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황 바울로 3세와 그 손자들
크기 : 유화 200 x 173cm
작가 : 티치아노 베첼리오 (Tiziano Vecellio, 1489- 1576년)
소재 : 이태리 나폴리 까뽀디몬테 박물관 소장
나중에 더 자세히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띠치아노 (Tiziano Vecellio, 1489- 1576년)는 1520년경부터 당시 유럽 제일의 예술도시인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일하게 되고, 대단한 인문주의자인 벰보 추기경의 도움으로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이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인문주의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혔다.
그는 이전까지의 화가들이 조형을 중요시하던 것에서 이탈해, 색채를 중요시 하는 화풍을 일으키면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보기 편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은 베니스 화풍의 창시자 역할을 한다.
그전까지 종교적 주제가 대종을 이루던 다른 작가와 달리 그의 양식은 좀 더 자유로운 경향을 띄게 되면서 귀족들의 초상화, 종교화, 희랍신화를 주제로 한 나체화 등의 작품을 그려 르네상스 화가로서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명성에 도취되어 약간 거만스럽긴 했으나 인문주의에 대해 약간은 모호하고 조소하는 듯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 예술이 어떤 것인가를 알리는 산파 역할을 했다.
위의 작품은 당시 유럽사회를 주름잡던 실세였던 <바오로 3세 교황과 손자들>의 초상화라는 점에서 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미완성이나 겉으로 화려하고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교황 집안의 파란만장한 명암이 교차되는 실상을 잘 묘사한 면에서 이 초상화 자체가 심리표현을 멋지게 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분석해보자.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은 이미 76세의 늙은 나이이나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이지 않은 아직 강단 있는 노인으로 그리면서 세월을 뛰어넘는 교황 권력의 막강함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진홍색과 붉은색의 옷과 의자를 배경으로 앉은 교황의 흰 제복은 교황의 나이 보다 그의 권력을 더 강조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섬세한 기교가 없이 대범하고 과감히 처리된 암갈색 배경은 진홍색과 흰색으로 표현되는 교황 집안의 품위를 대비적인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있다.
관중들을 응시하고 있는 교황과 손자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검은 눈빛은 주변의 우아한 색깔과 어울려 고귀한 분위기를 연출한 작품으로서 정갈함을 보이고 있으며, 티치아노는 이 그림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할 노년기의 쇄락함도 초월할 수 있는 교황직의 존재성을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교황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손자가 서 있는데, 작품은 그들의 성격과 인생편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오른쪽에 무릎을 약간 굽힌 정중한 몸짓의 오타비오는 교황에게 새로운 권력의 부스러기를 울겨내려는 음흉한 시선으로 교황을 응시하고 있으나, 반대로 왼편에 서있는 파르네세 추기경은 이런 음험한 갈증에서 해방된 평안한 표정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중을 응시하고 있는데, 교황과 파르네세 추기경은 나름대로 세상과 교회를 향한 삶을 산다는 동질성이 있는 반면, 오타비오는 자기 이익을 위해 권력에 집착하고 아부하는 것을 삶의 지혜와 처신으로 여기는 오늘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시세 영합형의 인간상의 모델로 묘사되고 있다.
이제 이 그림의 주인공인 바오로 3세의 생애를 보도록 하자. 그는 1468년 이태리 북구 간니노에서 관록있는 용병대장 (Condottiere)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 직업은 요즘 말로 번역하면 전쟁 청부업자라 볼 수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서 농번기에는 농사에 전념하다 추수를 끝낸 후 농한기가 되었을 때 전쟁을 했는데, 이때 필요한 군인들을 관장하는 힘을 쥐고 있는 직업이 용병대장이라 함부로 괄시도 할 수 없는 직업이었기에, 귀족들이나 왕들과도 어느 정도 가까이 지낼 수 있었으며 힘과 돈은 있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신분이 못되는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단한 집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이런 면에서 전형적인 용병대장이었다.
이런 아버지 덕분으로 그는 당시 학문과 예술의 최고 수준에 있던 로마와 피렌체, 피사에서 아주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교황청 재무담당을 잠시 맡은 후, 불과 24세의 나이로 악명 높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시절 이름이 숨겨진 로마 어느 귀부인과 눈이 맞아 세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낳게 되었으나 그는 이것을 뉘우치고 그 여자와 관계를 끊음과 동시에 소위 요즘 말로 자기고백과 새 삶의 약속을 하였고, 전임자인 글레멘스 7세 교황이 죽자, 그의 영민함과 성청에서의 풍부한 경험이 만장일치로 그를 교황직에 오르게 만들었다.
고위 성직자가 아들, 딸을 낳은 후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은 중세 수준에선 준수한 것이었는데, 전임자인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자기 딸의 결혼식을 버젓이 교황궁에서 거행할 만큼 현대인의 수준에선 후안무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는 중세 수준에선 교황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교황이 되자 그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탁월한 르네상스 정신을 가진 교황으로서 예술가와 문인들 그리고 학자들을 사랑하여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로마를 르네상스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결정적인 결함은 중세 교황들을 부패시킨 중요 요인의 하나로 평가되는 족벌주의(nepotism)에 빠져 뜻있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14살과 16살 된 두 손자들을 추기경으로 서임하고, 그들에게 교황청의 주요 직분을 맡긴 것이며 이것은 인문주의자로서의 교황의 위상에 치명적인 먹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말틴 루터 (Luther)가 일으킨 개혁운동 (Reformation)에 대해 상당히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해 루터파를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강경 노선의 반종교개혁(Counter - Reformation)주의자들과의 절충과 화해에 노력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에 대한 협조노선을 가졌던 가스파르 콘타리니 추기경이 있을 때는 이것이 가능했으나 반종교 개혁파인 카라파 추기경이 등장하면서 콘타리니는 실권을 잃게 되고 교황 역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속수무책의 처지가 되고 말다가, 그가 죽자 강경노선의 바오로 4세가 교황이 되면서 화해와 일치를 향한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트렌트 공의회에서 결정적 분열의 위기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의 원인이 된 더없이 불명예스럽고 파괴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가 더 살았더라면 트렌트 공의회의 성격이 달라졌을 것이고, 교회의 판도가 오늘처럼 일치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것은 결코 근거 없는 공상이 아닐 것이다.
