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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 성탄 )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 성탄)



 




제목 : 예수 성탄 (1475)
작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1415- 1492)
크기 : 124X 123cm :포플러 나무판에 유채
소재지 영국 런던 국립 미술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심을 기억하는 예수 성탄은 이제 신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 예수를 통해 우리와 같이 형상을 그릴 수 있는 존재로 변모되었다는 뜻이며 가톨릭 교회가 성미술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근거이다.

그러기에 많은 작가들이 성탄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성탄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기할 정도로 빈약하다..

신약성서의 마르코와 요한 복음서는 성탄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으며 마태오 복음서에는 딱 한 줄뿐이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마태오 1: 25)

루가가 그나마 몇 줄 보탰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가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그들이 머무를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눕혔다.”(루카 2: 7-8)

이것이 성서가 예수 성탄에 대해 전하는 전부다.

여기서 나오는 말구유는 "말" 을 빼고 "구유 나 여물통"으로 옮겨야 그 뜻이 더 정확해진다.
소, 나귀, 양, 염소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의 근거가 이렇게 빈약하다 보니 후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로부터 시작해서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것은 비성서적인 것이라 치부하기보다 예수 성탄에 대한 지극한 신심을 가졌던 신자들의 믿음의 유산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하고 정확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작품 중 유명한 것은 13세기의 이탈리아 제노바 대주교였던 , 보라기네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의 "황금전설: 1260년'" 인데, 교회 초세기 부터 중세기 까지 살았던 위대한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내용 중 어떤 것은 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긴 해도 신앙이해에 대단히 도움이 되는 것이다.
생선을 먹을 때 가시를 제하고 살만 먹듯이 , 이 책에서 비성서적인 내용은 접어두고 교훈적 내용을 얻더라도 대단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중세 역사, 신화, 예술, 문학, 그리고 종교 등에 대한 중요한 안내서가 되었으며 예수 성탄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충족시킬 많은 내용이 있어 성화 작가들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중세 시대에 성경 다음으로 읽힌 이 책은, 오늘날에도 무수한 미술 작품과 문학 작품, 그리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에 영향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황금전설을 근거로 한 예수 성탄이기에 성탄의 엄숙함 보다 훈훈한 가운데 구수하고 감동적인 내용이 많아 성탄을 예배의 대상만이 아닌 축제의 대상으로 변모시켜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




요셉 일가는 처음부터 베들레헴에서 방을 잡을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숙박업소가 만원이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빈털터리였기에 방을 잡을 엄두도 못 내고 골목을 기웃거리다 집들 처마가 맞붙은 곳에 있는 빈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데다 장사꾼들이 사용하던 소나 나귀를 묶어두던 곳이어서 위생상태도 불결하기 짝이 없어 산모의 해산장소로는 더 할 수 없이 열악한 곳이었다.

작가는 이런 처지를 강조하기 위해 마당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겨 정돈되지 않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그리면서 자신의 성탄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혹한 절망과 운명의 장소가 바로 인간의 구원과 희망 이라는 역설적 표현으로 변화되면서 그리스도 수난의 비참함과 부활의 영광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 된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있던 밀짚을 깔고 그 위해 추위를 가리기에는 너무도 열악한 포대기에 거의 알몸 수준으로 누워 계신다.
‘황금전설’을 보면 마리아는 먼저 구유에다 밀짚을 깔고 그 위에 포대기를 덮은 후 아들 예수님을 눕혔다고 되어 있다..

그분은 푸른 빛 포대기위에 계시는 데 이것은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가 감탄하신 대로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놀랄 만큼 초라한 일이지만 여기가 또한 하느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밀짚은 이런 면에서 침대 쿠션 겸 일종의 방한 장치인데, 한겨울 밤에 갓 태어난 아기가 얼어 죽지 않도록 나름대로 준비한 셈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참으로 열악하고 비참한 주님의 성탄을 충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성탄절 장식은 더 없이 화려하기에 자칫 성탄의 진면모를 잊고 들뜨기 쉬운데, 이 아기는 우리가 지녀야 할 성탄의 참 기억을 일깨우고 있다.





누워계신 아기 예수 곁에 마리아가 무릎을 꿇고 계시는데, 얼핏 보면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아니다
무릎을 땅바닥에 붙이고 허벅지부터 허리까지 곧게 세운 자세로 꿇어앉아 있다.
아기를 낳노라 엄청난 산고를 겪었을 텐데 산모가 이렇게 허리에 부담 가는 자세로 앉아 있는 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이 자세는 중세기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1303~1373)가 환시 중에 본 광경을 재현한 것이다.

성녀 비르짓다는 어릴 적부터 하느님께만 몰두하는 경건한 삶을 살면서 자주 환시를 보아왔는데, 과부가 되고 나서 시토 수녀회에 들어가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기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마리아의 출산 내용에 관한 것이 있는데, 이 장면은 바로 성녀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성녀의 환시에 의하면 성모님은 동방교회에서 상상했던 것처럼 누워서 아기를 낳은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허리를 세운 자세로 앉아서 낳았다는 것이다.

이 성녀가 전한 성모님의 해산 자세는 중세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어 처음에 알프스 북부 지역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다 15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도 널리 퍼졌다.
예수 성탄을 좀 더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작가는 이 내용을 받아 들여 예수 성탄의 새로운 모습을 창출했다.





