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있음’ ‘받아들임’ 강조했던 유대교 사회심리학자 /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안식일은 자연과 인간, 평화 상징의 의미소유가 아닌 존재 받아들여야 사랑 가능
“참선은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것” 주장
유대교 전통이 인류를 위해 베푼 가장 큰 공헌 중 하나는 7일을 일주일로 하는 주일 제도를 널리 보급한 것이다. 특히 주일 중 제7일을 ‘안식일(安息日, Sabbath)’이라 하여, 그날을 쉬는 날, 거룩한 날로 삼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일제도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유래되었고, 제7일 안식일(Shapatu)도 바빌로니아에서 시간과 죽음의 신 토성(Saturn)에게 바치는 축제일로 지키던 날이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서는 안식일이 슬픔과 자책의 날인 반면 유대교에서는 즐거움과 쉼을 위한 날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특히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시간으로서 여겼다.
1900년 프랑크프르트에서 탄생
유대교를 모체로 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 유대교의 전례를 따라 각기 일요일과 금요일을 자기들의 특별한 날로 지키기 시작했다. 이제 전 세계는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가 유대교에서 전해 준 주일제도에 따라 주일 중 하루나 이틀 일을 하지 않고 쉬게 되었다. 유대교 덕택으로 일주일 중 적어도 하루 쉬는 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을 뿐 아니라 의무화까지 된 셈이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신성한 의무사항이었다. 유대인들의 성경인 히브리어 성경(그리스도교에서는 이를 ‘구약’이라 부른다.)은 안식일의 의미를 신의 천지창조와 연결시켰다. 신이 첫날부터 엿샛날까지 6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시고 이렛날에는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다(창세기 2:3).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이 따르던 모세의 십계명 중에서도 가장 길고 상세하게 제시된 계명이기도 하다. 십계명 넷째 계명에 해당하는 이 계명은 다음과 같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20:8-11).
히브리어 성경 신명기에는 하느님이 쉬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하던 유대인을 이끌어 내 자유를 준 하느님의 명령이기에 지켜야 한다고 했다. (신명기 5: 12-15). 심지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까지 했다. 이처럼 안식일 준수는 남자 아이들이 받는 할례와 함께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특징적인 예식이었다. 보기에 따라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보다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켰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단순히 신의 명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뭔가 더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안식일 준수의 의미를 특히 현대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한 두 명의 유대인 사상가들이 있다. 하나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 조슈아 헤셜(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이다. 이번 회와 다음 회에서는 이 두 사상가들에 대해 잠시 조명해 보기로 한다.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프르트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프랑크프르트 학파에 속했던 그는 그 학파에 속했던 대다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거나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가게를 지키며 탈무드를 열심히 연구하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오히려 언짢아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가게로 가보라고 할 정도로 유대교 연구에 열성적이던 할아버지와 정통 유대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스스로도 성경과 탈무드를 연구하는 등 유대 전통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무엇보다 나는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등 예언자들의 글에 감동을 받았다. 다가올 재앙에 대한 그들의 경고나 공표보다는 ‘끝날’에 대한 그들의 약속 때문이었다. 민족들 간에 보편적인 평화와 조화에 대한 그들의 비전은 내가 열두 살이나 열세 살이었을 때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에리히 프롬의 생전 모습.
심리학자 및 정신과 의사로 활동
프롬은 18세에 프랑크프르트 법철학과에 입학했다가, 19세에 하이데르베르그로 가서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을 공부하고, 1922년 카발라주의자들, 하시디즘 신봉자들, 유대교 개혁파라고 하는 세 가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하시디즘이 현학적인 랍비 전통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종교적 예식이나 윤리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창조적 운동이라 결론지었다.
졸업 후 나중 자기 부인이 된 프리다 라이흐만(Frieda Reichmann)의 하이데르베르그 정신분석 진료소에서 정신분석자가 될 훈련을 받고, 27세에 자기 자신의 진료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26세경에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접하고 거기에 매
료되었다. 20대 말 마틴 부버와 함께 자유 유대인 학당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30대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본산인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 들어가 프로이트 심리학과 마르크스 사회학을 결합하여 자기 나름의 사회심리학을 정립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게 되자 제네바로 옮겼다가, 1934년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교로 갔다. 1943년부터 워싱턴 정신과 대학에서, 1946년부터는 윌리엄 앨런슨 화이트 연구소에서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정신과 의사로서 재직했다.
