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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영성이야기

~ 제1장 기도에 대한 계시 / 이기우 신부님 ~



제1장 기도에 대한 계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하느님을 찾는다.

 

 이 현상은 기도가

 인간 누구나에게 주어져 있는

보편적 소명임을 말해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무(無)에서 유(有)에로 불러 내셨고,

 

이 점에서는

 피조물인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그 피조물 가운데에서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쓴”(시편 8,7)

 

 인간은,

천사들 다음으로,

 

 “온 땅에 주님의 이름 어이 이리 크신지”(시편 8,2) 알아볼 수 있다.

 

 죄 때문에,

 하느님과 비슷했떤 품위를 잃어버린 뒤에도,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욱 더,

 

 인간은 자신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분께 대한 갈망을 더 크게 간직하고 있다.

 

 자연 종교든

 계시 종교든 모든 종교 현상이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추구 의지를 입증해 준다.

이렇듯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기도의 현상에서 우리는 기도에 대한 계시를 알아볼 수 있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주를 잊어버렸거나

 또는 창조주의 면전에서 멀리 숨었다 하더라도

 

,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비난하더라도,

 

 살아 계신 참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기도의 신비로운 만남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기도에서,

성실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은

 인간의 기도보다 언제나 앞서는 것이요,

 

인간의 기도는

언제나 이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께서

 점차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심에 따라,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에게 하는 호소가 되고

 상호간에 맺어지는 계약으로 발전해 왔다.

구약성서의 역사는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인간이 점차 알아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의 역사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이 과정은

 거대한 드라마처럼 수천 년 동안 전개되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알아듣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시작한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느님의 명령을

십계명으로 구체화시켜

 열두 지파로 성장한 백성을 이끈 모세를 거쳐서,


하느님을 대신하여

당신 백성을 다스리도록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후계자 왕들이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신탁(神託)을

천형(天刑)처럼 받아서

 일생토록 전한 여러 예언자들에 이르기까지.


제1절 구약성서에 나타난 기도

구약성서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계시는,

 인간의 타락과 속량 사이에서 나타났다.

 

 아담이 저지른 타락과

이로 인해 죄악에 빠진 인간을

 속량하신 예수님 사이에서 기도의 계시가 나타난 것이다.

첫 인간 아담이

자식을 낳아 번성하며

 에덴 동산을 다스리라는

하느님의 전폭적인 위임을 받고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불순명을 저질러 타락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탄식조로 아담에게 물으셨다.

 “너 어디 있느냐? …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느냐?”(창세 3,9.13)

 

그런데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면서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

.”(히브 10,7) 하고 기도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1,11; 9,7) 하고 기뻐하셨다.

하느님의

이 탄식과 기쁨 사이의 역사 속에서

 기도에 대한 계시가 나타났다.

 

이리하여

기도가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시금석이 되었던 것이다.

 

 불순명으로

 머물 것인가,

 순명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기도하지 않았던 아담은

 교만에 빠져 불순명을 저질렀고,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순명하셨다.

 

 여기에

기도의 본질이 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

1. 창조, 기도의 원천

기도가

 인간 역사의 시금석이 되기 이전에

 

 그 원천이 된 것은

 창조 이후 전개된 원역사(原歷史)의 현실에서부터였다.

 

 성조 아브라함 이전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창세기의

첫 아홉 장에는

아벨이 양떼 가운데에서

맏배를 봉헌한 일(창세 4,4 참조),

 에녹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 일(창세 4, 26 참조),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창세 5,24)과 같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특히

하느님의

 마음에 드셨던

 노아가 바친 번제물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려서”(창세 8,20-9,17 참조)

 그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를 통하여 만물에게도 복을 내려 주시게 하였다.

 

 이는 노아의

마음이 올바르고 청렴하며,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기”(창세 6,9) 때문이었다.

 

 모든 종교의

 수많은 의인들이

 이와 같은 기도를 구현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기도가

계시된 것은 성조 아브라함부터였다.

2. 약속, 믿음의 기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들은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칼데아 우르 지방에서

 

 그 당시 최고의

 물질문명은 누릴 수 있었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정신적 분위기에 숨막혀 하던 그에게,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이기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르시는 곳으로 가라는

 

 부르심은

차라리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서 분부하시는 대로”(창세 12,4)

 바로 길을 떠났다,

 

 아내 사라이와 함께.

그의 마음은 전적으로

“말씀을 따랐으며” 그는 순종했다.

