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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화, 미술

++ 사과가 있는 정물 / 폴 세쟌느 ++

 

제목 : 사과가 있는 정물(1893- 1894)

작가 : 폴 세쟌느(Paul Cezanne:1839- 1906)

크기 : 켐프스 유채

소재지 : 미국 폴 게티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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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에서 성미술이라는 것은

 신구약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대종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해서 인간의 가치가 강조되고

계몽시대를 맞으면서

교회의 위상이 더 이상 인간 사회의 상위 집단이 아닌 보통 집단으로 격하되고 ,

 종교 예술품의 제작에 협조자였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 집단이 몰락하면서

이런 류의 성미술은 자연스럽게 퇴조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미술 퇴조 현상의 한부분에 불과하고 

 종교미술의 폭넓은 경지를 새로이 여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작가들 중에 만물안에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게

성미술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작품에 접근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관점에서 인상파 화가로서

 지난 세기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폴 세쟌느(Paul Cezanne: 1839- 1906))를 들 수 있다.

 

그는 말년 15년을 꾸준히 성당에 나가는 경건한 삶을 살면서도

 풍경화나 정물화에만 몰두했을 뿐

 성서를 주제로 한 그림은 한점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물화를 통해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을 너무도 강렬히 표현함으로서

평범한 일상 삶의 현실에서 하느님의 발자국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서의 정신을 깊히 이해하고 심화시킨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성서적 주제에 전혀 접근하지 않고

 평범한 일상 삶의 주제를 통해 대단히 영성적인 표현을 했다.

 

초세기 교부들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창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왔다”(창세기 1: 10. 12. 19, 25, )라는

 표현과 마지막 단계인 인간 창조하신후의 감회를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왔다”(창세기 1:31)

의 주석을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느님 사랑이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해석했는데,

 현대에 오면서 여러 작가들은 바로 이 관점에 동감했다.

 

그런데 창세기의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심원한 의미가 있다.

"선과 아름다움", " 건강이 좋은 상태", "명랑함과 기쁨 "등인데,

 이런 견해는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반추 해석되면서  

모든 것은 하느님 선성의 표현이며

하느님의 선성은 곧 아름다움으로 표현된다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작가는 인상파 화가의 대가로서

 유복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가의 걷기를 바라는

부모의 권고를 뒤로하고 예술의 길을 선택해서

 인상파 화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작가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은 후

그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빠리를 떠나

자연이 너무도 아름다운 고향 프로방스로 돌아와

칩거상태와 같이 외부와 절연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정물화 제작에 혼신의 노력을 다 했다.

 

 

그는 과거 성화의 주제가 되었던 성서적 내용이 아닌

 하느님의 작품인 세상을 표현하는 정물화나 풍경화속에 들어있는 영성을 발견하여

 심도있게 표현함으로서

신학적 표현의 경직성과 폐쇄성에 실망을 느낀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신선함을 한껏 선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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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많은 정물화에 사과가 등장하고 있는데 ,

이것은 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자연주의 문학의 대명사< 목로주점>의 작가인 에밀 죨라(1840- 1902)와의

 특별한 우정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사과는

 그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에서 나온 것이다

 

빠리에서 태어난 에밀 죨라는

가족이 프로방스로 이사오면서

 중학교에서 폴 세쟌느를 만나게 된다

죨라는 7세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 살고 있는 그리 유복하지 못한 처지에다 신체적으로 왜소해서

 반 급우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이때 힘이 세고 덩치도 큰데다

그 지방 유지의 부모를 둔 세잔느는

죨라를 괴롭히는 급우들을 혼내면서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지켜 주었고 ,

 이것은 죨라에게 대단한 감동의 추억이 되었다.

 

어느 날 죨라는 자기를 지켜주는 고마운 친구에 대한 감사와 우정의 표시로

 자기 마음을 담은 탐스런 사과를 한알을 선물했고,

 이것은 세잔느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친구를 만났다는 큰 기쁨의 기억이 되었다.

 

그가 빠리의 명성을 접고 고향에서 작가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한알의 사과로 빠리를 놀라게 하리라

기지로 정물화의 주제로 사과를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아름다운 우정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작가에게 어린 시절 순수한 우정의 기억이 담긴 사과 한알은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데

어떤 기존의 성화 주제보다 더 힘있는 것으로 여겼기에

  사과를는 작가 정물화의 화두가 되었다. 

 

 

작가의 사과는 기존의 개념을 깨트리고

새로운 사조를 여는 위대한 창조 행위의 실험 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과를 중심으로 등장시키기 위해 밝게 표현했다

주변의 도자기의 은은한 색깔과 대조되는

이 밝음의 표현은 평범한 일상의

삶안에서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의 상징과 같다

 

이 사과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사하신 모든 것들을 보배로운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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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는 18세기 까지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하던 분야였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대상을 작가의 균형감각,

 의도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하고 배치할 수 있다는

 작가의 창조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이다.

 

작가는 색체의 풍요로운 처리를 통해 형태를 완성시키는

 기법을 통해 기존의 정물화라는

장식효과 수준의 통념에서 벗어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깊은 의미성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켰다.

 

물병과, 술병, 식탁에서 사용되는 항아리가 서로 다른 크기로 서 있다.

이것은 작가의 고향인 프로방스라는

시골 가정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며

 식사와 관계되는 것이기에 삶의 즐거움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기구는 작가가 친구집에서

 오래 사용하던 것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나열하여

평소 작가가 이런 것들을 통해 느끼고 있던 기쁨을 전하고 있다.

 

작가는 세 개의 생활 용품 도자기를

더없이 깊이 있는 색깔로 처리하면서 전체적 조화와 풍요로움을 더 했다

 

즉 사과는 발랄한 생명의 상징이라면

 세 개의 도자기들은 삶의 기쁨을 선사하는

 역사가 있는 생활 용품들이다

작가는 서로 다른 크기와 높이를 통해

 단조롭기 쉬운 작품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중후한 색깔과 함께 위를 향한 도자기들은

 중후한 남성미의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작가의 천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이 평범한 사물안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선사하신

삶의 기쁨과 희열과 희망을 담아

어느 성서에 바탕을 둔 성화 못지 않게 멋진 신앙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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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청색에다 아라베스크 무늬가 있는 식탁보는

 단조롭기 쉬운 식탁의 분위기를 한층 더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옆에 밝은 색깔의 양념 그릇이 있다.

양념이 음식의 맛을 내듯 이

 식탁은 하루의 일과를 끝낸 가족들이나 그리운 친구들이 모여

삶의 기쁨을 나누며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작가는 우리 삶에서 너무나 친근한 식탁을 통해

하느님의 보호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기쁨과 희망을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2년에 걸쳐 완성할 만큼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화를 표현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했다.

 

 

작가의 이 정물은 미켈란젤로가 심혈을 다해 그린

 식스티나 경당의 천지창조의 또 다른 분신과 같다.

사과라는 하느님의 작품을 작가의 손을 통해

 너무도 하느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평론가인 모리스 드니는

 작가가 그린 사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작품의 사과는 껍질을 깍고 싶지 않다.

잘 그린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하지만

 작가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네고 있다.“

 

현대에 와서 종교적 주제의 성화 보다

일상 삶을 주제로 한 풍경화나 정물화가

 더 많아지는 현실에서

작가는 이런 것들을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도록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