 
제1부 거룩한 가르침, 유일한 신, 삼위 일체인 신, 창조(악의 고찰을 포함), 천사, 인간, (만물의) 통치.
제2부(제1편) 인간의 궁극 목적 및 지복, 인간적 행위, 정념, 습관과 덕, 악덕과 죄, 법, 은총.
제2부(제2편) 대신덕(신덕, 망덕, 애덕), 윤리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 예언, 관상적 생활과 실천적 생활, 직무와 신분.
제3부 그리스도, 성사(제 90문제, 고해 성사의 중도까지).

‘신학대전’은 모두 512개의 문제를 포함하는데, 주목할 말한 것은 토마스 자신이 ‘윤리적인 사항’을 논하는 부분이라 하고 있는 제 2부가 303개의 문제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가 제 3부를 예정대로 썼다고 해도, 양적으로 ‘신학대전’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중세 고딕 대성당이 오늘날도 늘 새로운 찬미와 경이의 원천이듯이 ‘신학대전’도 허다한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7. 아베로에스파와의 논쟁
 
‘아베로에스파’라는 명칭은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이슬람 사상가 이븐 루시드(1126-1198) - 라틴세계에서는 아베로에스(Averroes)로서 알려져 있다 - 의 해석을 최상의 것으로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이해하는 데 열중했던 데서 생겨난 것이다. 토마스가 아베로에스파 내지 그들이 해석한 한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하여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1) 모든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지성밖엔 존재하지 않는다(따라서 개개의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지배된다, (3) 세계는 영원하다, (4) 개개의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 아니다, (5) 신의 섭리는 개개 인간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등 신앙의 진리와 정면에서 대립하는 명제를 철학적으로 논증된 사항 - 그들은 그것을 ‘진리’라고는 부르지 않았지만 - 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왜곡자’라 부르는 게 적합한 것이다.
 
 
8.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아우구스티노파와의 논쟁 속에서 토마스는 ‘세계의 영원성에 관하여’라고 제목을 붙인 논쟁적 저작을 발표하였다. 이 저작에는 “투덜거리는 이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실상 토마스의 논점은 미묘하기는 하나 극히 단순하며, 어떤 것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늘 존재했다고(그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고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토마스는 신앙과 신학을 철학의 우쭐대는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스스로 철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9. 토마스의 설교
 
그리스도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 첫째로, 믿음으로 영혼은 하느님과 맺어지게 됩니다. 그 까닭은 믿음으로 영혼은 말하자면 하느님과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둘째로, 신앙으로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을 아는 것이므로, 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그들이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요한 17, 3)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셋째로, 믿음은 현재의 생활을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착하게 살려면 착하게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 넷째로, 믿음으로 우리는 유혹에 이길 수 있기 대문입니다. 히브리서(11, 33)에도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정복했다”고 합니다. 유혹은 악마, ‘세속’이나 ‘육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악마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을 지지하지 않도록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배제됩니다.
 
 
10. 저작의 중단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은 수요일에 해당하였는데, 이 날 아침 토마스는 여느 때처럼 성 니콜라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미사 도중 “이상한 변화를 느끼고”(카푸아의 바르톨로메오의 증언), 미사 후 토마스는 쓰는 것도 구술하는 것도 일체 그만두고 말았다. 제 90문제 제 4항으로 영영 붓을 놓아 버린 것이다. 토마스는 동료 레지날도의 “예의를 망각한 많은 힐책에” 대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결코 입밖에 내지 말 것을 서약시킨 후에, “내가 보고, 내게 계시된 사항에 비하면 내가 쓴 것은 모두가 나에게는 지푸라기처럼 보인단 말이네” 하고 답하였다는 것이다. “지푸라기” - 그것은 성서의 자구적인 의미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고 한다 - 라는 말은 확실히 하느님의 신비를 탐구해 마지않는 인간의 숙명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탐구 노력이 그 궁극의 갚음(즉 신비의 직시)을 얻었을 때, 신비에로 이끌었던 말(그 때까지 탐구에 의해 생명과 힘이 불어넣어진 말)이 힘 없는 것이고 한낱 말에 불과하며, 지푸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토마스의 장례는 수도원 대성당에서 치러졌으며, 테라치나의 주교, 베네딕토회․도미니꼬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들, 그리고 캄파냐 지방의 많은 영주들이 참석하였다. 대성당 중앙 제단 곁에 토마스의 유해가 매장된 후, 레지날도 수사는 주위의 권유로 추도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에게 성인칭호를”이라는 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294년, 도미니꼬회의 시칠리아 관구가 로마 관구로부터 독립한 해이며, 제 1차 증인조사는 1319년 7월 21일부터 9월 18일까지 나폴리의 대주교관에서, 제 2차는 1322년 11월 10일부터 20일까지 포사누오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있었다. 이른바 ‘악마의 대리인’이 제출한 시성 반대의 논거는 토마스가 생전에 행한 기적 수가 적다는 점이었는데, 교황 요한 22세는 “토마스는 그가 교수로서 해결한 문제의 수만큼 기적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해 이 반대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성을 위한 절차가 모두 끝나, 토마스가 교회의 성인이라고 공식으로 선언된 것은 1322년 7월 18일 아비뇽의 노트르담 데 돔 교회에서였다.

