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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모자와 성인들 (1506)talian
작가 : 로렌죠 로또( Lorenzo Lotto : 1480- 1556)
크기 : 83X 105cm 목판 유채화
소재지 : 영국 에딘버러 (Edinburg) 미술관
작가의 기량과 신앙이 조화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데, 로렌죠 로또는 그의 신앙과 작품성이 맞아 떨어지는 작가였기에 , 그의 작품은 바로 자신의 신앙고백으로도 볼 수 있다.
작가는 베네치아가 르네상스 예술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대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다가 그의 말년엔 성가정의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로레토 성지에 가서 삶을 마무리 할 만큼 신심과 예술성이 조화되던 작가였다.
이 작품은 15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성스러운 대화(Sacro conversazione)라는 화풍으로 성모자와 성인들을 등장시키는 양식이다
이것은 성인들이 성모자를 향한 사랑이 영적 결혼처럼 긴밀한 것임을 강조하는 양식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아기 예수와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가 반지를 교환하면서 영적합일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시대를 흐르면서 그 지역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던 성인들이 성모자의 양편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당시 작가의 고향인 베네치아 성인공경에 대한 신심표현을 확인하기에 좋은 것이다
성모자 오른쪽으로는 성 예로니모와 성 베드로가 계신다
모두 머리가 벗겨진 노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영적 지혜와 권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성 예로니모는 베네치아에서 특별히 공경받던 성인이신데, 신구약 성서를 당시 언어였던 라틴어로 번역하신 성서학자이시며 불같은 믿음으로 알려진 분이신데, 보통 추기경 복장으로 등장하시는데 여기는 성 베드로와 같이 충분히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혜가 영글은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옆에 성 베드로 사도 역시 예로니모와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계신다. 보통 성 베드로 사도는 천국 열쇠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에선 성 예로니모 사도와 함께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은 성 마르코이나 , 성 베드로 사도 역시 베네치아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던 성인이었기에 베네치아 대성당의 주보는 성 베드로이다.
베드로 사도를 대성당의 주보 성인으로 모신 사연은 신앙 이전에 베네치아 시민들의 자부심을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지방문화가 서로 다르게 발달한 이태리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은 피렌체 공국과 함께 자기 처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그들의 경제적인 힘과 탁월한 예술성은 이태리에서 자기들이 가장 우월하다는 자부심에 빠지기도 했기에 베드로 사도를 대성당의 수호성인으로 모신 것은 자기들의 처지가 로마에 비길 수 있다는 은근한 과시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모님의 무릎에 서 계신 아기 예수님은 예로니모 성인이 내민 가죽 뭉치를 응시하고 계신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보다 마리아의 아들처럼 앙징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아기의 모습으로 가죽뭉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이 가죽 뭉치는 예로니모 성인이 번역한 성서의 필사본으로 볼 수 있으며 두 성인이 주님께 바치는 나름대로의 인생 전체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베드로나 성 예로니모는 서로 다르긴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친 성인이기에 이들의 믿음과 정성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대견스럽게 이들이 내민 가죽 주머니를 응시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당시의 말씀을 세상에 전한다는 사명으로 일생을 성서 번역에 바친 다 바친 예로니모와 허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베드로를 등장시키면서 당신을 충실히 따랐던 사람들을 각별히 사랑하신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천국 열쇠를 쥐고 교회의 으뜸으로 통하던 베드로 사도나 항상 추기경의 복장으로 통하던 성 예로니모는 여기서 너무 소박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기 예수님 역시 성모님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이지만 손을 들고 관객들을 관객하는 표현이나, 동방 이콘에서처럼 아기가 아닌 충분히 성숙한 모습의 어른으로 나타나는 것과 대조적으로 복장을 보나 태도로 보나 당시 서민 가정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자기의 신앙표현을 하고 있다.
당시 베네치아는 해외 무역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이 됨으로서 사치가 대단하고 전성기 르네상스는 이것을 부채질 했기에 당시 베네치아는 비록 성화라도 호화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것이 대종이었다.
