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아씨시 가기 전
성 다미아노 성당에 걸려있는 십자가~~~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 지는 편이 낫다."(루카17,1~2)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스칸달라'(skandalla; offences)의 본래 의미는
'덫'(trap)이나 '장애물'로서, 새성경에는 '올무'(묵시2,14),'부딪히는 돌'(로마9,33),
'거리끼는 것'(1코린1,23)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형제를 유혹에 빠트리거나 거짓 교리 또는 가르침 등 잘못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에 죄를 짓게 만드는 요소가 늘 산재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신다.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로 번역된 '아넨덱톤'(anendekton; impossible)은
'가능하다','허락하다'란 뜻이 있는 '엔데코마이'(endechomai)동사에
접두사 '아'(a)가 결합된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불가능하다','절대 허락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다시 부정 불변사인 '메'(me)와 연결되어, 범죄하도록 이끄는 행동이
가능할 수 밖에 없다라는 강한 긍정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세상에는 늘 죄를 짓도록 하는 요소가 존재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형제)을 죄짓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에서 찾고 계시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시면서,
그러한 유혹이 반드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더욱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함을 교훈하고 계신다.
이처럼 사실 자체에 정확한 인식과 현실 극복에 대한 강인한 지향이 있어야 됨을,
예수님께서는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는 매우 강조적 어법으로 제자들에게 촉구하신 것이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가 얼마나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죄짓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본절의 전반적 의미에 대해서는
병행구절인 마태오 복음 18장 6절과 마르코 복음 9장 42절 이하를 참조하면 된다.
'걸고'로 번역된 '페리케이타이'<perikeitai; that were hanged(tied)>와
'내던져지는 편이'로 번역된 '에르립타이'(erriptai; he cast)동사는 중간태 내지는 수동태로서,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가 제3자 즉 사법당국에 의해서 수장되는 형벌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연자매(millstone)가 매여지는 '그 목'은 남을 죄짓게 한 당사자의 목이며,
그 목에 연자매를 걸어 바다에 내던지는 주체는 형벌을 집행하는 사법당국이다.
17장 2절 본문의 초두에 기록된 '낫다'라고 번역된 '뤼시텔레이'(lysitellei)는
'더 좋다'(it is better)라는 뜻으로사용되었으나, 본래 이 단어의 의미는
'세금을 지불하다'로서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면,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과 같은
준엄한 형벌이 반드시 주어짐을 전제하는 동시에,차라리 이러한 형벌이 더 낫다는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즉 연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자, 소외된 이웃,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없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 중
하나를 죄짓게 해서 내세에서 무서운 형벌을 받는 것보다 바다에 수장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낫다는 의미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유대 사회에서는 흔치 않지만 당시 로마 사회에서 흔히 시행되던
가혹한 형벌을 언급한 것은, 사람들이 흔히 가볍게 생각하기 쉬운 작은 이들 중에
하나를 죄짓게 하는 행위에 대한 형벌이 바다에 내던져 죽는 형벌보다
더 크게 주어질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을 애타는 심정으로 막고자 하신 것이다.
<신부님 묵상말씀>에서 복음을 읽으면서 의문되는 것들을 주해하고 공부하는 시간도 함께 가져본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날 고백성사 볼 때의 경문이 생각난다.
죄를 사제에게 다 고백한 후, <남이 날로 인해 범한 죄 있사오니,
신부는 도무지 이 죄인을 벌하고 사하소서. 아멘.>이란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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