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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그륀

~ 다바쳐서 다 받는자의 행복 / 김찬선 신부님 ~

 

    다 바쳐서 다 받는 자의 행복 연중 34주 월요일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오늘 복음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주님께서 과부를 칭찬하시는 것을 삐딱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부의 봉헌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봉헌을 잘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봉헌은 봉헌을 했다 하면 다 하는 것이고,

    부유한 사람의 봉헌은 봉헌을 해도 결국 일루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할수록 봉헌을 하면 가진 것의 대부분을 봉헌하게 되고,

    부유할수록 웬만큼 봉헌해서는 가진 것의 지극히 일부를 봉헌케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가진 것이 천 원인 사람은 봉헌을 했다 하면 천 원 다 봉헌하겠지요.

    그에 비하여 몇 십 조 원을 가진 재벌은

    천억 원을 봉헌했다 해도 아주 작은 일부를 봉헌한 것이 되지요.

     

    그렇다면 과부의 봉헌이 정말 칭찬거리가 못되는 것인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가난한 사람이라고 누구나 쉽게 봉헌하는 것 아니고,

    부유한 사람보다 봉헌하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욕심이 없는 것 아니고,

    욕심이 생기면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봉헌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옛날에 산동네에서 일할 때 마음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한 일은 그곳에 사는 분들 중에 일을 할 수 없는 분들에게

    밑반찬이나 우유나 약간의 경제적인 도움을 드리도록

    좋은 마음 가진 분들을 연결시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도움을 주시는 분들 중에서 화가 나 저를 찾아오셔서는

    더 이상 돕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산동네 분들 중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힘 있는 분들이

    그렇지 못한 분들에게 가야 할 것을 가로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득을 합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욕심이 있기 마련이고,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욕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 중에는 부자들에게 탐욕이 많은 것은 그러려니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만은 자기들끼리 서로 위해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야 하고,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봉헌을 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이나

    욕심 대신 사랑이 가득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돈보다 더 사랑해야만 합니다.

     

    다만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더 유리한 것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님 말씀처럼,

    부유한 사람은 부유함에 안주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덜 찾는데 비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함 때문에 하느님을 더 찾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부유한 사람이 신앙생활 잘 하기 더 힘들고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불쌍하고 안쓰럽습니다.

    가진 것을 하느님께 다 바쳤을 때

    하느님을 다 소유한 자의 행복을 느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다 바쳤을 때 다 받게 되는 행복을 그리는 오늘입니다.

    - 김찬선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