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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 열며,,, ~

2013년 5월 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사도 1,15-17.20-26

15 그 무렵 베드로가 형제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 16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붙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해서는,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언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17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20 사실 시편에 ‘그의 처소가 황폐해지고, 그 안에 사는 자 없게 하소서.’ 또 ‘그의 직책을 다른 이가 넘겨받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25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26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복음 요한 15,9-1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어제 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새벽 묵상 글에 썼었지요. 그리고 정말로 많은 분들이 기도해주셨습니다. 새벽 카페와 각종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 제게 많은 기도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셨습니다.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너무나 많은 분들이라 이렇게 부족하지만 새벽 묵상 글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사실 기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85세의 고령에, 연속 두 번이나 수술해야 하는 그래서 의사선생님께서 직접 ‘죽음’을 이야기 할 정도로 많이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지난주에 수술하셨던 허리에만 신경을 써서 정작 시급한 치료를 해야 할 부분을 찾지 못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비교적 빨리 찾아 수술을 할 수 있었던 점, 그리고 그 힘든 수술을 이겨내신 점 모두 기도의 힘이며 주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도 중환자실에 계시지만, 많이 회복하셔서 곧 일반병실로 옮기실 것이라 하더군요. 글쎄 당신 심심하시다고 안경과 신문을 가져다 달라고 하실 정도니까요.

수술 직전, 아버지께서는 계속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항상 당당하게 사셨고, 전통적인 유교 관습이 젖어 있으시는 분이라 조금이라도 낯 뜨거운 말도 해 본 적도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을 하고 계시니 얼마나 약해지셨다는 것입니까?

주님 앞에서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으며,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내어 맡기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서 이 세상에 났고, 내가 알아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주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의 삶은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높이려고 하다 보니 물질과 권력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경쟁상대로만 보기 때문에 사랑보다는 미움과 이기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외면하기에 악에 쉽게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나를 움직이는 주체가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철저히 주님께 내 자신을 맡기는 삶이 필요합니다. 물의 흐름에 반대로 수영을 하면 어떨까요? 너무나 힘듭니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면 어떨까요?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기 힘듭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바람을 등에 지고 가야 앞으로 쭉쭉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시금 올리며, 여러분들을 위해 저 역시 기도로 응답하겠습니다.

인생이란 또 사랑이란, 우리 마음을 처음에는 나에게,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조금씩 열어 나가는 과정이다(대니얼 고틀립).


중환자실 면회 끝나고 편한 마음으로 카페에서 커피마셨습니다. 사진은 카페정원.


내 주변을 잘 바라보세요.

지난번에 서울 인사동에 갔다가 길에서 연주하며 노래하는 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허름하고 초라해 보이는 옷을 입었지만 멋진 연주와 아름다운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길을 멈추고 음악을 감상했지요. 한 곡을 다 감상한 뒤에, 잘 들었다는 의미도 그분들이 준비한 기부함에 약간의 돈을 넣은 뒤에 다시 제 갈 길을 갔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아주 유명한 가수에 연주자들이라면 어떨까요? 이렇게 한곡만 듣고서 제 갈 길을 갔을까요? 어쩌면 끝까지 남아서 싸인(Sign) 이라도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지요.

어느 추운 1월, 미국의 어떤 기차역에서 어떤 한 남자가 바이올린을 들고 바흐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추워서 그런지 아무도 그의 연주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해보여서인지 음악도 듣지 않고 1달러 지폐 하나 던지고 지나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바흐의 곡을 한 시간 동안 연주했지만, 그의 앞에 멈춰 섰던 사람은 단 6명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시간 동안 벌은 돈은 32달러였지요. 연주를 듣고 박수를 쳐준 사람 역시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재능 있는 뮤지션으로 평가받는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습니다. 불과 이틀 전 콘서트에서 최하 13만원부터 시작하는 표가 모두 매진될 정도였는데, 그 좋은 연주를 기차역에서는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진짜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이야기하시고 활동하시는데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 주변을 더욱 더 유심히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