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있어서의 갈등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참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일시적인 나쁜 경향 또는 거짓된 보증,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로 사람들과 상황을 새롭고 대담하게 판단하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이 되고 만다. 이 때의 심정을 예레미야는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옵니다”(예레 15,10)라고 한다.
복음: 루카 12,49-53: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예언자의 운명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은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49-50절). 여기서의 ‘불’과 ‘세례’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깊은 물 속에 잠기는 행위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이지만 구원을 성취시켜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시는 그리스도의 강렬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크신 사랑과 숭고한 가르침 앞에 인간은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짓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가족들 간에도 만남과 충돌의 분기점이 되고 있다951-53절). 즉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근본적인 선택에 있어서 대립되게 되면 불일치가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종류의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대립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필연적 소명 때문에 복음과 일치되지 않는 사상체계, 정치적 사회적 관습, 그리고 굳어진 현실을 거슬려 싸우는 ‘투쟁자’가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 거기에 동조하고 만다면, 그것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내버려져 짓밟히게 되는(마태 5,13) ‘맛을 잃은’ 소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분의 말씀에, 그리고 그분을 닮으려 노력하는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적인 평화를 이루라는 말씀이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내면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의무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결정적 가치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메시아의 때가 그들의 눈앞에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함을 비난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의 여러 기적사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요란스러운 ‘표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일인지 스스로 판단할 줄을”(57절) 모른다면 이것은 그분도, 그분의 메시지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마음이 거짓되어 진실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겉꾸미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리스도는 예레미야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거추장스러운 예언자이시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원초적 의미로 볼 때, ‘투쟁적’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뜻을 안다는 것’(56절)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예언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신앙인은 모두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의 세례를 통해 세례를 받고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 타오르게 하신 성령의 불로 자신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그분께 ‘충실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2,1-4: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기에 2독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를 것을 권고하고 있다.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이 ‘표지’에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해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내신”(2절)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는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 때문에 가치관의 변화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과 이미 대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가족들 사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내 자신 안에서 가치관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게 되어 있다. 이 갈등을 통해서 진정 우리에게 평화를 가질 수 있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러한 갈등을 겪을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에 일치시켜 평화를 이끌어 내느냐가 내 몫으로 남는 것이다. 이 몫을 잘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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