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ndress of the Sisters of Our Lady of Charity of the Good Shepherd
축일:4월24일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 Saint Mary Euphrasia Pelletier Santa Maria di S. Eufrasia (Rosa Virginia Pelletier) Fondatrice St. M.Euphrasia Pallotta Born:31 July 1796 as Rose Virginie Pelletier at Noirmoutier, France Died:24 April 1868 of natural causes Beatified:30 April 1933 Canonized:2 May 1940 by Venerable Pope Pius XII Patronage:travellers
로사 바르지니아 펠레씨에르(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씨에르)는 브리타니 연안의 노와르무씨에르 태생으로, 뚜르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성 요한 에우데스(축일:8월19일)가 세운 수도회의 소속이었다. 이때문에 로사는 "피난처이신 사랑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11년 뒤에는 원장이 되었고, 앙제 지방에 새 수도원 건립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으나, "착한 목자와" 관련되는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회(Sisters of the Good Shepherd)는 1835년에 성좌의 승인과 더불어 급속하게 발전하였던 것이다. 창설자가 서거했을 때, 착한 목자 수녀들의 수효는 2760명이었다. 그녀는 1940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 (1796 - 1868)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온 마음을 다하여 돌보십시오. 우리의 사명에는 거룩한 그무엇이 있습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프랑스 혁명기에 서부해안 느와무티에 섬에서 의사였던 아버지와 신심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헌 신적인 봉사와 사랑을 보면서 자란 성녀는 가난한 이들,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며, 어린 시절 오빠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과 소녀시절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마음이 부서지는 체험은 성녀의 마음 안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더욱 깊어지게 하였다.
교회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성녀는 성당에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지하실을 청소하다 성 필베르의 상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14세때 성녀는 정들었던 느와무띠에를 떠나 뚜르의 기숙학교로 들어갔다. 그녀가 사랑했던 고향과 정든이들을 떠나와 성녀는 고통스러웠고 고독하였지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성녀는 18세때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상처입은 여성들을 위하여 일하는 애덕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수련기때는 성서와 애덕성모 수녀회의 창립자인 성 요한 에우데스의 저술들에 심취하였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 똑같은 사랑과 똑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메시지는 성녀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성녀의 수도생활을 통하여 그리고 고통받은 여인들에게 헌신하면서 성녀의 전 생애동안 퍼져나갔다.
29세때 성녀는 수녀회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뚜르의 수녀원 안에 ’작은 수녀원’인 성 막달레나 수녀회 (주:착한목자 관상수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세웠다. 이 수녀회는 관상 수녀회로 부르심받은 이들과 또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수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수녀원이었다. 그리고서 1829년 앙제에서 수녀원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수도회의 체제는 한 수도회 안에서도 분원간에 행정적인 협력이 없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성 요한 에우데스에 의해 시작된 구원사업으로부터 전세계가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성녀는 수녀들을 전세계에 보낼 수 있도록 중앙본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어려움 끝에 1835년에 앙제 수녀원을 모원으로 하는 국제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 체제의 착한 목자 애덕성모 수녀회가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의 인준으로 설립되었다.
성녀는 착한목자 수녀들에게 십자가의 사랑과 영혼구원을 위한 열성을 유산으로 남기고 1868년 4월 24일 선종하였다. (자료사진,기사제공:착한목자수녀회 2002.7.21)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 소개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는 1835년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에 의해 프랑스 앙제에서 국제 수녀회로서 창립되었다.
수녀회는 그 뿌리를 성 요한 에우데스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착취구조에 허덕이는 여성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1641년 창설한 애덕 성모 수녀회에 둔다. 창립자인 성 요한 에우데스와 성녀 유프라시아의 영적 유산의 계승자인 수녀들은 위임받은 교회의 화해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인간적 나약을 이해하고 감싸주시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죄와 그 결과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애덕과 복음화의 사도직에 헌신한다. 수녀회에는 같은 은사를 사는 두 가지 생활양식이 존재하는데 착한 목자 활동 수녀회와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가 있다. 활동 수녀회는 절망 속에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도적 활동을 통해 돕고, 관상 수녀회는 고독과 기도와 고행의 생활로써 그 여성들의 회개와 구원을 돕는다.
착한목자 수녀회의 영성 착한목자 수녀회 영성의 중심은 육화하신 예수님의 인성, 특히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음에 있다.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착한목자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양떼가 마구 흩어지는 날,목자가 제 양떼를 돌보듯이, 나는 내 양떼를 돌보리라. 먹구름이 덮어 어두울지라도 사방 흩어진 곳에서 찾아오리라. ... 내가 몸소 내 양떼를 기를 것이요 내가 몸소 내 양떼를 쉬게 하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내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 오리라.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힘 나도록 잘 먹여주고 기름지고 튼튼한 것은 지켜 주겠다." (에제키엘 34)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적 나약함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품어 안으신다. 길 잃은 사람을 찾아 데려오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유하시며, 약한 이들에게 힘을 주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이 자비로운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연민과 자비로 충만한 착한 목자의 모습과 정신이 바로 착한 목자 수녀들이 살아야 할 원형이고 본받아 할 참된 모범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 수녀들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체험함으로써 어둠 속에 헤매는 사람들 가운데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현존이 되고 있다.
성 마리 유프라시아는 어떤 상처나 죄악도 인간의 영혼의 본질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으며, 그녀의 보호 아래 있는 여성들이 회심하고 하느님이 선물하신 그들 고유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착한목자로서 그들을 이끌었다. 영혼 구원을 위한 삶을 위하여 착한목자 수녀들은 정결, 청빈, 순명 서원외에 제 4 서원인 열성을 서원한다. 열성의 주요한 특징은 각 개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상을 소중히 여기고 각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열성 서원은 영혼 구원을 위한 서원으로, 착한목자 수녀들은 구해야 할 영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예언자적인 용기를 가지고 자비와 화해를 전달하면서 살도록 투신하게 한다. 착한목자 수녀들의 성소의 중심이 바로 이 열성이며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이 열성에 있다. 이 열성은 연민, 자비, 화해, 일치, 정의의 얼굴로 이 사회 안에 드러난다.
