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그를 없애려 합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 때문에 박해와 죽음의 위협 중에서도
죄 많은 백성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도 그 길을 걸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하늘 나라에서 두 아들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그분께 청합니다
(20,21).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께서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며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냅니다
(20,2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6)고 하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섬기는 자'이며,
하늘 나라에서는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사람의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사람이
큰 사람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처럼 낮아지고 작아지는 역설을 살아낼 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서(20,28) 모든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뒤집으시며
인간을 섬기셨듯이 우리도 ‘심부름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을 섬기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섬기려면 나를 떠나 다른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하고,
자신을 낮추어 섬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고
그 사람의 뜻에 맞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섬기려면 시간을 내어 땀을 쏟아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처럼 인간을 완전히 섬기려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섬김은 타자(他者)에게로 내 삶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고,
그 사람과 함께하며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하고 그 맛에 길들여집니다.
그러나 현세에서 섬김을 받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섬김을 받는 편한 삶을 위해
더욱더 돈과 힘, 학식과 명예를 얻으려 애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다른 이들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그 근원을 생각해야겠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으로부터 온 이들은
하느님의 얼로 살아가야 하고,
예수님이 사셨던 방식을 따라 살 때만
행복해질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주셨듯이
'남을 위해' '남을 섬기며'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또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살(肉)을 취하시고, 낮추시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래로의 몸짓’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은 그저 외적으로 낮은 자처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시고, 살을 취하시고
목숨을 다해 우리를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의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모두가 신명나는 삶의 축제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telegram.me/kifran
♬ 사랑의찬가 - 신상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