오늘날 우리 생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관과 인식관은 중세 스콜라 학의 다양한 입장 가운데 하나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더욱이 그러한 입장이 근대, 현대 사상으로 받아들여짐에 있어서, 그 이전의 오랜 지적․정신적 전통을 뛰어난 방법으로 종합한 토마스의 사상은 거의 완전히 망각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와 같은 실수에서 출발한 근대 사상의 답보 상태에 직면하여, 또 하나의 선택지로서의 토마스 사상에 눈길을 돌리는 데는 뭔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참고문헌

- 와이스헤이플, OP.,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생애, 작품, 사상)”, 성바오로 출판사 1998.
- 이나가키 료오스케, “토마스 아퀴나스”, 도서출판 새남, 1995.
- 요셉 피퍼, “토마스 아퀴나스. 그는 누구인가”, 분도출판사, 1995.
- 코플스톤 F.C., “토마스 아퀴나스”, 성바오로 출판사, 1993.
 
 
추천 사이트
* 토마스 아퀴나스 : www.op.org/DomCentral/study/TA.htm
* Aquinas :
www.aquinas-multimedia.com
* Theology on line :
www.op.org/aquinas/theology.htm
* Theological library :
www.mcgill.pvt.k12.al.us/jerryd/cathmob.htm
* Religious studies :
www.religion.ucsb.edu/resource/othrdept.html
* The Eckhart Society :
http://www.op.org/eckhart
* Rosary Center :
http://teleport.com/~rosary
 
[도미니코 수도회 홈페이지에서]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7. 신학 철학자편 (4) 성 토마스 아퀴나스(상)

 

 

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독창적 그리스도교 철학 발전시켜”
진리 연구와 옹호 위해 일생 바치며 ‘신학대전’ ‘대이교도 대전’등 저술

 

 

「스콜라 철학의 왕」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로 존칭되는 중세 유럽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로 표현된다. 연구와 저술과 교수 생활로 일관하면서 진리 연구와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깊은 영성으로 충만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이교도 대전」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등 방대한 저작을 통해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꼽힌다.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서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 사상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한편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을 확립함으로써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 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으로 남아있다.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열네살 되던 1239년 교황 영토와 황제 영토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나폴리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 연구를 통해 복음 전파를 목표로 삼는 탁발수도회 도미니코회를 접하게 되고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 배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 선포를 향한 열정으로 풀이된다. 신학대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듯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리를 거쳐 알베르토 막뉴스 지도아래 쾰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토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기 철학과 신학의 도구로 받아들였다.

 

이후 알베르토의 추천으로 파리대학 교수 후보자로 추천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2년부터 파리에서 성서와 룸베르투스의 명제집을 강의했고 1254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아 1259년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신학과 교수의 주요 직무는 성서의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와 설교였는데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 등이 당시 저술한 대표적 저서다.

