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2사무 7,18-19.24-29
나탄이 다윗에게 말씀을 전한 뒤, 18 다윗 임금은 주님 앞에 나아가 앉아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19 주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것도 부족하게 보이셨는지, 당신 종의 집안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 이 또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24 또한 당신을 위하여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당신의 백성으로 튼튼하게 하시고, 주님, 당신 친히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25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26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 종 다윗의 집안도 당신 앞에서 튼튼해질 것입니다. 27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28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29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 마르 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언젠가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서울서 둘째로 잘 하는 집’라는 상호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상호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지요.
‘눈에 띄려고 일부러 저렇게 지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첫째로 잘 하는 집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집 다음이라는 자부심을 내걸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없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시간만 허락된다면 분명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 그 맛을 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만을 최고로 치는 이 세상 안에서 과연 둘째는 어떤 맛인지 궁금했거든요.
음식점들이 줄 지어 있는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쉽게 볼 수 있는 ‘원조’라는 간판입니다. 또한 ‘최고의’ 맛 집으로 선정되었다는 팻말을 내 걸고 있는 가게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원조’도 아니고 ‘최고’도 아니지만, 그저 둘째로 잘 하는 집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가게 상호를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꼭 한 번 가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마음인가 봅니다. 이 가게 안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최고, 원조, 1등’ 등의 수식어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이 수식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원하는 수식어를 우리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한 단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러한 수식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성실하게 노력하는 그 모습 자체가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둘째 셋째 아니 마지막의 자리라도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의 삶은 결국 환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전해 주시면서,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등경 위에 놓아야 숨겨진 것도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자리는 ‘최고, 원조, 1등’의 수식어가 붙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만을 쫓으며 사는 것이 정답이라면 예수님께서도 이천년 전에 그런 모범을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은 가장 낮은 수식어가 붙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모범을 따라서 최고의 자리가 아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수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때 숨겨진 것, 감추어진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뜻이 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 있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루이스 E.분).
교구청에서 키우는 강아지인 사랑이의 모습을 보고 신부 한 명이 급하게 찍은 사진입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죽일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물었지요.
“이제 곧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텐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최고만을 꿈꾸는 사람들의 흔한 핑계는 바로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삶을 즐기는 사람은 절대로 시간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시간을 통해서도 즐길 수 있는 방법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최고’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물질적인 부와 세속적인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소크라테스처럼 마지막 그 순간까지 열심히 할 수 있는 내 자신을 꿈 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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