교회는 순수한 삶을 살고자 모인 사람들의 집단인데, 이 순수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상과 전혀 반대되는 불순한 인간을 대표자로 뽑는 예가 많고, 또 순수한 뜻을 가진 지도자가 그 순수함을 이해 못하는 참모집단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역사에서 볼 수 있는데, 바오로 3세 교황의 삶에서도 바로 이면을 볼 수 있다.
세 명의 자식은 일찍 죽고 하나 남은 난봉꾼으로 소문난 아들 루이지는 자신의 소원대로 이태리 북부 파르마-피아첸자 공작령의 주인이 되지만 1547년 가롤로 황제의 심복인 밀라노 총독의 음모로 암살됨으로서 교황은 아버지로서 또 한번 큰 아픔을 느껴야 했고, 그 자리는 이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손자인 오타비오가 이어받게 된다.
교황의 왼쪽에 있는 손자 알렉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추기경은 중세 어둡고 부끄러운 교회사에서 그 고귀한 인품으로 신선한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는 귀한 존재이다. 그는 바람둥이 아버지를 둔 인연에 로마에서 소문난 사교계 여인을 어머니로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족벌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교황을 할아버지로 둔 덕분에 어린 시절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성청에 요직을 맡으면서 탄탄한 출세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젊은 시절 이름을 남기지 않는 어떤 여자와 관계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평가되는 딸을 낳는 업보(業報)를 저질렀다. 어린 시절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는 생전에 8명의 교황을 모셨고, 교황 선거가 있을 때 마다 유능한 교황 후보자로 거론되었으나, 언제나 조용히, 그러면서도 강경히 사양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켰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에게까지 이어지는 업보를 바라보면서, 이중생활과 위선의 현실을 숨긴 채 화려한 포장지에 쌓인 교황으로 살기보다 하나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게 되며, 이런 면에서 그는 성인은 아니더라도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동양적 개념의 성군(聖君)의 역할을 하면서 베드로 대성당 공사의 마무리, 그전부터 계속되어온 캄피돌리오 광장 공사 등을 마무리 하면서 인문주의자다운 안목으로 아름다운 로마를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이런 파르네세 추기경이 6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을 때 온 로마가 슬피 울었다. 로마 시민들은 파르네세 추기경을 “가장 아름다운 여인과 멋진 로마를 남긴 신사”라고 부르며 애도했다.
모든 나라와 개인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해 보이는 시기야 말로 종말의 시작임을 우리는 바오로 3세 교황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다. 용병대장으로 모은 돈과 권력을 업고 교황이 되어 자기 집안을 일으키고 자식까지 낳으면서 최고의 영화를 누렸으나, 아들을 비명에 잃고 그가 원했던 종교개혁에 대한 온건한 접근도 반대파에 의해 좌절되면서, 그가 죽자 반대파에 의해 선출된 바오로 4세 교황은 트렌트 공의회에서 강경노선을 선택함으로서 그의 모든 바램은 모두 좌절되고, 르네상스의 막을 내리는 교황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파르네세 추기경은 이런 인생의 진리를 깊이 깨우쳤기에, 세상의 눈으로 보긴 이해하기 어렵고 어리석게 보이는 교황직을 포기하는 처신을 통해 할아버지 교황과 달리 몰락의 삶에서 벗어나 후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을 일깨우는 멋있고 기품 있는 삶을 살았다.
오른쪽 그림은 이십대 후반의 추기경 초상화인데, 이 그림에서 그의 세련된 교양과 인간적인 깊이를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로마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파르네세 궁전은 1547년 안토니오 다 산갈로가 죽은 뒤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맡아 완성한 건물인데, 지금은 프랑스 대사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건너편에 지어진 작은 파르네세라는 뜻의 파르네시나 (Farnesina) 궁전은 오늘 이태리 외무부 영빈관으로 쓰일 만큼 격조 높은 건물이다. 바티칸이 보이는 티베르강을 낀 비아 쥴리아 (Via Giulia)는 로마에서도 우아한 건물이 많은 거리로 유명한데 이 가운데서 파르네세 궁전은 백미(白眉)여서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가장 신적이며 가장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집단의 책임을 맡은 교황직에서 볼 수 있는 너무도 세속적이고 불순한 교회 역사를 보면서 누구나 실망하고 종교의 의미성에 대해 회의할 수 있지만, 바오로 3세 교황의 인간적 한계성 안에서 볼 수 있는 나름대로 교회를 위한 헌신, 파르네세 추기경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면을 보면서, 역시 교회는 파르네세 궁전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이 세상의 척도와 또 다른 신사의 멋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교황의 가족 초상화라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진실이고, 이것은 우리가 <죄 많고 거룩한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지닐 수 있는 자부심이며, 또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에게서 나의 자화상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바오로 3세에 관한 모든 내용은 교황직에 대한 가장 객관적 평가서로 인정받고 있는 옥스포드 대학 교회사 교수인 J.N.D. Kelly가 쓴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를 참고했음을 밝힌다.
- 이종한(요한) 신부님의 성화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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