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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부활 성야- 살아계신 말씀안에서의 삶 / 조욱현 신부님 ~

부활성야: 다해: 살아계신 말씀 안에서의 삶

  복음: 루카 24,1-12: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부활을 알리다.

 

주간 첫날”(1), 이 날은 주일이다. 여드렛날이자 첫째 날인 그날은 영원을 나타낸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고, 그 날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후(1코린 15,26 참조)

우리는 그 여드렛날을 그 날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1코린 15,23)게 될 것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그 아들이 먼 고장에서 돼지를 치는 등 온갖 비참을 겪으며,

죽어야 하는 처지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여드렛날인 마지막 날에,

처음에 입었던 겉옷을 다시 입게 된다는 말이다.

  거룩한 여인들은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1)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안식일 저녁에 향유를 준비하여 밤새도록 무덤을 향해 갔고 새벽에 무덤에 도착한 것이다.

금요일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저녁이 되자 무덤에 갈 준비를 하고는 주님께 헌신적이었던 그들은

향유를 가지고 주님께 발라드리기 위해 무덤으로 갔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단지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신을 잘 보존하려고 한 것일 것이다.

하여간에 그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이 굴려진 상태였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그곳에 없었기에 여인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돌이 굴려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율법의 문자에 가려지고 닫혀있던 성사들이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면,

바로 닫혀있던 그분의 무덤이 열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분이 부활하시어

더 이상 육신으로 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은 이미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히 임마누엘이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부활의 소식을 전한다.

그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 때도 목자들에게 탄생소식을 전하였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5-6)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계시고 생명이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의 죽음은 죽음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셨다.

그분의 부활은 우리가 썩지 않는 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이 되시고자 부활하셨다.

그러기에 살아계신 분을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살아계신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한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에게 이 부활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헛소리로 여겼다.

인간은 이렇게 나약하고 한심하다.

하와가 뱀이 한 말을 전했을 때,

그 때는 남자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우리 모두가 죽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를 살게 할 진실을 전하는 여자들을 남자들은 믿지 않았다.

여자들이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어째서 아담은 하와를 믿었던 것일까?

여자들이 믿을만한 존재라면 어째서 제자들은 여인들을 믿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

아마 그것은 여성으로 인해 타락했던 것을 여성으로 회복하시려는 것이다.

한 처녀는 그리스도를 낳았고 한 여자는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전했다.

한 여인을 통해서 죽음이 왔고 한 여인을 통해서 생명이 왔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실이 헛소리가 되었다. 오늘도 누가 부활소식을 전한다면

우리도 그 사람의 말을 헛소리로 여기고 그 사람이 미쳤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못들은 체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다.

우리가 그런 병을 앓지 않도록 앞서갔던 제자들이 그 병을 이미 앓았던 것이다.

바로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의 의심과 불안을 보는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도록 말이다.

그들은 본 것으로 우리를 가르쳤고, “들은 것으로 우리를 지도했고,

그들이 만진 것으로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들이 의심했기에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음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는 빈 무덤을 보고 놀랐다. 주님께서는 아마포를 남겨두셨다고 한다.

옷을 남겨두셨다는 것은 아담이 죄짓기 전처럼 알몸으로(창세 2,25 참조)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옷을 입고 낙원을 떠나야 했던 그는 이제 다시 그리로 들어갈 때는 먼저 옷을 벗어버려야 했다.

아니면 죽은 이들의 부활이라는 신비의 상징일 것이다.

주님께서 옷을 버리시고 부활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옷이 아니라,

우리의 행실을 입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부활하신 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러한 은총을 청하며 감사를 드리자.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조욱현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