 

사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는

 마음의 귀 기울임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말은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먼저 행동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는 머무는 곳마다

하느님께 제단을 쌓는다.

 

 나중에야

비로소 말로 표현된

 그의 첫 기도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기도는

 도무지 실현될 것 같지 않은

 하느님의 약속을 그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은근한 탄식이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주님의 말씀이 환시 중에 아브람에게 내렸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 그러자 아브람이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

 

 제 집안의 상속자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자르가 될 것입니다.

 

” 아브람이 다시 아뢰었다.

 

 “저를 보십시오.

 당신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 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창세 15,1-3).

이렇게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성실하신 분인지 아닌지,

 과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지 아닌지 믿음을 시험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람의 나이

백 살이 다 되도록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실현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식 하나 없이

 백 살이 다 되도록 늙은 처지에

 후손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믿음이었다.

 

 아내 사라이는 이미 아흔 살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이시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구를 태양계 가운데

 제일 좋은 자리에 만들어 주시고

 

오랜 기간

물질의 진화 과정을 거쳐

 

 생명체를

출현시키신 후

인간이 나타나기까지도 기다리신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그 인간의 의식이 진화하고

 당신의 부르심을 줄기차게 외치시다가

 

 겨우 알아들은

 첫 인간이 아브람인데,

 

그 믿음을 입증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당신의 응답을 하실 수 있었겠는가?

 

창조주

하느님으로서야

 백살이 된 나이에도

 자식을 수태시키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식을 잉태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지만,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작동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다리셨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아브람의 믿음이

 작동하기를 기다리셨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극적인 일면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능력과 처지를 얼마든지 넘어서서

 당신께 필요한 일을 하신다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기도의 조건이다.

과연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살아가던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어

 

 신비로운 손님을

자신의 천막에 맞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므레에서

한 이 훌륭한 접대는

 

바로 참된

 ‘약속의 아들 이사악’의

 탄생 예고에 대한 전조였다.

 

 이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셨으니,

 

 아브라함의 마음도

 사람들을 동정하시는

 하느님과 일치하였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운명을 두고

 대담한 신뢰로써 그들을 위해 감히 전구하였다.

드디어

 약속의 아들이

이사악이 태어났으나

 

 그가 자라나

 소년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약속하신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최대한으로 정화시키고자 감행하신

 하느님의 도박이었다!

 

 남자 나이 백 살,

 여자 나이 아흔 살에

 

 겨우 얻은

 외아들을

 이교도들의

 우상숭배적 풍습인

인신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이시다.

 

 아브라함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도 안 되는 무지막지한 요구를 하느님께서 하셨다.

 

 만일

이때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운명은 달라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신앙은 약해지지 않았다.

 

 기적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을 손수 마련하시고”(창세 22,8),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히브 11,19).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칼로 찌르려고 할

그 순간에 개입하셨다.

 

 그래서

이사악은 죽을 필요가 없었고

 

믿는 이들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실 성부를 닮았다.

 

 이처럼 기도는

 약속에 대한 믿음의 행동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에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며,

 

 또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에 참여하도록 해 준다.

약속은 믿음의

기도라고 하였는 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과 당신 약속을 갱신하셨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사악만 얻었고

이사악은 에사우와 야곱 형제를 둘 수 있었지만

 

 그 손자인 야곱은

 네 아내에게서

 무려 열두 아들과 딸 하나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야곱은 형 에사우와는

 물론 외삼촌 라반과

결코 쉽지 않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라반의 속임수에 빠졌다가

 

 이십 년만에

 탈출한 야곱은,

 

 젊은 시절에

장자 상속권을 둘러싸고 벌인

 콩죽 사건으로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사우와

철천지 원수가 되어 있었기로

 형과 만나기로 된 날 밤에 운명의 씨름을 벌였다.

 

 그 씨름 상대와

 밤새 싸웠지만

그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는데도

 야곱이 놓아주지 않으므로

 

야곱의

요구에 굴복하여

복을 빌어 주고 새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었다.

 

이후 야곱은

 이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운명이

 

 이미

 야곱의 운명 속에

녹아 들어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어쨌건

 교회의 영적 전승은

 야뽁 나루에서 일어난 이 이야기를

기도의 상징으로 이해해 왔다.

 

 즉, 신앙의

 싸움과 끈기가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속이 믿음의

 기도일 수 있는 근거는

약속을 한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믿음 즉 신뢰 덕분이다.

