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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강론 / 북산 성당 부주임 신부 이 균태(안드레아) -

 

 

 
 

축일: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성 십자가 현양이 더욱 성황을 이루게 된것은 동 로마 황제 헤라클레오가

페르시아인들 손에서 그 십자가를 탈환해 온 628년경 부터였다.

 

이를 더 자세히 말하자면, 614년경 동 로마 제국을 침입한 페르시아의 왕 코스로아야와

다수 신자들을 포로로 잡고 또 유일무이한 보물인 성 십자가를 노획물로 가져갔다.

 

그 후 전쟁은 15년간 계속 되었으며, 그동안 코스로아스도 사망하고

헤라클리오는 전승을 하게 되어 페르시아와 강화 조약을 맺는 동시에

성 십자가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헤라클리오 황제는 성 십자가를 부하에게 짊어지게 하고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을 예전 장소에 모셨다.

 

전설에 의하면 헤라클레오 황제가 주님을 따르고자 화려한 의관(衣冠)을 갖추고

손수 십자가를 메고 갈바리아 산에 올라가려 했으나 웬일인지 발걸음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써도 보이진 않는 줄에 매인 것 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뜻하지 않은 광경에 주위의 사람들은 그저 당황하여 떠들기만 했다.

 그때 총주교 즈가리야는 무슨 생각이 났음인지 황제 앞에 나아가

"옛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관을 머리에 쓰고

군인이 입던 헌옷을 두르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폐하는 금관과 훌륭한 차림을 하고 계십니다.

아마 이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신앙이 두터운 황제는 이 말을 듣고 과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다시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바,

이제는 아무일 없이 순순히 움직여져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성 십자가는 그때부터 더욱 신자들의 공경을 받게 되었으며

오늘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의 표적으로

악마의 공격을 막는 방패로서 죄인들의 희망을 일으켜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부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수많은 종류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들을 막무가내 예수의 십자가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십자가는 아무데나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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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 얻게 되는 고난을 두고,

    ‘십자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정당하고 올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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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고통의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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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자연적인 혹은 사회적인 고난을 두고, 별 생각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으며,

    때로는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을 때도 있다.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구속이 없다거나,

    십자가 수난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거나,

    하느님께서 영원한 계획으로 그렇게 결정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고통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조를 낳는 것으로 끝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배출하는 것으로 끝날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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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런 식으로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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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 손상을 입히는 것이며, 역사 속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억압을 당해온 사람들의 고통스러웠던 그 삶의 역사를

    더욱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생채기에 소금을 문지르는 짓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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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죽음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신다거나, 사랑하신다거나,

    마음에 들어 하신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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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 예수의 십자가 상의 죽음을 두고,

    대속논리로 그 죽음의 의미를 가르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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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시기에 우리가 줄곧 불러대는 노래들 가운데,

    « 수난기약 다다르니 »라는 노래는 이 대속논리를 철저하게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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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난기약 다다르니, 주 예수 산에 가시어,

    근심 중에 피땀 흘려 성부께 기도하시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으니,

    우리들은 통회하여 보속과 사랑 드리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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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노래의 멜로디는 참 좋아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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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난기약이라는 말부터가 예수께서 자유로이, 당신의 의지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십자가의 자발성을 무색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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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된 수난?

    이미 정해져 있는 고통?

    하느님의 톱니바퀴 같은 정확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른 힘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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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면, 결국 성부 하느님이라는 분은

    가학증 환자, 사디스트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분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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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 우리 죄를 대신하여 수난하고 죽었으니, 우리들은 통회하여

    보속과 사랑 드리자 »는 노랫말은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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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죄를 대신해서 수난하고 죽는 이들은 인류 역사 상,

    예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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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통회와 보속과 사랑으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수난하고 죽는 이들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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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죽음을 그저 우리들로 하여금 통회하고 보속과 사랑을 드리게 하는

    계기나 기폭제 정도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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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6일에 일어났던 세월호 대참사에 대해서

    5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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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반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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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삶,

     

    돈지랄에 미쳐가는 사회로 치달아 가는 이 나라, 이 땅 대한민국에서

    별 다른 바른 소리 않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굳이 비싼 비용 안 물어도, 사고 안 나면 괜찮은 것이고,

     

    국민의 지도자들을 뽑을 때에, 정의, 평화, 사랑, 생명 같은 가치를

    중시하기 보다는 경제 살리고, 국민들 주머니에 돈 좀 쥐어주고,

     

    콩고물 많이 떨어지는 사업들 벌여주고, 각종 규제들 완화하거나 없애주면서,

    아파트값 올려주고, 땅값 올려주고, 금리 올려주고, 코스피 지수 팍팍 올려주는

    사람들에게 표를 몰아 주었던 지난 시절의 삶을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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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를 참사가 되게끔 내버려 두었던 국정 최고 책임자를 비롯한

    관련 공무원들의 무책임함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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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사실에 충실하지 못한 언론,

    현 정부의 깔때기, 나팔수 노릇에만 충실했던 언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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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 이후로 « 이제 그만 잊자 »라는 말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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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극히 거룩하신 교황 성하께옵서 유가족들을 친히 위로하셨는데,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냐 »는 말들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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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자 »라는 말은 거짓과 어둠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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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자 »는 것은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죽음을 그저 통회하고

    보속과 사랑을 드리게 하는 계기나 기폭제 정도로 생각하겠다는 것이며,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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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군다나, 잊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이

    « 경제 살리기 »와 « 원활한 국정 운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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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경제인가?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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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진 자들과 힘 있는 자들의 경제는 늘 살아 있었고

    가난한 사람과 약자의 경제는 언제나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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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들이 살려야 한다는 경제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경제가 아니라,

    언제나 살아 있었던 경제, 부자와 강자의 경제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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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의 반응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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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전반기 경상수지를 보더라도,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나고,

    나라의 경제가 곤두박질 치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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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9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2014년 상반기 한국의 경상 수지가 392억 달러 (약 40조 2천억원)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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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유가족이 마치 나라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거짓선전에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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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한 국정 운영인가?

    세월호 유가족들이 주장하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 때문에 국정 운영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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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지난 4월 16일, 당연히 구조됐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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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구조를 담당한 해경의 대응에 직무유기적인 형사책임의 요소가 있었으므로,

    마땅히 그런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언론보도가 이루어져야 했고,

    또한 검찰이 선장과 선원 등을 수사함에 있어서도

    해경의 구조 담당자들을 아울러 수사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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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당연히 진행돼야 할 이러한 과정들이 정권에 의하여 차단이 되었고,

    국민들은 현 정권이 뭔가를 은폐한다는 의혹을 품은 가운데

    사태가 커지는 형국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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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사회와 국가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절망에 빠진 유가족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쟁의 수단으로 삼고 분열을 조장해 온 세력들과 그 세력들에 부화뇌동하는

    따까리들은 국정운영의 책임을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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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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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들도 양보할 것은 양보하라고, 초라하고 잔인한 진실보다는
    화려한 거짓이 차라리 더 낫지 않느냐고
     
    온갖 개소리와 거짓과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2014년 9월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따르는 길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대로
    수사권과 기소권이 들어 있는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우리들 그리스도인들부터 기도하고, 유가족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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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 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자 처벌이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 이 땅
    대한민국에서 예수의 참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길이며,
    한국 순교 성인 103위와 순교 복자 124위의 순교 정신을
    오늘날에 계승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