 

관례에 따른 3년간의 교수 직무를 마친후 이탈리아로 돌아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약 10년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코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 활동에 전념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사상을 두드러지게 성숙시킬 수 있었던 때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므스 번역에 힘입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했으며 교황 울바노 4세의 요청으로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스교부 및 교의사의 본격적 연구를 시도했다.

 

「대이교도 대전」, 정기토론집 「신의 능력에 대하여」, 4대 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 제1부 등이 당시의 대표적 저작이다.

 

1269년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됐고 작은형제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등 3개 파와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2부, 몇가지 정기 주석과 정기 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 주석 등을 펴냈다.

 

1272년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대학 설립을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저서와 병행하면서 「신학대전」 제3부를 연이어 저술했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니콜라오의 축일 미사후 돌연 집필 중단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대해 자신은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단 선언의 대상 되기도

 

1274년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이끌고 리옹공의회로 향하던 중 병세가 악화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에 있는 포사누바 시토수도원에서 눈을 감았다.

 

사후 그의 가르침은 동시대에 상당한 새로움으로 다가왔으나 학설 일부는 1277년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이단 선언 대상이 되기도 했다.

 

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26일, 이주연 기자][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8. 신학·철학자편 (4) 성 토마스 아퀴나스(하)

 

 

신학대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7년이라는 시간을 저작에 바쳤으면서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완의 책이면서도 신학대전은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신학대전으로 중세학문 집대성”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근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도구로 행동”

 

 

-창조의 자율성, 고유 활동들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피조물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으로 인도하고,


-인간 인격의 수용력, 독립성, 책임감으로 인도하며,


-창조에서 드러나고 예수에 의해서 계시되는 하느님의 깊이로 이끌고,


-삶과 활동의 절정으로, 그리고 행복이라는 그들의 목표로 인도하며,


-삼위일체의 지혜와 사랑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원리를 부여받은 인류에게로 인도한다.

 

이상은 학자들이 밝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적 특성들이다.

 

그의 사상은 어떠한 「새로움」에 압도적 인상을 받았던 동 시대인들에 의해 일부가 이단으로 취급받기도 했으나 결국 아우구스티노를 기원으로 하는 「교부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신 플라톤철학」 「이슬람」 「유다사상」 등의 풍부한 유산을 계승하면서 「아퀴나스적 총체」로 불리는 독창적 사상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그는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이것은 한편 「학」(學)으로서의 신학 정립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적 기초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신학대전

 

토마스 아퀴나스의 업적을 얘기할 때 많은 부분을 언급할 수 있지만 학자들은 『무엇보다 토마스는 마지막까지 대학의 위대한 스승으로 남는다』고 들려준다.

 

즉 토마스는 「가르친다」는 것을 가장 숭고한 정신적 삶의 형태라 보았고 진정한 스승은 신입생 입장에서 생각하고 학생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진리를 이끌어 낸다고 여겼다. 「신학대전」을 비롯한 그의 역작들은 바로 그러한 가르침의 과정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l)은 토마스가 7년이라는 시간을 저작에 바쳤으면서도 완성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완의 책이면서도 신학대전은 「대작」(opus magnum)으로 평가받는다.

 

3천 개의 논항을 포함하고 있는 신학대전은 흔히 고딕대성당으로 비유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부분이 상호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면서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한점을 향해 수렴한다는 공통적인 근본 구조 때문이다.

 

신 창조론, 윤리론, 그리스도 성사 등 전 3부로 구성된 신학대전은 신학적 관점에서 「중세 학문의 집대성」이라 불리며 내용은 1) 존재로서의 하느님, 2) 선으로서의 하느님, 3) 구원받기 위하여, 강생한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타락한 상태의 인류가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서술 양식도 독특한데 중세 대학 특유의 「토론」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를테면 2669개 항목 모두 「…인가?」라는 의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을 모든 피조물들의 절대적 근원으로서 「필연적 존재」로 보았다.

하느님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창조주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분이 있는 모든 것의 원인이시라는 것이다. 이밖에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이러 저러한 분이 「될 수 없다」는 것 뿐 이라고 밝혔다.

 

또 「영원성」이란 하느님에게만 속한 것으로 하느님의 전능이란 당신이 뜻하는 바를 무엇이든 발생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했다.