1950년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의과대학에 정신분석학과를 설립하여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5년 이 대학교에서 은퇴하였다. 이 동안 1957년 ~ 1961년에는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1962년에는 뉴욕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임하기도 하였다. 1974년 스위스 무랄토(Muralto)로 이주했으며 1980년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주요 저서로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인간 상실과 인간 회복』(1947),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랑의 기술』(1956), 우리에게 익숙한 『소유냐 존재냐?』(1976) 등이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1960년 일본의 선불교 학자 다이세츠 스즈키, 미국인 리차드 디 마티노와 함께 쓴 『선불교와 정신분석』이라는 책이 있는데, 본 필자가 선불교 강의에서 교과서로 쓰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이 박사학위 이후 처음으로 쓴 논문은 ‘안식일’에 관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정신분석학적 입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는 “안식일은 원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빼앗은 일을 상기시키기는 역할을 했다. 그 날 일을 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런 원죄에 대하여... 참회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주장했다.
‘선불교와 정신분석’ 공동 저술
그러나 20대 후반에서 30대에 걸쳐 쓴 글에서 그는 이런 순수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벗어나 안식일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을 한다. 1951년에 쓴 그의 책 『잃어버린 언어』에서 그는 안식일 제도의 ‘상징적 의미’를 좀더 세밀하게 분석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일’과 ‘쉼’에 대한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이 우리와 달랐다고 한다. 유대인들의 경우 “일이란 건설적이든 파괴적이든 인간이 물질세계에 간섭하는 것을 뜻하고, 쉼이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평화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다.
결국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자연 세계를 건드리지 말고 가만 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건설적이든 파괴적이든 무엇이나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는 균형을 파괴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것일지라도 쉼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된 셈이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을 이해하면, 집을 짓거나 이사를 하는 등 힘이 드는 일 뿐 아니라 촛불을 켜는 것, 풀잎 하나를 뽑는 것도 모두 ‘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인간과 자연 사이,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완전한 조화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곧 자연이나 사회의 변화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일주일에 하루이기는 하지만 자연의 사슬, 시간의 사슬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안식일 의미 현대적 언어로 해석
히브리 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의 타락으로 뱀과 여인,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남자와 여자, 사람과 흙 등 모두가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일체가 상극관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프롬의 해석에 따르면, 유대교의 예언자들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짐승, 사람과 흙 사이의 상극관계를 완전한 평화와 조화의 관계로 바꾸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상극의 세계에서 벗어나 상생의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것이다. 땅의 소산이 풍요롭다든가 검을 쳐서 보습으로 만든다든가 사자와 양이 함께 놀 것이라는 등이 이런 조화의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메시아의 때가 이름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메시아의 도래를 미리 맛보고 축하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노동이나 정신활동을 피하고 쉰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평화와 자유의 상징이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한 다음 쉬었다고 하는 것은 그 하느님이 피곤해서 쉰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가 창조 작업 자체보다 더욱 귀중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에서 안식일 문제를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는 삶에 두 가지 존재 양식이 있는데 하나는 가짐의 존재양식(having mode of existence)요 다른 하나는 있음의 존재양식(being mode of existence)라고 했다. 가짐의 존재양식을 취하면 언제나 가짐, 더 가짐... 끊임없는 물질적 소유욕에 시달리느라 삶의 즐거움을 모르고 지낸다고 했다. 그러나 있음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있음의 존재양식을 취할 경우 서로 사랑하고 나누는 일이 가능하고 삶이 의미 있게 된다고 보았다. 안식일이란 결국 일주일 중 적어도 하루만이라도 가짐의 존재양식에서 벗어나 있음의 존재양식으로 살아보려는 노력이라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강조하는 안식일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해 그가 인간 실존을 어떻게 이해던가 하는 것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참선(參禪)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그의 선불교 이해도 흥미롭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생략할 수밖에 없다.(필자의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현암사, 2006) 270쪽 참조.)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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