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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신부님들의 강론

~ 연중 제 34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 이균태 신부님 ~

 

축일:11월27일(29일)

성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파사니



성 프란치스코 안토니오는 1681년 8월 6일
남부 이탈리아 루세라에서 태어나 꼰벤뚜알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사제품을 받고 철학 교수로 봉직했으며 열심한 설교가였다.

 

관구 봉사자로 재임하면서 외적으로 수도원 성당을 보수하는 한편
내적으로는 엄격한 가난에 관심을 기울여 관구를 쇄신하였다.


엄격한 개혁가이면서도 사랑 깊은 봉사자였다.
1742년 11월 29일 고향에서 선종하였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홈에서 www.ofmconv.or.kr)


 


     

       

       

       

      찬미예수님!

       

       

      오늘의 미사강론

       
       

       


      11월 27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미사 강론



      복산성당 주임 신부 이균태 안드레아

       

       

        



      어제 날씨는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새벽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이 거리의 가로수 잎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하더니, 오후에는 진눈깨비도 내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너도 나도 두꺼운 옷을 입고, 목도리도 하고,

      머리가 홀빈한 분들은 겨울 모자도 쓰고 다니셨다.


      새로운 계절, 겨울에 적응하기 시작한 셈이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2015년 한 해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이제 내일 모레가 되면, 2016년이 시작된다.


      대림이라는 새로운 기다림을 시작하기 직전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나무의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계절의 바뀜을 알 수 있듯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을 보고 새로운 나라가 다가온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도 하신다.


      내가 알고 있는 지인들 중에 지요하라는 시인이 있다.

      1948년 생이시니까, 올해로 벌써 예순 여덟이시다.


      2012년 쌍용차 2046명의 해고 해직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한 미사가

      1년 넘게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있었는데,

      그 때, 매주 만나뵈면서 알게 된 분이다.


      그분이 얼마전 10월 20일경에 글 하나를 발표하셨다.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글이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하는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는 글이었다.


      이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다.


       



    언젠가 동네 술집에서 목격했던 일이다.

    한 친구와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옆 자리의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였다.


    60대로 보이는 사람과 3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남에도 그들은 친숙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말싸움 내용이 재미있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재래 속담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쪽이었고,

    젊은이는 그 속담이 그르다는 쪽이었다.


    젊은이의 주장은 이러했다:


    “서울을 가려면 제대로 가야지 왜 모로 갑니까?

    모로 가면 그게 제대로 가는 겁니까?

    그런 속담에 속지 마세요.

    서울을 가려면 제대로 똑바로 가야지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정정당당하게 살아야지요.”


    청년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했지만

    나이 든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무릇 세상일에는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태도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급기야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젊은이를 나무라기도 했다.

    게다가 어른이 말하면 다소곳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그게 무슨 못된 버릇이냐는 일갈까지 나왔다.


    화가 난 젊은이는 내게로 와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글쎄요.”

    내가 잠시 난감해하자 그 청년은 재차 물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그 속담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도리 없이 싸움에 휘말린 꼴이 되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의 전도 현상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나이 드신 분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쪽이고,

    젊은이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쪽이라면 그런대로 모양새가 됩니다.


    세상을 많이 살아서 옳고 그름을 좀 더 잘 분별할 수 있는 어른이

    그 속담은 옳지 않다 하고,

    자기 앞가림을 위해 앞을 보고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젊은이는

    그 속담이 옳다고 해야 뭔가 앞뒤가 맞을 것 같은데,

    두 분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전도 현상이라는 거고,

    저는 그 전도 현상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는 내 말 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나이 든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적의도 느껴졌다.

    좀 더 술이 들어가면 내게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와 친구는 곧 술집을 나와 버렸다.


    막무가내 노인을 보던 그때가 떠오르는 요즘 오래 전 일인데,

    요즘 다시 그때 일이 선연히 떠오른다.


    여전히 그런 이상한 전도 현상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거나

    옳은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상은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옳지 않다고 항변하는 젊은이에게

    한사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박박 우기는

    노년층이 사회 전반에 널려 있다.

    젊은이 앞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태도를 계속 고수하며,

    그것을 반박하는 젊은이를 버릇없다고 일갈하던 억지가

    오늘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 노인이 살아 있다면

    지금도 그런 막무가내 태도를 고집할지 궁금하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젊은이를

    나무라고 일갈하던 노인이 주변에 참 많다.


    그러지 마시라.

    불순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버리시라.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계속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넘어지는 수가 있음을 명심하시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 참 그럴싸한 구호다.

    그러나 입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지만,

    정작 내 삶은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많다.


    성당에 나가고, 예배당에 나가고,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 찾아 다녀도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늘 변화하는 삶, 늘 깨어 있는 삶은 살지 않은 채,

    그저 옛 것이 더 좋다, 몸에 익은 것은 더 편하다면서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나라는 과거 악습과의

    완전한 결별에서 시작되는 나라다.


    새 하늘 새 땅은 지금까지 이 하늘과 땅을 더럽혀 온 모든 부정과

    야합이라는 죽음의 문화를 깨끗이 포기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나라다.


    단풍 든 이파리들이 하나씩 둘씩, 자기를 붙잡고 있던

    가지들과 결별하고 땅으로 돌아가고 있는 계절이다.


    내년에는 그 이파리들이 떨어진 자리에 다시 새순이 돋을 것이다.

    때가 되었는데도 사라지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참 추하다.


    바뀌어야 하는 세상,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져 가는 이 세상에 도무지 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늘도 옛날 타령만 하고 과거의 바지꼬랑이를 물고 늘어져

    자기의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 역시 추하다.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생명은 자연 도태될 뿐이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죽어 가기를 부정하는 것은

    오로지 죽은 생명들뿐이다.


    오늘 복음은 나에게 이런 물음을 던지며, 성큼 성큼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산 생명을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살고 싶은 것인가?”

    여러분에게 오늘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가?




     
     
     

     

     

     


      

    사랑의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