 

피조물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주장했는데 그러한 의견은 신학 안에서의 인간 이성의 위치,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의 전능, 정치 사회에 관한 그의 사상을 결정하는 주요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토마스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에게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자율적이라고 밝혔고 창조주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율적으로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피조물이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의 활동에도 불구하고도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활동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라는 사고를 폈다. 즉 자유로운 행동들은 결국 하느님에 의해 일어나는 피조물들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자유란 하느님과의 어떤 거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원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하느님 능력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곧 우주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구별들을 함께 초월하는 것을 인지한다는 것으로 주장했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행동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피조물을 서로 대조적인 두 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떠한 피조물도 하느님에 필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육체로 하여금 인간 육체의 작용을 하는 인간 육체를 만드는 일 그 이상의 일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를 초월하면서, 또 그러한 활동들의 원리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체가 되더라도 영혼은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그 자체로 인간이 아니며 부활이라는 계시 교리가 없다면 인간에게 있어 죽은 자의 소생이란 말할 수 없다」는 바를 명백히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0일, 이주연 기자]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진말) 성 토마스아퀴나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귀 옆의 비둘기는 성령의 속삭임을 표현하고 있다.

 

 

중세 하면 우리에게 가장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일까? 아마도 「암흑기」란 말일 것이다. 이런 오해는 중세시기의 모든 문화와 학문이 신 중심적, 교회 중심적이었던 것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반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사상이란 없다.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으로 넘어가는 근대 서구적 사상도 200~300년에 걸친 총체적인 사회변화였다. 이는 근대의 뿌리가 찬란한 중세 문명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이 개국 후 고려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새로운 지배 사상으로 선택한 것은 자신들의 왕조 찬탈을 위한 당연한 명분이지만 그렇다고 고려불상의 미려함과 청자의 우아함을 부인할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중세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13세기는 서양다운 서양을 형성하는 시기로 이미 근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한 인물을 통해 중세를 관통하고 근대를 여는 사상을 볼수 있으니 그가 바로 보편적이고 천사적인 교회박사 성 토마스 아퀴나스다.


생 애


토마스는 1225년경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아퀴노 마을 인근의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던 토마스는 5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봉헌자로 보내졌다. 열 네 살이 되던 1239년 교황영토와 황제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나폴리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신의 전 생애를 결정할 운명적인 두 가지, 아리스토텔레스와 탁발수도회를 만나게 된다. 나폴리는 시칠리아에 속하는 지역으로 동서방의 경계지역이자 전투지였다. 따라서 국경지역의 특성상 그리스나 아랍 등의 외래문화가 상존해 있었다. 여기에 나폴리 대학은 프레드리히 2세에 의해 세워진 순수 국립대학으로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어느정도 비켜나 있었으므로 교황청의 공식적인 아리스토텔레스 강의 금지령을 글자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 아래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배우게 된다. 또 나폴리에는 1231년부터 도미니코회가 설립되어 있었다. 토마스는 19살이 되던 해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토마스가 도미니코회를 선택한 것은 진리선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더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귀족이었던 그의 가문은 토마스가 구걸승이 된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가족을 피해 파리로 가는 도중 형제들에게 납치돼 아버지의 성에 감금된다. 1년 후 풀려난 토마스는 파리대학으로 가 알베르토 마뉴스의 지도아래 1250년까지 5년간 공부하고 알베르토가 쾰른에 수도원 대학을 세우기 위해 갈 때 동행해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편으로 알베르토에게 강의를 들었다. 1252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중요성을 간파한 알베르토는 토마스를 파리대학에 보내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는 스물일곱의 나이로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와 함께 파리대학교 교수가 됐다. 이때 성서학과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강의하며 명제집을 간결히 정리하고 논증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원리를 도입한 신학을 전개했다.


