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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및 세계교회현황

~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 교회, 지하 히에로무스 동굴 ~

 

베들레헴 예수님 탄생교회, 지하 히에로니무스 동굴 (3)



예수님 성탄 성당과 카타리나 성당의 평면도

오른쪽 도면에서 7번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지하 동굴이 있는 곳이고 그 위에 지어진 성탄성당의 중앙 제대가 6번(그리스 정교회)이다. 7번 옆에 양쪽으로 둥글게 되어 있는게 성탄 동굴로 들어가는 지하 계단이다. 7번쪽에서 4번 그리고 카타리나 성당 (8번 도면),  카타리나 성당의 작은 정원(9번)으로 이어지는 오란색 점선은 지하 동굴의 도면을 그린것이다.

4번 도면쪽과 9번 도면쪽으로 보면 지하 도면에 십자가의 표시가 되어 있는것이 있는데 4번쪽(오른쪽 위쪽) 위쪽에 있는것이 무죄한 어린이들에게 봉헌된 제대 경당, 성요셉에게 봉헌된 제대, 중간은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에게 봉헌된 제대, 히에로니무스 무덤 제대, 그리고 왼쪽 아래가 히에로니무스 서재 경당이다.



카타리나 성당에서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계단



카타리나 성당에서 지하 동굴로 내려가는 계단



예수님 성탄 동굴로 이어진 출입구, 평상시엔 닫혀져 있어서 카타리나 성당을 통해 출입한다.

카타리나 성당에서 지하 계단으로(예수님 성탄 동굴에서 이어지는 통로도 있는데 평상시에는 닫혀 있고, 공식 전례시에만 사용함) 내려가면 크고 작은 여러개의 동굴들이 있다. 우선 성모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가 있고(마태 1,18-25),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마태 2,16-18) 그리고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제대와 성인이 활동했던 서재 동굴,

그리고 386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히에로니무스 성인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수도생활을 했던 바울라 성녀와 바울라의 딸 에우스토키움 동정성녀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다. 그 외 크고 작은 동굴들과 물을 저장했던 곳 등이 있다.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

예수님 성탄 동굴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곳으로, 카타리나 성당에서 지하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마주하고 있는 곳이 성모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 성인에게 봉헌된 제대이다.;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



요셉 성인께 봉헌된 제대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에집트로 피신하라 지시하자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떠나가서...(마태 2,13-15)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성 요셉 제대쪽에서 바라본 보이는 계단은 카타리나 성당에서 내려오는 계단이다. 사진 왼쪽으로 들어가면 히에로니무스 성인과 성녀 바울라 그리고 에우스토키움 성녀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는곳이고, 사진의 오른쪽은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가 있는 곳이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헤로데는 베들헤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또래와 그 아래 아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마태 2,16-18)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제대 양 옆과 뒤쪽엔 무덤처렴 파여져 있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제대 주위의 무덤처럼 보이는 작은 통굴들.



무죄한 어린이들의 제대, 제대 주위의 무덤처럼 보이는 작은 통굴들.



지하 동굴 안엔 크고 작은 동굴들이 여러개 있다.



지하 동굴 안엔크고 작은 동굴들이 여러개 있다.



지하 동굴 안엔크고 작은 동굴들이 여러개 있다.<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과 제대>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과 제대

히에로니무스 : Eusebius Hieronymus, 영어: Jerome. 우리말: 예로니모, 347-419/420년. 축일 9월30일 성 히에로니무스는 389년경 베들레헴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고, 베들레헴에서 히브리어로 된〈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 하였다. 이것은 히에로니무스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과 함께 공인된 '불가타(Vulgata) 성서'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로 사용되고 있다. 성서와 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히에로니무스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다.

히에로니무스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중의 하나이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은 두 모녀가 사망하자 자기 서재 근방 동굴에 그들을 묻어 주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성인 자신도 생시에 자신의 비문까지 작성해 두고 자기 서재 근처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13세기에 성인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과 제대



왼쪽 아래가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과 비문, 이곳에 영원히 머무르길 원하는 비문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무덤과 비문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묘지 제대가 있는곳에서 들어온 입구를 바라보고<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 성녀에게 봉헌된 제대>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 성녀에게 봉헌된 제대

오른쪽 제대 아래엔 히에로니무스 성인이 두 성녀가 세상을 떠나자 동굴에 묻어 주었음을 기억하는 무덤 뚜껑과 비문이 있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이 두 성녀가 세상을 떠나자 동굴에 묻어 주었음을 기억하는 무덤 뚜껑과 비문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 성녀에게 봉헌된 제대



성녀 바울라 : Paula, 347-404년, 축일 : 1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바울라는 15세 때인 362년 율리아 가문의 이교도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는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바울리누스(Paulinus)를 통하여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히에로니무스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경 그녀의 큰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둘째 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402년경에 병에 걸려 2년 후인 404년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



성녀 에우스토키움 : Eustochium, +419년경, 축일 9월 28일

성녀 바울라(Paula, 1월 26일)의 딸인 성녀 에우스토키움 율리아(Eustochium Julia)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그들의 영적 지도자로 모시고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382년에 그녀는 평생 동정을 서약하였는데, 그녀의 갸륵한 행동에 감탄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동정을 지키는 일에 관하여”(384년)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 그녀는 어머니와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예루살렘 성지로 갔는데, 이들 모녀는 베들레헴에서 히에로니무스의 성서 번역을 여러 면에서 도왔다.

또한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가 설립한 새 공동체를 지도하는 어머니를 도왔고, 후일 그녀는 어머니 바울라가 운명하였을 때 원장이 되었다. 에우스토키움은 이 수도원을 크게 개혁하였으나 약탈자의 무리들이 수도원을 파괴한 이후로는 다시 일으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그녀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베들레헴에서 운명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글에 의하면 그녀는 조그마한 육체에 큰 덕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서재가 있었던 동굴>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서재가 있었던 동굴

동굴 가장 안쪽에 있으며 이곳에서 성인은 성서 번역과 집필 활동을 하였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서재가 있었던 동굴

성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가 번역한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이다. 382년 교황 다마스쿠스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인 히에로니무스에게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에로니무스는 〈70인역 성서〉를 사용하여 새로운 라틴어역을 펴냈으나,

〈70인역 성서〉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고 히브리 성서 원본을 토대로 〈구약성서〉 전체를 번역하기 시작하여 405년경에 이 작업을 끝마쳤다.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은 즉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6세기 중엽부터 모든 낱권 성서들을 하나의 겉표지로 묶은 성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개신교와 유대교에서는 외경으로 취급하고 로마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하는 〈70인역 성서〉의 일부도 이전의 번역본에서 취하여 포함시켰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가 라틴어 성서로서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선언했으며, 결점을 최소한으로 줄여 이를 출판하라고 요구했다. 1592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발행한 이른바 〈클레멘스 불가타 성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 있는 성서본문이 되었다. 이것을 토대로 1941년에 '성심회' 역본이 번역되었고 현대에 들어와 여러 교정판이 출판되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불가타 성서를 개정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서재가 있었던 동굴



히에로니무스 성인의 서재가 있었던 동굴



히에로니무스 서재 경당 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