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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원수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일 / 김웅태 신부님 ~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

 

동구와 소련의 개혁은 하느님 말씀의 진실성에 대한 입증이며,

그들의 양심이 하느님의 진실성에 승복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맑스, 레닌주의가 100여년간 인류의 절반을 지배했지만, 그들은 무너지고

하느님의 통치는 영원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며 불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진실된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루카 6,27-38]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하시면서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신다.

이와같은 루카 6,27 이하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에게 있어서

대인 관계 속에 자신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며,

우리 믿음의 황금율인 것이다.

세계의 4대 성인들도 각각 황금율을 말씀하셨는데,

공자님은 仁을 말씀하시고,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하시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겸손을 가르치셨다.


예수님 사상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바로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말씀이라고 보겠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이러한 말씀들이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말씀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품성이며 덕이라 하겠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오래 전부터 들어 온 것이지만,

다시 이 말씀을 듣고 생각할수록 위대한 말씀임을 새삼 느끼고

자신이 부끄러워 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크리스찬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이러한 경지에

나날이 가까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과거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이러한 말씀을 뚜렷하게 실행했던 기억은 찾아 볼 수 없고

살아 갈수록 이러한 사랑의 경지는 아직도 아주 먼곳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인간의 사랑과 만남은 여러 형태일 것이다.

세상에는 이웃이나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고 타인의 선익까지도

강제로, 무력으로 강탈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사랑의 일종이긴 하지만 이기적인 사랑이며,

남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고 이익을 챙기는 방법이다.

사기, 강도, 폭력, 심지어 살인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참 무서운 괴기 영화를 본 적이 있다.

「古城의 女人」 (La morte vivante) .....

남을 희생하여 자신의 유익 만을 챙기는 행위는 바로 이와같은 것으로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할 인간 공동체, 인간성을 거부하는 잔인한 행위이다.

두번째 사랑의 모습은

'주고 받는' (Give and Take) 식의 사랑이다.

적극적인 사랑이라기보다, 그래도 평범하고 보통 사람들이 하는 무난하고

또 어쩌면 교양있고 품위있는 이들의 처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도 않고 또 남에게서 손해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적인 태도라고 보겠다.

그리고 남이 무엇인가 나에게 잘해주면, 나도 그만큼은 베풀 줄 아는 신사적인 사랑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사랑도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이들을 많이 본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는 들어가는 것만 있지 자기 주머니에서 꺼내 남에게 줄 줄은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고 받는 사랑의 수준에만 머물러도 그 사람은 공동체 생활에서 그래도 인정받고

더불어 무엇인가 힘을 합해 해 볼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세번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찬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으로서 가장 차원 높은 사랑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세속적으로 생각해 볼 때 손해받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에겐 손해가 되는 사랑이다.

자기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원수, 자기에게 손해를 끼친 이들,

옛날에는 부모친척을 죽인 이들이 보통 철천지 원수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교묘하게 사기를 쳐서 자기 사업을 망하게 한 이들이 원수일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기를 못살게 굴고 자기의 성공을 시기하고 저지시키고

온갖 중상모략으로 방해한 이들, 이들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하고,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마저도 내어 줄줄 아는

아낌없이 이웃의 필요에 도움을 주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거기엔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를 저주하는 이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인데

이것도 말로만의 축복이 아니라 진실한 뜻이 담겨져 있는 축복이어야 한다.


정말 예수님의 이러한 이러한 요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요구인지도 모른다.

남녀 간에 서로 끌리는 정으로 결합하여 함께 사는 부부들도

여러가지 이유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 간에 미움을 갖고 살기도 하는데,

자기를 해치고 못살게 구는 원수들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차원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또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워주어라』

고 예수님은 요구하신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의 견지에서 이것을 실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닮으려는 거룩한 마음과 신적 은총의 힘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희생만을 즐겨하는 심리학적으로

마소키즘(자기 학대증)적인 경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따르려는 마음이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진실되이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따른 이들에게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고 그것을 생각해 주신다는 점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는 자기희생적인 거룩한 모범을 통하여

원수도 감화되어 나쁜 마음을 돌이키고 감화되어 참된 인간이 되도록

초대하는 행위라고 보겠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성도들이기에

따뜻한 동정심과 친절한 마음과 겸손과 온유, 인내로서 마음을 새롭게하며,

서로 도와주고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거져 주셨으니 우리도 자기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거져 주라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마음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부한 생명력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게 될 것이다.

희랍어에 아가페라는 말은 타인에게 대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적이며, 능동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 말은, 타인이 나에게 어떠한 태도로 대하던지 간에 그의 행복을 기도하며, 바라는 태도이고,

자신의 이해를 굽혀서라도 자진해서 상대방에게 착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같이,

마음속으로 부터 원수를 사랑하기는 인간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또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가능한 일이며, 그릇된 것이라고 하기도 하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살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자면,

상대방이 내 자신을 모욕하고 중상하고, 해독을 끼쳐온다 하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를 용서하며,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좋게 가져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죄 때문에 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대신 희생 되셨기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용서 받은 내 자신도 그리스도를 닮아서 타인을 용서하고 착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감정으로가 아니라, 의지적인 노력으로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듯이 어쩔 수 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저절로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기에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며,

크리스찬의 믿음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