1259년 이탈리아로 파견된 토마스는 같은 수도회 소속으로 희랍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던 뫼르베케 빌헬름을 알게된다. 그가 번역해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그리스어를 잘모르던 토마스의 철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자신의 대표작인 「신학대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흔넷이 되던 1269년 토마스는 다시 수도회에 의해 프란치스코회와의 학문적 대립이 첨예해진 파리대학교로 가게 됐다. 신앙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우구스티노주의와 이성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에서 자신만의 노선을 추구하던 토마스는 이 시기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저술을 하게되고 방대한 신학대전 2부도 이때 씌여진다. 1272년 로마로 되돌아온 토마스는 나폴리에 수도원 대학을 설립하라는 명을 받고 나폴리로 갔다가 1274년 리옹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을 받고 리옹으로 가던 중 1274년 3월 7일 선종했다.


사 상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받아들여 구체적인 사물에서 사고를 시작했다. 결국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사물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경험적 사물들에서 출발해 그 존재가 무엇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함으로써 모든 존재사물의 근거로서의 최고 존재 곧 하느님을 탐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토마스에 의하면 모든 사물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 자체」에 참여(participatio)하고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철학적인 이 설명을 교회용어로 풀면 창조가 된다. 그리고 이 창조는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의 원리인 존재자체에 대한 탐구를 창조론과 연결시킴으로써 토마스는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섰다.


또한 토마스에 의하면 창조된 모든 사물은 자신의 근원인 창조주에게로 되돌아가려는 근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구원이다. 창조가 신에 의해 자유로이 이뤄지는 것처럼 구원도 사물들의 마지막 선택에 따라 이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토마스가 쓴 명제집 주해서에 따르면 『피조물이 그들의 제일원천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은 「일종의 윤회」와 같은 것이며 여기서 모든 사물은 태초에 그들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바로 그곳을 목적으로 삼아 되돌아간다』고 했다.


이처럼 토마스는 사물의 세계에서 출발해 신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 토마스는 인간의 행복을 『신을 직관하는 것』이라 표현했다. 토마스의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선종하기 얼마전인 1273년 12월 6일 미사 중 신비 체험을 한 이후 더 이상 저술을 하지 않는다. 토마스는 자신의 친구요 비서였던 레지날드에게 『내가 바라본 그것과 비교한다면 이제껏 내가 저술한 모든 것이 지푸라기와 같다』고 대답했다.

 

[가톨릭신문, 2002년 5월 5일]

 

모든 학교의 수호성인 성 토마스 데 아퀴노
 
 
그리스도교 최대의 신학자이자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는 1224년(또는 1225년) 이탈리아의 아퀴노 교외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주인 란둘프 백작으로, 로마 황제와 프랑스 왕의 친척이다. 토마스는 다섯 살에 몬테 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1239년경에는 나폴리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244년에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설교와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에 들어갔다. 1245년부터 프랑스 파리와 독일 쾰른에서 성 알베르토(대)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품을 받았다.
 
125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2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나폴리, 로마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가르쳤으며, 1259-68년 사이에 유명한 “숨마 테올리지카”(신학대전) 저작에 착수하였다. 1274년 희랍과 라틴 교회의 재일치 가능성을 토의하라는 부름을 받고 리옹 공의회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1월 28일의 일이다. 그는 현대 가톨릭 신학의 뿌리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사상을 담은 “신학대전”을 비롯해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등의 기도문,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신앙과 이성의 예리한 구분으로 특징지어지는 탁월한 저작들을 남겼다.
 
1323년에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회학자로, 1880년에는 모든 대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교황 레오 13세는 모든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며 ‘에테르 파트리’ 칙서까지 반포하였다. 그의 주요 사상은 곧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경향잡지, 2005년 1월호]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2) 토마스 아퀴나스
 
① 높은 학식과 겸손 겸비한 모범적 수도자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두 말이 필요가 없는 분이다. 교회 박사 중의 박사다.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전개는 대부분 토마스 아퀴나스(축일 1.28)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논리적 밑바탕을 만드신 분이다.
 
