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3월6일
성 크로데강 주교
San Crodegando di Metz Vescovo
St. CHRODEGANG of Metz
(Hesbaye, Belgio, 712 – 6 marzo 766)
Born: c.712-17 at Hesbaye, Brabant, near Liege, Belgium
Died: 6 March 776 at Metz; relics, in the Benedictine Abbey of Saint-Symphorien,
were destroyed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성 크로데강은 712년경 현재 벨기에 북동쪽 림뷔르흐(Limburg) 주의 하스바니아(Hasbania) 혹은 하스판구아(Haspangua)에서 프랑크족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근거는 희박하지만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트롱(Saint-Trond)의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카를 마르텔의 궁정으로 들어가 그의 서기가 되고 737년에는 총리가 되었다. 메스 교구의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741년 10월 1일 혹은 742년 9월 30일에 평신도였던 성 크로데강이 메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그는 후에 카롤링거 왕조의 최초의 왕이 되는 피핀 3세(Pippin III)의 요청으로 세속적인 사무도 계속 담당하였다.
피핀 3세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교회와 국가의 복지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였다. 성 크로데강은 자신의 교구에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도입하였고, 주교좌 성당 사제단의 공동생활을 도입하고 생활규칙도 저술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적으로 의전 사제단(Chapter of Canons) 설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의 재건과 신설에 주력하였고, 그가 메스에 세운 음악학교는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인츠(Mainz) 대교구장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 대주교가 순교하자, 교황은 그에게 팔리움을 하사하여 대주교로 서임하고 프랑크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메스 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키지는 않았다. 경건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지녔고 라틴어와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성 크로데강은 프랑크 교회의 개혁자인 성 보니파티우스의 후계자로서 23년 동안 사목하면서 개혁을 위한 교회 회의들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766년 3월 6일 메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홈에서)
*독일의 사도.성 보니파시우스 주교 순교자 축일: 6월5일
의전사제단 儀典司祭團 라틴어 chapter of canons
주교좌(主敎座) 소속이거나 단체 소속이거나 주교좌 성당이나 단체 성당에서 좀 더 장엄한 전례예식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단체이다. 의전사제단은 그밖에 법이나 교구장주교에 의해 위임된 임무도 수행해야 하며 업무와 집회, 업무의 유효성이나 합법성에 요구되는 조건, 보수, 복식 등을 정한 정관을 갖는다. 이 정관은 교구장 주교의 인준을 받아야 하며 그의 승인이 없는 한 개정되거나 폐지될 수 없다. 새 교회법은 의전사제단을 사목구에 결부시키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사목구 성당이면서 동시에 의전사제단 성당인 경우에는 의전사제단과 상관없이 사목구주임이 지명되어 법규정에 따른 고유한 직무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의전수도회 儀典修道會 라틴어 canonici regulares 영어 canons regular
사제들로 구성되어 전례생활을 주목적으로 하여 고유한 회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회, 중세에서 발달한 성대서원수도회의 한 형태이다. 대성당에서 공주(共住)하는 사제들에게 공동의 회칙에 따라 생활하며 사유재산을 버릴 것을 권유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신에 따라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초에 대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널리 조직되었다. 중세기에 가장 큰 의전수도회로는 성 아우구스티노 의전수도회(Canonici Regulares St. Augustini)와 프레몬트레회(Praemontratenses) 등이 있는데 중세가 끝나면서 쇠퇴한 다른 의전수도회들과는 달리 현재까지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현대에 와서 전례생활 외에 다방면의 교육과 사목, 사회사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팔리움(라틴어 pallium)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경우에 따라 다른 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祭衣) 위에 목과 어깨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의 양털띠. 흰 모직천으로 만들어지는데 특히 성 아녜스 교회에서 아녜스 축일에 축성되는 어린 양의 털로 만들어 진다. 띠의 폭은 5센치 정도. 두 개의 늘어뜨린 장식과 함께 검은 색의 작은 십자가가 6개 장식되어 있다. 어깨 둘레에서 고리 모양으로 놓여 져 핀으로 고정되어 끝부분이 가슴 아래로 드리워진다. 팔리움의 초기 역사는 모호하나 황제의 휘장(徽章)에서 유래된 듯하다. 처음에는 로마 교황청과 아무런 연관없이 즉, 교황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과 상관없이 대주교가 착용하였다. 후대에 교황 자신이 팔리움을 착용하게 되고 특별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고위 성직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팔리움을 보내 주게 되었으며, 교황으로부터 팔리움을 받는 것을 점차 원하게 되었다. 9세기에는 모든 교구들이 팔리움을 받고자 하는 청원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각 교구는 대주교 성성식(成聖式) 후 3개월 이내에 팔리움을 위한 청원을 교황에게 해야 한다. 이 청원이 허락되어 대주교가 장엄 주교미사에서 팔리움을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관할구역 내에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팔리움을 ‘주교 임무의 충실성’(plenitude of the pontifical office)과 교황 권위에 참여함을 상징하고, 교황청과 일치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지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피핀 3세 Pippin III, Pepin the Short