 

 서로 믿고 있는

 상대방들이 한 약속은

그 믿음 덕분에 약속이 실현되어야 할

 

미래 시점

이전에도 그러니까

 약속을 한 현재 시점부터

실현의 힘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일종의 약속어음인 셈이다.

 정상적인 경제질서에서는

 신용이 보증되는 한 약속어음은

 현금과 똑같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하느님의 약속도 마찬가지이다.

 

야곱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야곱이

받은 축복 덕분에

그 후미진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메시아의 탄생을 축복으로 받을 수 있었다.

 

 엄청나지 않은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약점(?)이다.

3. 모세, 중개자의 기도

모세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야곱의 열두 지파 중 레위 지파에 속한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면 모세는 하느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백성을 이끈 중개자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과 손자 야곱을 통해 ‘하느님의 집안’을 이루었다면, 모세는 그 후 사백 오십 년이 흐른 후 늘어난 ‘하느님의 백성’을 이끈 지도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삼으시고자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시고 시나이 산에서 이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두 사건에서 모세를 백성과의 중개자로 삼으셨다. 이 과정에서 모세가 하느님께 드린 기도는 백성을 대신하는 중개 기도였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모세의 기도였고, 백성의 탄원을 하느님께 전해 드린 것도 모세의 기도였다.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를 중개하는 모세의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1티모 2,5)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중개 기도의 놀라운 표상이자 예표가 되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당신 백성의 중개자로 삼으시기 위해 먼저 행동하셨다. 이집트 안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 파라오의 폭정에서 오묘하게도 그 파라오의 누이인 공주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호하셨다. 그 후 사십 년 동안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 교육받고 성장한 모세를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광야로 부르시어 목동으로 삼으시고 장차 중개자요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사십 년 동안 시키셨다. 그리고나서 모세가 여든 살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 중턱으로 그를 부르셨는데, 그 표징은 불타지 않는 떨기였다.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떨기가 불타지 않는 신기한 광경을 본 모세가 다가오자 드디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당신의 백성을 위한 중개자로 삼으시고자 사명을 주셨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전하는 탈출기의 다음 대목은 하느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기도의 대화이다.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발을 벗어라.”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어라.”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탈출 3,1-12).

이 사건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영적 전승에서 기도에 대한 원초적 표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으로 모세를 부르신 것은, 당신께서 인간이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시대에는 물론 그 후에도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을 계시하시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하지는 않으시며,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당신의 구원 사업에 참여시키려고 그를 파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에 모세를 참여시키기 위해 그에게 간청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오랜 줄다리기 끝에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게 되기 때문이다. 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이 대화를 통해서 모세는 기도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는 이 과정에서 회피하기도 하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며, 질문을 던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나누신 대화는 기도의 교과서로 통한다. 이때로부터 시작하여 모세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기간 동안 내내 마치 친구끼리 말을 주고 받듯이 하느님과 기도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탈출 33,11 참조). 이러한 모세의 기도는 전형적인 관상 기도이다. 이 기도 덕택으로 하느님의 종 모세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는 산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 탄원하였으며 산에서 내려와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 주고 그들을 이끌었다. 기도의 힘이었다. 중개자로서의 리더십이 여기서 나왔다:

“나는 나의 온 집을 그에게 맡겼다. 내가 모세와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다.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해 준다”(민수 12,7-8).

“모세는 실상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고,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민수 12,3).

성실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과(탈출 34,6 참조) 맺은 이 친밀함 덕분에 모세는 백성을 위해 하느님께 중개의 기도를 청할 수 있는 용기와 항구한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당신 몫으로 삼으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아말렉족과 전투하는 동안에도 그러했고(탈출 17,8-13 참조), 미리암의 병이 낫도록 하기 위해서도(민수 12,13-14 참조) 모세는 중개의 기도를 바쳤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성이 변절한 후에 모세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던져”(시편 105,23) 하느님 앞에 나아갔다(탈출 32,1-34,9 참조). 하느님과 싸우는 모세의 기도는 유다 민족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담대함을 심어 주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손수 하신 놀라운 일들을 반드시 기억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과 관련된 문제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지닌 이 백성을 저버릴 수 없으시다.

