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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님의 글

~ 빠다킹 신부님과 새벽을열며,,, ~

201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마카 7,1.20-31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0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21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22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24 안티오코스는 자기가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의 말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말로 타이를 뿐만 아니라 약속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25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그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소년에게 충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라고 강권하였다.
26 임금이 줄기차게 강권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27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조상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28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29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0 어머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젊은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나는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소. 모세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법에만 순종할 뿐이오. 31 히브리인들을 거슬러 온갖 불행을 꾸며 낸 당신은 결코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복음 루카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우리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방송에 몇 차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위해 출연할 때에는 좀 부담되는 부분이 하나 있지요. 바로 방청객의 반응입니다. 사실 이 방청객은 전문적으로 방송국 방청객으로 오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레지오 활동으로 오시는지 아니면 이렇게 강의 듣는 것이 좋아서 오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의를 할 때마다 매번 보는 얼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의 반응은 정말로 프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말했는데 또 그렇게 놀랄 내용도 아닌데, “와~~”하면서 큰 반응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 반응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본당이나 어떤 단체로 특강을 갔을 때 절대로 받을 수 없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내 강의에 이들이 감동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 이러한 반응에 금방 익숙해지고 동조가 됩니다. 그리고 신이 나서 제 능력보다도 더 많은 것을 그 자리에서 쏟아 붇게 되지요.

방송에 나오는 방청객의 역할은 단순히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강사의 능력을 끓어 올리는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방청객 역시 이득이 돌아갑니다. 강의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만 한다면, 그러한 과도한 반응이라도 해야 지루함과 졸림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에게 힘이 되어 주는 모든 행동들이 곧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각종 ‘할 수 없다’라는 이유를 말하면서 남을 위해서는 좀처럼 무엇을 하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할 수 없다(Can not)’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다(Will not)’의 마음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미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왕권을 받아온 주인이 자신의 종들과 셈을 하게 되지요. 그때 돈 벌이를 제대로 한 종은 주인에게 벌은 미나 숫자만큼 고을을 다스리는 상을 받은 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뺏기고 처형을 당하게 되지요. 무지막지한 주인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돈 벌이를 통해 이득을 누가 얻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었습니다.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만, 그 노력들이 결국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나중의 결과를 보면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미나는 곧 주님을 믿는 이들이 받는 다양한 은사를 가리키지요. 그리고 이 은사를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더 큰 축복을 주님으로부터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은 은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간직만 하는 사람은 그 은사마저 뺏기고 주님으로부터 처형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한다는 모든 행동들, 결국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내 이웃들은 주님의 모상대로 태어난 또 다른 주님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이웃을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 역시 주님을 위해 하는 행동이고, 이 역시 결국 나를 위한 행동이 되어 내가 큰 이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봄날이 있다. 그 봄날에 만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모두 담고 있는 한 사람이다(박웅현).


신앙의해를 맞이해서 교리서를 필사하신 55분의 정성 가득한 필사노트. 수고하셨습니다.


편리하지 않아서 좋은 것(채정호, ‘좋은생각’ 중에서)

아래의 내용은 한 잡지에서 본 것입니다.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으며, 편리하지 않은 진짜 삶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봅니다.

1995년 한 신문에 “컴퓨터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꿈의 시대가 열린다.”라는 미래 예측 기사가 실렸다. “미래에는 초고속 통신망과 멀티미디어가 보급돼 집에서도 영상 통화나 게임, 항공권 예약은 물론 회사 일도 할 수 있다.”라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처럼 썼다.

그러나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이 예측은 다 이루어졌다. 예상보다 훨씬 더 발전해서 컴퓨터 대신 상상도 못했던 작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꿈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편리해졌다고 우리가 더 좋아졌는가?

물론 무엇인가를 더 빨리 알아내고 같은 시간에 보다 많은 일을 하지만 오히려 잃어버린 것도 많다. 뭐든 검색하면 되니까 생각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단순히 인터넷에 올라온 지식을 쓰는 소모자가 된다.

옛날이면 터덜거리고 걸어 다녔을 길, 아니면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갔을 만한 곳에 성능 좋은 안락한 차를 타고 빨리 갈 수 있다. 그런데 그곳에 빨리 가는 것이 과연 우리 삶의 목표였던가? 휑하니 가면서 잃어버린 것이 있다. 음식도 빨리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그런 장소도 늘어났다. 그럼 우리가 빨리 먹기 위해 사는 것일까? 이렇게 우리 주변에는 편리라는 이름으로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편리하지 않은 것은 쓸데없는 일인가?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를 깊이 묵상하고 주변 사람과 나누는 것, 한 발 한 발 걸으면서 발바닥으로 땅의 감촉을 느끼고, 풍광과 뺨을 스치는 바람을 누리는 것, 음식의 식감과 향취를 아는 것. 이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생명이다. 세상은 편리해지면서 생명과 멀어진다. 마치 대단한 것을 하는 듯 몰아치지만 사실 내 생명과 별로 관계없는 것들이다. 내가 느끼고 누리는 것이 생명이다. 이 순간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이다. 빨리, 또 편리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지금의 생명을 누리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편리하지 않을 때 진짜 삶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