(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당시의 상황과 왕위 등극]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실권을 잃었고, 권력은 점차 백작들과 다른 세력가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본래는 왕실의 살림을 맡는 관직이었던 궁재(宮宰)가 점점 왕보다도 세력이 커져 섭정이나 부왕에 맞먹는 지위에 해당하게 되었다. 그러한 궁재들 가운데 부유한 가문 출신인 란덴의 피핀(피핀 1세)은 특히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가문의 후손으로 741년에 죽은 카를 마르텔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우스트라시아·알레마니아·튀링겐의 궁재인 카를로만이고, 둘째 아들이 바로 피핀 3세로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프로방스의 궁재였다. 737년 이후 프랑크 왕국 전역을 다스린 왕은 없었으나 메로빙거 왕조의 종주권만은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두 형제는 743년 힐데리히 3세에게 왕관을 씌웠다. 카를의 셋째 아들 그리포는 그의 정부였던 듯한 바이에른 고위 가문 출신 여인이 낳은 아들로, 741년 형들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었을 때 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후 수년 동안 많은 반란을 지휘해 몇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나 결국 753년 프랑크와 적대하고 있던 롬바르드족과 합류하기 위해 가던 도중 알프스 산길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롬바르드족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 공동의 적이었다. 그밖에도 742년 아키텐과 알레만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743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가 전투를 벌였다. 744년에는 작센이, 그뒤에는 아키텐(745)과 알레만니아(746)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747년 카를로만이 수년 간 생각한 끝에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자 피핀은 프랑크의 단독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야심을 갖고 있어 궁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어 프랑크족을 다스리고 싶어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던 반면 아버지와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긴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750년 그는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사절 2명을 보내 편지로 이렇게 질문했다. "다스릴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왕을 모시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입니까?" 교황은 "통치능력이 있는 왕을 갖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마 교황의 권위로써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라는 대답을 보냈다. 결국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으로 보내졌으며, 피핀은 751년 11월 수아송에서 보니파키우스 대주교와 몇몇 성직자들에 의해 왕으로 축성받았다.
[피핀과 교황 스테파누스 2세]
당시 교황청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롬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는 총주교대리령으로 알려진 라벤나와 그 주위 영토를 장악했고 롬바르드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해 로마를 포위하고 함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752년 자카리아스가 죽은 뒤 교황의 자리에 오른 스테파누스 2세는 753년 11월 험한 산길을 지나 프랑크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754년 여름까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 머무르면서 피핀과 그의 아들인 카를(샤를마뉴)과 카를로만을 각각 왕과 후계자로서 축성해주었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으며 알프스에서 아이스툴프가 거느리는 롬바르드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이스툴프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로 도망치자 피핀의 군대는 파비아 주변의 땅을 약탈했다. 결국 아이스툴프는 라벤나와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재산과 라벤나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때 피핀은 물러갔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교황은 수차례에 걸쳐 피핀에게 자신의 고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피핀은 756년 다시 이탈리아에 왔고, 아이스툴프는 다시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756) 757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롬바르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같은 해 스테파누스도 죽었고, 새로 교황에 선출된 파울루스 1세는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피핀에게 계속 도움을 구하는 서신을 냈다. 그러나 피핀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748, 753년에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과 749년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해야만 하는 한편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던 아키텐에도 진격해야만 했다. 피핀은 768년 아키텐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드니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창시자로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의 강력한 후원자였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교황의 권리 주장은 피핀이 아이스툴프와 싸운 뒤 아이스툴프가 로마 주위의 영토를 반환한다고 서약한 데서 비롯된다. 피핀은 프랑크 왕국 내에 대주교령(大主敎領) 설치를 원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종교회의를 장려하고 신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는데, 이런 사실들은 그가 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E. S. Duckett 글
샤를마뉴, 스투코로 된 조상(9세기경),
스위스 뮌스터에 있는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소장
출처 : Copyright © By courtesy of Weidenfeld & Nicholson Ltd. ; photograph, Ann Mun
샤를마뉴 Charlemagne
샤를 1세,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경.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샤를마뉴는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세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시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ál, 폴란드어의 król 등).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로사(1234 - 1252)는 문자 그대로 영신 생활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린이였다.