4. 백성과 임금의 기도

모세는 계약의 궤를 모신 장막이나 시나이 산에서 홀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를 바쳤지만, 모세 이후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으므로 성전에서나 어디에서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어린 사무엘은 자기 어머니 한나에게서 “주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1사무 1,9-18 참조) 배웠으며, 사제 엘리에게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9-10). 그리하여 기도를 배우고 예언자가 된 사무엘도 기도의 가치와 그 중요성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나도 너희를 위해 기도하리라. 기도하지 않는 죄를 주님께 짓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나는 너희에게 무엇이 좋고 바른 일인지를 가르쳐 주리라”(1사무 12,23).

다윗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임금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또한 그 백성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목자였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순명과 찬미는 물론 죄를 저지르고 뉘우친 참회마저도 백성에게 기도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로서 다윗이 바쳤던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며, 유일한 임금이시고 주님이신 분께 드리는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신뢰였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다윗은, 시편에 나타나듯이,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기도의 첫 예언자였다.

5. 예언자들의 기도

다윗의 뒤를 이어 받은 솔로몬이 다윗이 건립하고자 했던 기도의 집, 즉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바쳤다. 성전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장소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솔로몬 이후 왕실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잃어버리고 권력 투쟁에 몰두하다가 끝내 왕국은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신앙이 식은 터에 지나치게 외적인 형식을 강조하다보니 형식주의로 흘러버렸다.

왕실이 신앙을 잃어버리자 백성들도 신앙의 열성이 식어버렸다. 그러자 북 왕국과 남 왕국 모두에서 예언자들이 출현하여 왕실과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귀양살이 이전과 이후에 출현한 이 예언자들은 왕실과 백성들에게 신앙을 새로이 교육하고 마음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언자는 엘리야였다. 북 이스라엘 왕국에서 활약했던 그는 주님을 찾는 모든 이들의 아버지였다(시편 23,6 참조).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 그리고 그들의 편에 섰던 거짓 예언자들과 대항하던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드린 제사와 기도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을 시험하는 결정적인 시금석이었다. 엘리야가 “응답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리자 “한낮이 지나 저녁 제사 시간에” 주님께서 내리신 불이 제물을 태워버렸다.

가르멜 산에서의 대결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참패한 아합 왕의 진노를 피하여 그릿 개울가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엘리야는 사렙다 마을의 과부에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가 바친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과부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다(1열왕 17,7-24 참조).

엘리야 이후 예언자들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한 기도로써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빛과 힘을 얻었다. 그들의 기도는 하느님께 불충한 세상에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6. 시편, 백성의 기도

시편은 백성이 하느님께 바친 기도이다. 큰 축일 때나 안식일마다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으로 하느님께 바친 기도가 시편에 표현되어 있다. 시편 기도는 탄원과 감사와 찬양하는 형식으로 매우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소박함과 자발성이 드러나 있으며,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하느님을 대적하려는 원수들의 표적이 된 믿는 이들의 처지의 괴로움 그리고 성실하신 하느님께서 행하실 것을 기다리며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분의 뜻에 맡겨 드리는 의탁의 자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시편집이라고 부르는 구약 성서의 책은 히브리 말로 ‘찬양가 책’이라고 불린다. 모두 150편에 이르는 시편은 세 개의 큰 유형으로 분류된다; 찬양 시편, 탄원과 신뢰와 감사의 시편, 교훈 시편.

찬양 시편은 시편집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 대부분의 찬양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축일을 맞아서 전례 때에 사용하기 위해 창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탄원, 신뢰, 감사 시편은 곤경과 고통이라는 공동된 상황에서 생성되었다. 위기를 맞고 있아 기도자는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 자기의 신뢰를 고백한다.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을 때는 구원해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린다.

교훈 시편은 역사적 교훈이나 예언자적 방식의 훈계, 전례적 권고, 도덕적 문제에 대한 반성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손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편은 신약 성서에서 100번 이상 인용될 정도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위대함을 입증하시려고 그 출발점으로 110편을 선택하셨다(마태 22,41-46). 또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만찬을 마치며 찬미가를 부르셨고(마태 26,30), 십자가 위에서는 22편의 첫머리를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마태 27,46). 그리고 31편의 한 절을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시편을 낭송하고 노래하는 관습은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1코린 14,26; 에페 5,19; 콜로 3,16; 야고 5,13), 일찍부터 개인 신심 행위와 공동 전례에도 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약의 하느님 백성이 바쳤던 이 시편 기도를 교회에서도 전례에 공식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래서 첫째 독서 다음에 시편 기도를 바치며, 이 때의 시편은 그날 미사의 주제와 관련이 깊은 시편이 등장한다.

- 이기우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