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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강

~ 형제 받아들이기 작업 / 양승국 신부님 ~

<형제 받아들이기 작업>

형제들과

함께 엮어가는

 수도공동체 생활,

 때로 ‘티격태격’, 때로

 ‘아웅다웅’거리는 만만치 않은 생활이지만,

 

한 걸음만 물러나서 바라보면

 얼마나 오묘한 생활인지 모릅니다.

 

때로 공동체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어찌 그리도 조화롭게 각각의 수도공동체를 형성시켜놓았는지 모릅니다.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 공동체에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이제는 성질이 많이

 ‘죽은’ 온화하고 나이 든 사제를 보내십니다.

 

천방지축 날뛰는

 미성숙한 수도자를 달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현명하고

사려 깊은 수도자를 함께 살게 하십니다.

 

몸이 아파 늘 ‘골골’거리는

형제의 몫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미스터코리아’ 같은 형제를 보내주십니다.

 

‘나 혼자로도

충분히 제대로 된 봉헌생활 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더 헛되고 교만한 생각은 다시 또 없습니다.


나만 잘 살아서

 나 혼자만 성화되고

 

나 혼자만

 구원받겠다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생각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제는

 동료 사제를 필요로 합니다.


불가피하게

수도자는 함께

 걸어가는 또 다른 수도자를 필요로 합니다.

성인(聖人)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우리와 특별하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 더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인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보다

 조금 더 관대한 마음으로

 이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성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자신의

동료들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늘 부족해

 못 마땅한

자신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

 

거부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

 얼마나 영웅적인 신앙행위인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끝끝내 수용하지 않고

 내치는

고향마을 사람들의

 처신에 안타까워하시며

 

허탈한

가슴으로

 고향땅을 떠나십니다

해도 너무들 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고대했던 메시아

하느님을 코앞에 두고 하는 말들 들어보십시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평소에

 ‘받아들이는 작업’에 소홀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결정적인 때에

큰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

 이웃들에 대한 수용이

 잘 안 되는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목전에 가까이 다가오신

 

구세주

하느님마저도

 수용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형제 받아들이기’

작업을 해나가면서 느낀 생각입니다.

 

형제가

내게 친절하거나 상냥하게 대한다고

 

 그를

 크게 받아들인다면

그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란

변화무쌍한 존재이기에

 태도란 것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내게 쌀쌀맞게 대하고

 

 쓴 소리를

 수시로 하다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위험한 일입니다.


그의

내면이나 본질은

파악하지 못한 채

그의 표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점,

 좋은 성품,

 공동체를 위한

기여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

그의 나약함,

그의 죄, 그의 상처, 그의 병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이

 

 우리 범인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 한 가지는

 

 ‘신앙의 눈’

 ‘하느님의 눈’

 ‘한 차원 높은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깃든 ‘선’과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시각을 배경으로

성인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양승국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