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5일 화요일 묵상과 기도
<성무일도> 이사 4,2-3
그날에는, 주께서 돋게 하신 싹이 살아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영예로울 것이며 땅에서 나는 열매가 자랑스럽고 소중하리라. 시온에 살아 남은 자, 예루살렘에 남은 자는 성도라 불리리니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남은 생존자의 명단에 오른 이들이다.
응송
◎ 세상의 임금들이 * 모두 다 주께 조배 드리리라.
○ 만백성이 그이를 섬기리라.
<청원기도>
세상에 오시어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되시고 성덕의 스승이 되신 그리스도여,
―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 주님의 탄생으로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의 복음 말씀> 마르 6,41-44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영적 독서> 내 영혼을 위한 3분, 게르하르트 바우어 지음: 최용호 옮김
오르막길, 분주한 시간
자신을 위한 화살기도
누구나 바쁜 일상에 치이다 보면 일을 잠시 멈추고 쉬어 가기를 바랄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매일을 보내며 어서 주말과 휴일, 휴가가 오기를 고대하지요.
누구에게나 휴식은 필요합나다. 그러면서도 정작 우리는 잠깐의 쉬는 시간어 주어져도 그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왜 그 시간을 한숨돌리며 영혼에 여유를 주는 일에 쓰지 못하고 따로 휴식이 주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될까요?
우리의 일상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이 꽤 많습니다. 상점의 계산대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 앞에서, 꽉막힌 도로 위에서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시간중에 단 l분, 아니 면 몇 초라도 심호흡을 하고 정신을 집중해 보세요. 그것이 자신을 위한 화살기도’입니다.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일상에 쫓길 필요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지게 되는 쉬는 시간을
활용해 심호흡을 하고 안정을 찾으면서 잠시나마 일을 멈추어 보세요. 아마 그 자체가 이미 기도이자, 휴식이 될 것입니다.
사진: 이태리 그레치오 은둔소 성프란치스코)
Photo: Italy Greccio San Franc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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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화요 강좌>
영성 강좌
영성신학, 샤를르 앙드레 베르나르 지음/박제천·박일 옮김
2.영성과 신학
1) 역사적 개관
12세기 말엽과 13세기 전 기간을 통해 신학적 성찰은 학문적 형태를 취하는 경향을 띠게 되어 신학적 성찰은 성경 주석으로 인식되던 신학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철학적 탐구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미 한편으로는 주석학적 설명들과 다른 한펀으로는 신학적 논쟁집이나 신학 대전류 등으로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와 같이 한 신학자가 주석과 신학 강의들을 모두 맡아서 한 경우도 있었다.
신학 교사의 강의와 수도승의 강화(講話)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신학자는 성경 본문의 객관적 내용을 밝히고자 노력하며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하여 증언에 담긴 정서적이고 인격적인 공통 요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경향이 있는 학문을 수립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객관적으로 취급되고 따라서 강의는 인격적 내면성이 상실된다, 그리하여 수도승들은 성경 묵상에 매진하고 성경올 내적으로 맛보도록 이끄는 해석을 제시하는 반면, 신학 교사들은 다른 학문들, 특히 철학과의 관계에서 객관적인 학문이 되도록 연마하게 되었다.
신학은 늘 더욱 엄정한 학문성을 추구하면서 빠르게 여러 분야로 나뉘었다. 비록 신학 논집들이 신학적 성찰을 망라하여 제시한다 하더라도 교육의 필요성에 의해 논점에 따라 그리고 마침내 큰 주제들에 따라서 세분되었고 이것들이 결국 다양한 신학 과목들이 된 것이다.
이제 신학의 전문화에 관하여 중세 신학자들의 사상을 더욱 잘 이해하게 해줄 관찰을 한 가지 해 보기로 하자 모든 학문적 성찰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그 학문을 연구하거나 그에 대해 저술하는 사람의 주관적 상태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스콜라의 거장들에게 있어서는 신학은 신앙의 이해에 대한 개인 차원의 훈련으로 간주되어 영성 생활과 분리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1217-1274)의 다음 주장이 뜻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정서적 “습성”, 즉 주관적 성품으로서, 사변과 실천사이의 매체이고, 관상과 인격적 진보를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인격적 진보(우리로 하여금 선한 사람이 되게 함)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다. […] 이런 “습성”을 지혜라고 부르는데, 이 지혜는 인식과 사랑을 동시에 의미한다.
신학에 대한 이런 사상은 우리가 스콜라 신학을 연구하는 태도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신앙 없이도 스콜라 신학을 공부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신학의 거장들이 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했는지에 상관없이 신학은 점점 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인 학문으로 제시되었다. 성 보나벤투라가 신학적 성찰의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인정했던 구분은 이제 객관적 구분이 되었다. 주석과 달리 신학은 사변적 신학 혹은 교의신학, 실천신학 혹은 윤리신학, 그리고 정서신학 혹은 영성신학으로 세분되었다.
모두가 그 독특함을 인정히는 신비 관상의 영역은 마지막에 언급된 영성신학에 속했다. 위(僞)디오니시와(6세기 초)의 『신비신학』 이란 유명한 소품은 4세기 시리아의 헬레니즘적 환경에서 쓰였는데 서방 신학은 물론 에바그리오 폰티코(345-399)를 선두로 하는 동방 신학에도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신비 체험의 문제는 여전히 영성신학의 부동의 영역임은 분명하니, 그것은 신비가가 수동적으로 알게 된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체험에 직접적으로 의거하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은 연역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체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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