‘토마스 데 아퀴노’ 혹은 ‘토마스’라고도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로카세카 성에서 1224년 혹은 1225년에 아퀴노의 백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작의 아들이었던 만큼 살림은 풍족했다. 단순히 돈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란돌프(Lhndulphus)라는 분이었는데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는 조카가 되고 하인리히 6세와는 종형제 사이다. 또 어머니 테오도라(Theodora)는 노르만디의 왕족의 친척이었다. 소위 말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부모는 토마스가 5~6살이 되었을 때,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회에 봉헌하여 수도생활을 하게 했다. 당시 수도원장의 이름도 아버지와 같은 란돌프였다. 수도원장이 토마스 아퀴나스 집안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도회에서 어린 토마스가 보인 덕행이나 학문의 진척은 놀라울 정도였다. 신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지적 지능이 우수한 것만이 아니었다. 성실했으며 늘 학문을 탐구하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때에도 의문이 머리에 떠오르면 즉시 놀음을 그치고 스승에게 달려가서 질문하곤 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당하지 못하는 법이다. 10세 때에 이미 보통의 다른 17, 8세 소년보다 더 많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수도원장 란돌프는 아직 어린 토마스를 나폴리의 대학에 입학시켰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초등학생이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나폴리 대학은 당시 학생들의 풍기가 나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어린 토마스는 그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에 대한 것만 찾았다. 세상 사물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마음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특별히 성모 마리아를 깊이 공경하고 있었다. 성모님께서도 그런 그를 늘 전구로 보호하셨다. 그가 도미니코회에 들어가는 데도 성모님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토마스가 14세 때 부모 몰래 베네딕토회를 떠나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당시 도미니코회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탁발 수도회였다. 부모는 아들이 미천한 수도회에 입회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부모는 아들이 고위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전통 있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즉시 아들을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갔다. 당장 끌고와 베네딕토 수도회에 다시 보내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마침 토마스는 그때 장상의 명령에 의해 파리로 간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들을 다시 불러 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였다. 어머니는 토마스의 두 형을 시켜서 토마스의 뒤를 쫓게 했다. 결국 토마스는 형들에게 붙잡혔고, 집으로 끌려왔다. 부모는 그를 성에 가두고 일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감금생활을 한 것이 1년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성모님께 전구를 청했다. 전구는 받아들여졌다. 그는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성을 탈출할 수 있었고, 결국 도미니코회에 다시 입회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학덕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그는 책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십자가를 가장 좋은 서적이라고 칭하며, 묵상하고 하느님의 비추심과 은총을 받았다. 높은 학덕에도 불구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삶의 모습도 완벽한 수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과 순명, 정결과 청빈,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의 거울로 존경을 받았다.
 
그렇게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독일에서 신품성사를 받았고 유럽 각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252년에는 파리 대학에 초청을 받아 학문뿐 아니라 도덕에 관해서도 가르치게 되었다. 이후 1256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259년부터 68년까지 로마에서 교황청 소속 학원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탄생하는 것, 그리고 착수된 것이 유명한 성체 찬미가와 신학대전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3) 토마스 아퀴나스
 
②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1261년의 일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Ⅳ)는 당대 최고의 석학 토마스 아퀴나스를 로마로 초대했다.
 
그의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로마의 신학자들과 학생들에게 전수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토마스의 위대함이 한층 빛을 발하는 일이 생긴다. 당시 교회는 성체에 대한 신학적 기반이 약했다. 벨기에에서 시작된 성체 축일도 당시로선 몇몇 나라에서만 지켜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교황은 성체 축일을 전세계 공통의 축일로 정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들어갈 성체찬미가가 필요했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당대 또 한 명의 석학이었던 보나벤투라에게 이 일을 맡겼다. 성체 찬미가는 영성적으로도 완벽해야 했으며, 신학적으로도 오류가 없어야 했다. 이에 보나벤투라와 토마스는 기도 안에서 성체 찬미가를 작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히 토마스의 찬미가를 보게된 보나벤투라는 그 완벽함에 감탄하고 자신이 작성한 찬미가는 찢어버린다.
 
이에 교황은 토마스의 것을 채택해 미사 전례문과 성무일도 기도서에 포함토록 했다. 그 내용이 참으로 아름답다. 오늘날 어떤 영성가와 신학자도 이처럼 완벽하게 성체 영성의 깊이를 문자로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신학계의 불후의 걸작으로 남아있는 ‘숨마 테올로지카’(Summa Theologica), 즉 신학대전(神學大全)이다.
 
