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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사도 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복음 요한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식사시간에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배님들이 드시는 음식이었지요. 글쎄 밥에 마가린과 간장을 넣어서 비벼 먹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유에 밥을 말아서 먹는 것처럼 아주 신기하기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저것을 먹지?’라는 말과 함께 절대로 못 먹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에는 오히려 제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되더군요.

이와 비슷한 체험을 군대에서도 했지요. 자대 배치를 받고서 선임 병들의 라면 먹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글쎄 라면을 끓여먹는 것이 아니라 불려서 먹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제 자신이 생각하기에 라면은 펄펄 끓는 물에 넣어 익혀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버너와 같은 화기를 사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라면 봉지에 뜨거운 물을 넣어서 라면을 불려 먹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봉지라면’입니다. 우동 면발처럼 퉁퉁 분 것을 어떻게 먹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없어서 못 먹더군요.

살면서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니다’ 싶은 것들이 더 괜찮은 경우도 있더군요. 그러므로 무엇이든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쉽게 단죄해서도 안 됩니다. 대신 ‘그럴 수도 있어.’라는 마음. 특히 여기에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 더해진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다투고 싸우는 세상이 아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세상이 분명히 될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단어가 이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말만 할 뿐, 가장 실천하지 않는 단어가 또 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또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비싼 학원에 보내거나 비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 주면 잘 크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사랑을 나누는 시간을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문제아가 되어 나중에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말로만 외치는 사랑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주님의 진정한 언어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을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리고 지금 당장 행해야 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싫증이란 표현은 적절치 않아요. 행복에 너무 익숙해졌을 뿐이에요. 코감기에 걸려 봐야 코로 숨 쉬는 일이 얼마나 큰 복인지 깨닫는 것처럼(애거사 크리스티).


카페의 벽에 걸려 있는 예쁜 유화. 이 그림처럼 예쁜 오늘을 만드세요.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 오랫동안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십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런 말씀을 해주시네요.

“그런데 너의 글에는 고민이 없는 것 같아.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아서 좀 아쉽구나.”

이 말에 다른 신부님께서도 “맞아. 글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아. 깊이가 부족해.”라는 말도 해주십니다. 모두가 더 글을 잘 쓰라고 해주시는 말이겠지요. 물론 제 스스로도 저의 글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칭찬이 아닌, 이러한 비판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더군요.

겉으로는 비판을 많이 해달라고, 그래야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칭찬받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더군요. 즉, 비판받고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듣고 싶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을 나의 이웃에게도 해주었으면 합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니 그런 말에 대해서는 인색했고, 대신 비판과 부정적인 말만 쉽고 편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입에 발린 말도 때로는 필요한데 말이지요.

오늘은 이런 말을 해 보면 어떨까요?

“멋져요. 예뻐요. 아름다워요. 당신과 함께 있어 기뻐요.” 등등의 상대방이 좋아하는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