작가는 탁발의 영성이야 말로 베네치아의 사치를 극복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겨 당시의 다른 작품과 전혀 다른 정서로 표현하고 있다
아기 예수님이 성 예로니모와 사도 베드로를 향해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성모님은 중세 교회를 크게 쇄신했던 탁발 수도회 창설자인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를 바라보고 계신다.
예수님이 두 성인을 대견하게 여기시는 것 같이,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를 너무도 사랑하고 닮았기에 제 2의 그리스도로 불리던 성 프란치스코를 보시며 그의 가슴에 새겨진 십자가의 흔적을 손으로 짚어보신다.
성녀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모범에 감화를 받아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항상 성 프란치스코의 지도를 받는 영적인 오누이의 삶을 살면서 영적으로 침체된 중세 교회에 복음적 생기를 불어 넣은 성인들로서 당시 이웃 나라와의 무역 등으로 부유함의 극치를 누리던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복음적 가난의 삶으로 남다른 감동을 주던 성인들이었다.
인간이 부유한 처지에 머물게 되면 부유함이 삶의 타락의 함정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게도 되나 반대로 부유함의 허상을 발견한 사람들은 복음적인 삶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는데, 당시 베네치아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위상은 세상 수준의 고귀한 삶이 아닌 영적 수준의 고귀함을 제시하는 모델이 되었다.
성모님은 주님 사랑의 표식으로 받은 가슴의 상처를 가르키는 프란치스꼬를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그에게 각별한 사랑을 표현하신다.
성모님의 허리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띠고 있는 탁발 수도자의 상징인 허리띠를 매심으로 프란치스코와의 극도의 친밀감을 표현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역시 어느 성인들 보다 성모님께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 죄인을 구원하실 구세주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어머니로 공경했기에, 성모님과 프란치스코의 사랑은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이룰 수 있는 신뢰와 우정의 극치임을 드러내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드리는 인사"라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성모님을 향한 자신의 감회를 표현했다.
"거룩한 부인이요 여왕이시여, 하느님의 성전이 되신 동정녀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당신을 간택하시어,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시며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협조자이신 성령과 함께
당신을 축성하셨나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이기에 후대에 비겨 훨씬 검박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나 베네치아 회화의 특성을 성모님의 망토를 통해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성모님의 망토는 다른 작품과 달리 감청색으로서 유난히 크다.
당시 감청색 안료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생산되어 값비싼 것이었기에 성모님께만 사용하는게 관례였으나 , 작가는 다른 작품과 비길 수 없이 넉넉한 분량을 사용함으로서 성모님의 고귀함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미술 사학자인 베렌슨은 베네치아 회화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베네치아와 쌍벽을 이루던 피렌체의 회화를 보면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에 의해 완성되었던 원근법이나 인체 해부학적인 표현 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나 , 베네치아 화풍은 화려한 색상의 배합을 통해 영글어진 그림 자체를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관람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특징으로 잡았다.
이런 베네치아 화풍에 작가는 자기 신앙을 담았기에 다른 작가의 작품처럼 화려한 것 인상 보다는 성 프란치스코가 풍기는 소박함의 모습을 담았다
성 예로니모와 성 베드로는 성 프란치스코와는 전혀 다른 교회 지도자의 힘있고 화려한 모습으로 드러나는게 관례인 것과 대조적으로 작가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에 두 성인을 맞춤으로서 나름대로 교회 개혁의 의지를 표현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닮은 모습이 아니라 갈릴레아 출신의 예수의 모습을 닮아야 함을 작가는 작품을 통해 표현했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이전 인간 성모님의 아들 예수님은 여느 가정의 어린이처럼 귀엽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제도적인 교회가 소홀히 하기 쉬운 예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금관의 예수와는 거리가 먼 인간 예수의 모습이다.
깊은 사랑을 표현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경건한 분위기속에서도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고 있다.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