로마에 있을 당시 착수된 신학대전 집필은 이후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계속 진행됐다. 하느님께선 이 책에 각별한 축복으로 응답하셨다. 하루는 하느님이 토마스에게 나타나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토마스는 “주여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토마스는 사도 바오로의 서간문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작업들을 병행했다.
 
이런 가운데, 토마스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 축일미사 도중이었다. 토마스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지금까지 열정을 다했던 집필 작업을 돌연 중단한다. 당시 토마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한 부분을 집필 중이었다고 한다. 친구가 왜 글을 더 이상 쓰지 않느냐고 묻자,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발현 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단순히 뛰어난 신학자이자 교회 박사로만 알아선 곤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토마스는 하느님과의 완벽한 일치 안에서 살았던 영성가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신학은 영성의 문자화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이 일 이후에 토마스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토마스가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토마스 사후 직후에 쓰여진 전기문들에 등장한다.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127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가 리용에서 공의회를 소집, 토마스를 부르자 토마스는 공의회 참석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토마스는 리용으로 향하던 도중 조카딸 집에서 중병을 얻는다.
 
“나는 수도자이므로 수도원에서 죽고 싶다.” 사람들이 그를 인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포사노바 수도원에 옮겼다. 아직도 세상은 그의 신학적 해석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했다. 친구가 아가서에 대한 설명을 청했다. 토마스는 입술을 움직여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이젠 그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려졌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323년에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1567년에는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 됐다. 1880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모든 대학교와 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이 될 수 있을 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시 요한 22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가 모르던 문제를 신학적으로 명쾌하게 해결할 때마다, 그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5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4) 토마스 아퀴나스
 
③ 성인의 주요사상 교회 공적 가르침으로 남아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신의 책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 주요 사상들은 곧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었다.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특히 그의 저서들은 신앙과 이성간의 경계를 허문, 하느님 섭리에 의한 위대한 보화들이다. 이제 그의 영성에 대해 묵상해 보자. 하느님께서 그의 삶 안에서 어떻게 형성의 원리를 섭리하셨고, 토마스 자신도 또한 그 형성의 원리를 어떻게 실현시켜 나갔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성이란 세상 만물을 당신을 향해 형성되도록 초대하신 하느님의 섭리를 포함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린시절에는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기 마련이다. 토마스도 부모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부모님은 모두 왕족 출신으로, 토마스 또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런데 부친과 달리 모친은 신앙적으로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부모의 뜻에 의해 토마스는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이후 열심히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교육은 수도원 교육이었다. 그런데 토마스는 어린 시절부터 학업 성취와 관련해 남다른 모습을 보인다. 뛰어난 이해력과 암기력은 신동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돋보였던 것은 호기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지적인 갈망이었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바로 스승에게 달려가 질문을 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해결을 해야 하는 성격의 소년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아는 척 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다. 모른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한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식하다고 여기면 어쩌나 근심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데 누가 알려주겠는가.
 
여담이지만, 내가 37세 늦깎이로 미국 유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외국의 교수들은 학생이 모른다고 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말을 했더니 알 때까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닌가. 집에 갈 시간인데도 보내주지 않고 기어코 이해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도 시간이 모자라자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며 모르는 것이 또 나타나면 전화를 하라고 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었다.
 