이미 9 살 때 성모님의 인도로 3 회(재속프란치스코회) 착복을 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녀는 자기 집의 조그만 골방에서 관상생활과 극기 생활을 하였다.
또한 자주 거리에 나가 참회할 것을 비테르보 사람들에게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프레데릭 2 세의 반 교황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제국 당국은 그녀와 부모를 비테르보에서 추방하였다.
로사의 설교. 특히 마니교 이단을 거스려 하는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었다.
비테르보로 돌아와 글라라회에 입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자신이 공동체를 설립하려는 계획도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1252 년 18 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하늘의 정배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썩지 않는 유해는 알렉산델 4 세에 의하여
글라라회 수녀원으로 이장되었으며 갈리스토 3 세에 의하여 1457 년 시성되었다.
그녀의 무덤에서는 지금도 계속하여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작은형제회홈에서)
비떼르보에서 태어난 성녀 로사는 병을 앓던 8세때에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성프란치스코의 수도복을 입으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후에도 집에서 그냥 지내면서 평범한 여성으로 자랐다.
병이 회복된 그녀는 평신도의 회개 복장을 하였고, 우리 주님의 고난을 더욱 절실히 체험케 되었으며,
죄인들의 무례함과 배은망덕을 대신 속죄하였다.
그후 12세기경부터 그녀는 타오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길 수 없어 거리로 뛰쳐 나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수한 경고를 하였다.
이때문에 그녀가 집에 감금되었고, 이리하여 로사와 그 부모는 추방되어 소리아노로 갔는데,
그녀는 여기서 그당시의 독재자인 프레데릭 황제의 죽음을 예고하였고,그것은 꼭 13개월 후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고향으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비떼르보에 있던 로사의 성마리아 수녀원 입회를 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녀의 주임사제가 성당 곁에 수녀원을 만들고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살도록 주선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곧 운명하니, 그녀의 나이는 17세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하느님께서는 성인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기적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본다.
그 중에서도 더욱 현저히 나타난 기적은 비테르보의 성녀 로사의 일생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1235년 이탈리아의 비테르보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가난했으나, 자식으로는 로사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될 수 있는 데까지 주의를 다해 교육 시켰다.
그러나 그녀의 교육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은 부모의 힘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아직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한 어린 로사가
근처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회 성당에 가서 경건한 모습으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본 부모나 사람들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로사는 강론때에 방울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신부의 강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돌아와,
부모에게나 혹 다른 아이들에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2,3 년 후부터 로사는 이미 고신 극기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방에 조그마한 제단을 꾸며놓고 대부분을 그 앞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잘 때에는 한 장의 판자를 요로 삼았고 하루에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
너무 엄한 단식(斷食)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그래도 항상 그녀의 얼굴은 기쁜 빛이 감돌며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거지들을 반가이 대하며 자기 몫인 음식을 나누어 먹이기도 했다.
그 당시 로사에 대한 몇 가지 기적이 전해져 내려온다.
어떤 가난한 집 아이가 하루는 꽃병을 깨뜨렸다.
로사는 불쌍한 생각으로 그 꽃병 조각을 모아 그 위에다 십자가를 그렸다.