아내인 성모님의 뒤편에 예수의 아버지이신 아버지 요셉은 나귀 안장에 걸터앉았다.
갓 결혼한 남자로서는 너무 늙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중세기 신학의 영향이었다.

이 당시 화가들은 성가족의 초상을 그릴 때 요셉을 늘 한물간 노인으로 그렸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열악한 환경에서 아기를 낳은 아내에 대한 조그만 애정이나 연민의 표현도 없이 아주 무관심한 모습으로 시선을 모자에게 두지 않고 딴 곳을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빠진 모습이다.

한마디로 구세주의 탄생에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이다.
이것은 중세기에 성모님의 동정성을 과장하고 , 구세주 탄생에 있어 성모님의 역할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성 요셉은 여러 면에서 무능한 존재로 표현된 것의 대표이다.
16세기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겨 성 요셉의 멋스러움을 자주 거론하시고 새로운 수도원을 시작할 때 반드시 성 요셉의 이름을 넣은 것은 이처럼 왜곡된 요셉 신심에 균형을 찾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이 구세주의 성탄 장면으로는 너무도 어설프고 초라한 것과 다르게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하는 다섯 천사들은 반듯한 모습들이다.

미용실을 갓 다녀온 것처럼 매끔하게 장식을 한 머리에다 값진 목걸이를 걸친 복장은 웬만한 패션쇼에 나가도 당당할 만큼 세련된 모습들이다.
세 명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중세 악기인 류트(Lute)를 들고 나름대로 합창에 좋은 자세로 서 있기에 그들의 합창 역시 수준급임을 관객들이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이 반듯한 천사들은 인간 생명의 기쁨과 환희를 강조하던 피렌체 초기 르네상스 의 영향을 이은 것으로 피렌체 대성당 성가대 조각과 (성화해설 : 31번 ) 연관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너무도 초라하고 서글픈 형상과 대조적으로 천사들은 우아함과 생기를 표현함으로서 너무도 가난한 모습의 인간으로 오셨지만 인간 구원이라는 생명의 활력을 주신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진면모를 천사들의 세련된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도 예수 성탄의 역설적 의미 , 즉 인간적으로는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이는 현실이 하느님 안에서는 너무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실상임을 알리는 복음 선포를 하고 있다.

관객들은 천사들의 모습에서 주님 성탄 때 천사들이 부른 다음 찬가를 귀로서 듣는 게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는 감동을 받게 된다.

"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으로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 루카 2: 14)

그런데 이상한 것은 더 없이 세련된 복장을 한 천사들이 맨발로 서 있다.

중세기 신발은 오늘날 여성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명품 핸드백처럼 신분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러기에 신발을 신는 계층은 맨발에 비기면 훨씬 상위 계층에 속했기에 주인은 신발을 신지만 노예는 맨발이었다.

천사들의 맨발은 알몸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가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직접적 염원의 표현임과 동시 알몸으로 누워계신 아기야 말로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또한 구약 탈출기에 나오는 하느님을 만나는 모세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 네 신발을 벗어라."( 탈출기 3: 6)
천사들은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운 모습이나 이들은 자기들의 발치에 있는 아기가 바로 구세주임을 자기들의 벗은 발로서 알리고 있다.




오른쪽 뒤에 후줄구래한 옷차림의 두 목자들이 지팡이를 들고 서 있다.

목자 하나가 팔을 들어 그림에는 나와 있지 않는 별똥별이 총총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데 , 이것은 구약의 다음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는 표시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야 7:4)
지붕이 우박을 맞은 것처럼 반쯤 파괴되었고 벽이 일부 무너진 허름한 집은 앞이 트인 상태여서 더 더욱 가련했던 성탄의 모습을 알리고 있다.

이 서글픈 지붕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데, 까마귀의 상징은 우리와 전혀 반대이다.

성서에서 까마귀는 예지와 점술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아의 홍수 사화에서 40일이 지난 뒤 노아는 홍수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를 내보냈다.(창세기 8: 6)

사막 은수자들의 전기를 보면 까마귀가 그들에게 양식을 날라 주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1 열왕기 17: 1- 7)

엉성한 지붕위에 까마귀는 천사들과 목동과 또 다른 방법으로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크리스챤들에게 너무 감동적이면서도 역사적 사건으로서 기술되고 있는 성서의 내용을 당시 사람들의 취향에 맞춰 감동과 교훈을 줄 수 있는 축제의 모습으로 변모 시켰다.

원채성화가 작품의 대종이었던 중세였기에 작가의 작품은 오래 동안 잊혀진 존재였으나 근대 미술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어 15세기 이태리의 최고 화가로 평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작품 앞에 서면 빈약한 성탄 표현을 통해 전통적인 성탄성가인 "어서가 경배하세 (Adeste fideles)"의 노랫말이 눈으로 다가오게 되면서 성탄의 의미가 머리가 아닌 온 몸으로 와 닿게 된다.

"모든 형제들아 즐겨 노래하며 베틀레헴 성밖에 달아가세
구세주 그리스도 강생하셨도다
어서가 경배하세, 어서가 경배하세 , 어서가 경배하세 경배하세 "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