토마스는 궁금할 때마다 물었고, 스승들은 아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 주었다. 자연히 토마스의 지적 성취는 날로 향상되어 갔다. 토마스는 역시 출중한 아이였다. 10세때 이미 18세 학생들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이미 고등학교 수준의 학업 능력을 갖춘 것이다. 이때 하느님은 토마스에게 또 다른 안배를 마련하신다. 초등학생 단계까지 부모님을 안배하셨다면, 청소년 시기에는 참 스승을 안배하신 것이다. 당시 수도원장 란돌프는 13세 토마스를 대학에 진학시킨다. 그의 참 능력을 알아본 것이다. 대학은 나폴리에 있었다. 그런데 이 대학이 문제였다. 20대 초반의 학생들이 수학하고 있었던 이 대학은 상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성적으로 자유분방하고, 퇴폐 문화가 만연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에 전념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토마스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자칫 하다가는 술과 성에 물들어 타락할 수도 있었다. 사람은 주위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살다보면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여러차례의 위기 상황을 접하게 되는데 이 대학생활이 바로 토마스의 첫 번째 위기상황이었다.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쾌락과 순간적인 즐거움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중학생 토마스는 오직 진리에 대한 탐구심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토마스는 수도회 입회를 결심한다. 도미니코 수도회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의 분노가 컸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속된 말로 다른 사람에게 밥을 빌어 먹고 다니던, 볼품없는 탁발 수도회였다. 어머니는 가문의 영광을 중시하는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닌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계속 성장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토마스의 형들을 시켜서 토마스를 집으로 잡아오게 한다. 토마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형들에게 잡혔고, 집으로 끌려왔다. 어머니는 그를 성의 감옥에 가둬 버린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외출 금지다. 토마스에게 또다시 찾아온 위기상황이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22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45) 토마스 아퀴나스
 
④ 감금된 토마스 … 성모님과 천사를 체험하다
 

사람은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부유한 사람도, 명예와 지위가 높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가슴 철렁철렁 내려 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위기상황을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점이다.
 
위기 상황은 나 자신을 점검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초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위기를 형성적 기회로 보면 새로운 성장이 가능해진다. 토마스에게 있어서도 위기상황은 그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지금 토마스는 감금 상태다. 위기상황이다. 도미니코회에 들어갔지만 이를 반대한 어머니가 토마스를 성에 감금했다. 이때 토마스는 성모님과 천사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렇게 토마스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항상 보살펴 주심을 체험한다. 위기상황이 없었다면 이러한 체험이 과연 가능했을까. 위기상황이 얼마나 큰 열매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후 토마스는 극적으로 성을 탈출했고, 결국 수도회에 갈 수 있었다.
 
이후 토마스는 18세에 정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게 된다. 이때부터 토마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의 이상을 펼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후 모든 공부와 수련을 마친 토마스는 사제서품을 받았고, 신학 교수 자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중요한 인물들을 잇달아 만나게 된다. 토마스의 형성을 돕는 새로운 조력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성 알베르토와 성 보나벤투라 등이다. 토마스보다 26살 위였던 성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조예가 깊었다. 토마스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철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된다. 토마스는 자신의 스승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차원에서 인간과 하느님, 그리고 인간 삶에 대한 연구를 했고, 그 결과는 이후 거대한 그릇으로 담아내게 된다. 토마스는 당대의 석학 보나벤투라를 통해서도 지적이고 영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는 이후 신학적 이성적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매우 깊어진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보나벤투라가 극찬했다는 토마스의 성체찬미가는 단순한 학문적 성취만으로는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의 영성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47세 때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쓴 모든 것은 내가 본 것, 계시된 것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용히 48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그는 병든 몸이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운명했다.
 
이런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지성과 성덕의 등불이 된다. 토마스는 특히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성은 높은 단계의 하느님 인식을 깨달아가는 차원이고, 의지는 선(善)을 향한 노력이다. 이성으로 깨닫고 자각한 바를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때 바로 진정한 진리의 인간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토마스가 시도한 지적인 노력을 지극히 단순화시켜서 정리하자면 이렇다. 토마스는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형성하시고, 또 형성하도록 이끄시는 존재 자체로, 우주와 인간 등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라고 했다. 즉 완전히 선하신 분이다. 결국 인간이 이에 따라 선하게 살아야 하는데 오만과 교만의 삶을 선택한 인간은 결국 죄의 수렁에서 고통받고 있다. 이에 인간은 회개하고 존재 자체,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는 더 높은 경지, 즉 신학적 계시를 언급한다. 지적인 학업 과정을 통해, 이성으로 우리가 깨달아 나가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직접 영을 통해서 계시해 주는 바를 깨닫게 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차원의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토마스에 의하면 이성을 통한 깨달음, 그리고 계시를 통한 깨달음 두 가지를 잘 수용하고 통합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뜻을 알겠다는 인간적 노력, 이를 성취하기 위한 선한 의지, 하느님 계시를 향한 열려 있는 열정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