그랬더니 즉시 그 병은 전과 같이 되어 금이 난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로사는 열 살 때 중병에 걸렸었다.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될때 그녀는 묵시를 보았다. 즉 천당, 연옥, 지옥의 모양이었다.
그러자 성모님이 나타나서 그녀에게 예쁜관을 씌워 주시며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시고,
앞으로의 생활 방식과 그녀가 해야 할 일들, 또 그녀가 받을 박해와 고통에 대해서도 친절히 깨우쳐 주셨다.
이리하여 그녀는 완쾌한 후 거치른 옷에다 끈으로 만든 띠를 허리에 둘렀다.
그녀는 탈혼 중에 어린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게서는 이미 가시관을 쓰시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것을 본 로사는 애처로운 생각에 잠겨 자기 몸을 피가 나도록 매질했다고 한다.
그 당시 황제 프리데리코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 군대는 이탈리아까지 침입하여 많은 학살을 감행했다.
비테르보와 그 부근의 촌락도 그 마수를 피할 길이 없었다.
바로 이때 로사는 분연(憤然)히 일어나 세상의 불신, 부도덕, 호화와 사치며
기타 부정을 책하는 일 장 연설을 했는데,
그 웅변 태도며 그 말의 구절 마다가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았다.
로사는 네거리와 광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누구에게도 보일 수 있는 높은 돌이나 기둥에 서서 연설을 햇다.
불과 12세인 이 소녀의 열변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 말에 감탄하여 회개하고 죄의 보속을 했다.
프리데리코의 부하들은 이 소녀를 대단히 불쾌히 생각하여
비테르보 시장으로 하여금 로사의 가족을 즉각 추방하도록 했다.
그 부친은 "지금은 겨울이요, 돈도 없고 정처도 막연하니 잠깐만 여유를 주십시오.
지금 우리를 추방한다면 우리는 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하며 애원했으나 시장은 조금도 동정함이 없이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 어서 빨리 나가라"고 도리어 재촉했다.
이에 부친은 하는 수없이 처자를 거느리고 정든 곳을 떠나 사방을 헤매다가 솔리아노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 사람들은 불쌍한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로사는 설교를 시작했는데, 그 반향은 역시 대단했다.
1250년 12월 5일, 로사는 사람들에게 곧 행복할 것을 예언했다.
그러자 그달 13일에 프리데리코 황제가 사망하고, 국내에는 평화가 깃들이게 되었다.
로사의 가족들은 그리운 비테르보 시에 귀환하는 도중 어떤 마을을 통과했는데
그곳은 배교한 어떤 여자의 악한 표양으로 인해 배교자가 많았다.
로사는 그저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여자의 비행을 질책했으나
상대방도 상대인지라 여러 가지 항변으로써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로사는 "말로써 시비가 결정되지 않으니 기적으로 결정합시다"하고 소경 하나를 데려다 놓고 고치라 하였다.
그런 여자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그 여자는 실패했고 로사는 훌륭히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둘이 다 같이 이글이글 타는 불속을 건너가자고 청하였다.
상대는 두려워 승낙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로사는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그 가운데에 우뚝 섰다.
그녀는 의복 하나 그을리지 않았고 몸에도 조그마한 화상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그 여자도 얼굴빛이 변하며 놀랐고
마침내 회개하고 그녀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왔다.
성녀의 서거 750주년 기념. 이탈리아. 2001.5.6.
로사의 가족이 비테르보에 들어섰을때 시민의 환영은 대단했다.
15세가 된 로사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자기 작은 방에서 전과 같이 홀로 기도와 극기의 생활을 계속했다.
2년 후 그녀는 17세의 꽃 같은 몸으로 그의 깨끗한 영혼을 하느님 손에 맡겼다.
그녀의 유해는 처음 비테르보 교회에 매장했다가 뒤에 다른 교회로 이장했다.
그때는 이미 5년이 경과한 해였지만 아직 얼굴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백년이 지났을 무렵 그 교회는 대 화재로 전소되어
성녀 로사의 영구(靈柩)와 의복은 다 소실되었으나 유해만은 무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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