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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

~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 / 조욱현 신부님 ~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

-조욱현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기도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들었다. 주님을 올바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기도도 잘 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18,20: 아브라함의 기도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 야훼와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도시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악을 편들어 변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50명에서 10명) 그 도시에 있을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의 선으로 그 악을 상쇄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32절)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예레 5,1). 예제키엘 예언서에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단 한명을 요구하고 있다(에제 22,30). 만일에 아브라함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제시하였다고 해도 하느님은 허락하셨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죄 없는 사람’의 역할은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1독서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 기도의 힘은 우리 인간의 관심과 한계를 훨씬 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그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 대해 거리낌 없이 표현되는 듯한 기도의 대담성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신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기도자는 진정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루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떤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1절).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부성’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4절)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는 “아빠”라고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태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 즉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출 것을 가르쳐주신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권위주의와 엄격함으로 변모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아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다운 태도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주시고 계시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마태 18,3)하는 의지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에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매일의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으신다. 영적이면서 육적인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기도가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도는 자기 소외와 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이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항상 새로운 은총과 힘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매일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실현시키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자유로운 마음과 자녀다운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모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루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