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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샘(Well of Marah)-쓴물을 단물로 바꾼 샘
마라의 샘
카이로를 출발하여 '카이로-수에즈 운하 길'로 약 130km 정로 가면 수에즈 시 북쪽 1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수에즈 운하 ‘아흐마디 함디 터널’(Ahmed Hamdi Tunnel)에 도착한다. 이 터널은 1980년 4월에 개통된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터널로 길이 4.5km인 이 터널은 1.6km가 지하로 수에즈 운하 37m 아래에 뚫려 있다.
아흐마디 함디 터널 2.마라의 샘
모세의 샘(Moses Spring)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마라의 샘은(Well of Marah, 히:?????)은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있는 오아시스로 수에즈 운하를 관통하는 아흐마드 함디 터널에서 남쪽으로 27km 거리에 있다.
수에즈 운하
홍해 바다
홍해 바다를 거쳐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는 배
수에즈 해저 터널을 지나 홍해를 따라 내려가면 해변과 가까운 곳에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한 첫 번째 오아시스가 나오는데 현지인들은 이곳을 아윤 무사(Ayun Musa)라고 부른다. ‘모세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모래벌판 위에 대추야자 나무가 울창한 이곳은 구약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라의 샘’(탈출 15,22-25; 민수 33,8-9)이다.
탈출 15,22-25 모세가 이스라엘을 갈대 바다에서 떠나게 하니, 그들이 수르 광야로 나아갔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을 걸었는데도, 그들은 물을 찾지 못하였다. 마침내 마라에 다다랐지만, 그곳 마라의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다.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셔야 한단 말이오?” 하고 불평하였다.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으니, 주님께서 나무 하나를 보여 주셨다.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단 물이 되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우시고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백성을 시험하셨다.
민수 33,8-9 피 하히롯을 떠나서는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서 광야로 나가, 에탐 광야에서 사흘 길을 걸어가 마라에 진을 쳤다. 그러고는 마라를 떠나 엘림으로 갔다. 엘림에는 샘이 열두 개 있고 야자나무가 일흔 그루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 진을 쳤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갈대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름을 참으며 수르 광야를 사흘 동안 걸어서 마라에 도착했지만 샘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써서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마라’였다. 지하수에서 소금기가 있는 물이 민물과 섞여서 쓴맛을 내기 때문에 히브리어로 ‘쓴맛’ 또는 ‘괴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마라는 ‘쓰다’는 뜻 외에도 ‘반역하다. 불순종하다. 다투다. 저항하다’는 뜻을 포함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라의 오아시스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주님을 향하여 ‘반역하고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원망’한 첫 지역이 된다. 광야 생활을 시작한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집트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을 통해서 완고하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의 양과 소를 데리고 떠나가 주님께 예배드리라고 떠나보낸다.’(탈출 12,31-32 참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빵 반죽이 부풀기도 전에 반죽을 통째 옷에 싸서 어깨에 둘러메었다(34절).
성 카타리나 수도원 모세의 샘에 있는 프레스코화 : 왼쪽부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갈대 바다를 건너는 모습. 중간은 미리암이 기뻐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탈출 15,20-21). 오른쪽은 모세가 므리바의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이 흘러 나오게 하는 장면(탈출 17,1-7).
이렇게 빵이 부풀기를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한 와중에도 이집트인들에게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가지를 요구하면서 귀금속을 털어가는 모습을 마치 하느님의 축복인 양 전하고 있다(35-36절 참조). 주님께서는 열째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모세에게 “남자는 이웃 남자에게, 여자는 이웃 여자에게 은붙이와 금붙이를 요구하게 하라.”(출애 11,2)고 말씀 하셨다. 종살이 하면서 가장 탐냈던 것이 은붙이와 금붙이였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었다. 금붙이와 은붙이는 광야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후 주님께 돌아서서 이것으로 금송아지 우상(탈출 32,2-6 참조)을 만들 것이다.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증나게 하고 허기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눈에도 가득한 것은 금붙이와 은붙이가 아닌가? 마라의 샘가에서 베두인 여인들이 팔고 있는 반짝이는 장신구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아직도 목마른 우리들의 영혼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광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기다림과 성숙의 장소이며 사랑을 언약하는 계약의 장소이다. 사흘 동안을 걸었는데 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재를 상징한다. 물이 있기는 한데 마실 수 없게 쓰다는 것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죄 중에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성 프란치스코도 죄 중에 있었을 때는 나병환자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역겨운 일이었지만 주님의 자비로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에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다고 회상한다(유언 1-3 참조).
갈대바다에서 체험(탈출 14,15-20 참조)했던 하느님의 권능과 전능하심도 사흘 만에 고갈되었다. 모세와 주님께 대한 불평불만은 갈대 바다를 건너고 나서 바로 사흘 만에 터져 나왔다. 마실 물이 없다고,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그리워하는 것은 현실의 고달픔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이것이 정화의 시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차츰 반항하고 불평하면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날 것이다. 생명이 없는 광야에서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며 구원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상징한다. 베풀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 아이처럼 품 안에서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서 있는 그곳이 세상의 한 가운데이든 사막이든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감사드리는 일만이 남게 된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탈출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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