관상 수녀들은 고독과 기도 안에서 자신의 삶을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착한목자 활동 수녀회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착한목자 관상 수녀들의 성소의 중심은 기도이다. 수녀들은 기도 안에서 교회가 수녀들에게 맡긴 화해의 사명에 대한 열성과 착한목자의 자비로운 성심으로 온 세상을 포용한다. 봉쇄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주의 집중과 기도에의 완전한 봉헌의 표지이며 표현이다. 수녀들은 공동체를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착한목자의 성심에 데려올 수 있도록 거룩한 공간을 창조한다.
착한목자 관상 수녀회 소개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는 착한 목자 수녀회 창립자인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에 의해서 1825년 11월 30일에 막달레나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투르에서 첫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당시 활동 수녀회의 보호 아래서 도움을 받았던 아가씨들과 윤리적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나 개심한 여성들 중에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기를 원했던 이들이 있었다. 또한 여성들 중에서도 관상 수도 생활 안에서 다른 이들의 회개를 위하여 보속과 희생으로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염원을 대하게 된 유프라시아 수녀는 하느님께서 이들을 관상 수도생활에로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들을 위해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목자 관상 수도회이며 1834년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고독과 기도와 고행은 그들의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현재 전세계에 약 850여 명의 관상수녀들이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8년 첫 한국인 수녀가 탄생한 이래 현재 4명의 유기서원자와 3명의 수련자가 생활하고 있다.
우리의 발자취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는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프랑스 뚜르의 애덕 성모 피난처 수녀회의 원장으로 있을 때 1825년 11월 30일 프랑스 뚜르에서 세웠던 ’막달레나 수녀회’를 기원으로 한다. 그 후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가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를 창립하면서 거기에서 막달레나 수녀회도 함께 세웠고 1834년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85년부터는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성녀가 막달레나 성녀의 이름을 수녀회의 명칭으로 삼고, 그녀를 수녀회의 수호성녀로 삼았던 것은 그녀에게서 주님께 대한 오롯한 사랑과 제자의 모범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십자가 아래 있었고 또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 충실한 증거자였기 때문이다.
영성 기도는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의 성소의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안에서 사명에 대한 열성으로 온 세상을 포용한다. 정의와 자비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기도와 보속 안에서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착한 목자 활동 수녀들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관상하는 목자들은 관상과 기도의 정원에서 고독과 침묵의 공기를 호흡하고, 복음적 금욕으로 옷입고, 노동으로 생계를 구하면서 단순하게 살아간다. 공동체는 우리 삶의 본질적인 것이다. 공동체는 사랑의 신비와 하느님 안의 친교로의 증거를 주도록 불리움 받았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 우리는 믿음 안에 세워져서 희망에 살며 완전한 애덕을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이다. 봉쇄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온전한 주의 집중과 기도에의 완전한 봉헌의 표지이며 표현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착한 목자의 성심에 데려올 수 있도록 거룩한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 관상 수녀회의 관상 생활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수위성, 기도와 관상, 침묵과 고독, 마음의 봉쇄 화해의 사명, 착한 목자의 자비, 정의 공동체 생활, 복음적 금욕,
성요한 에우데스 (1601~1680) 축일:8월19일 예수성심과 성모성심 신심의 아버지요 박사이며 사도인 성 요한 에우데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신실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당시 얀세니즘에 대항하여 종교쇄신운동을 주도하던 ’프랑스 학파’에서 성장하였다. 사목자로서의 그의 삶은 예수성심 안에서 관상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 성심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마리아 성심에 대한 의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는 사제가 된 후 45년 동안 전교여행을 계속하면서 그의 강론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전하였다. 전교 여행 중에 만난 사제들의 실상을 인식한 그는 사제들의 양성과 교육, 성화를 위해 신학교를 세웠고, 예수 마리아 수도회-오늘날의 유디스트-를 창설했다. 또 죄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애덕 성모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애덕 성모 수녀들은 "회개하는 소녀들과 여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제 4서원인 열성서원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영혼의 구원", 특별히 내가 파견되는 곳의 사람들을 위하여 살고 일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제 4서원으로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의 내적인 핵심이 되었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열렬한 사도였던 그는 예수 성심 축일과 성모 성심 축일제정에, 그리고 의식서 저술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냉냉하고 형식적이던 당시 신앙생활에 커다란 쇄신을 불러 일으켰다. 1925년 시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관한 탁월한 저술들이 남아있다. (자료사진,기사제공:착한목자수녀회.2002.7.21)
하느님의 사랑
"나는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끊임없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본질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즉 온전한 사랑과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렵니다."
*비오 10세는 성요한 에우데스를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 공경의 아버지로 선포하였다. *성 요한 에우데스 사제 축일:8월19일 *6월 예수성심성월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2003년6월27일(이동축일:2004.6.18)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예수성심대축일 다음 토요일) 2003년6월28일(이동축일:2004.6.19)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콕 축일:10월16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7월22일
|
축일:4월24일 성 피델리스 식마린겐 사제 순교자, OFM Cap.
피델리스(1577 - 1622)는 독일 식마린겐의 저명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프리부륵 대학에서 철학과 법률학을 공부한 후 6 년동안 젊은 귀족 자제들이 유럽을 여행할 때 그들의 가정교사를 하였다. 후에 성공적인 법률가가 되어 가난하고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수호자"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1612 년 형에 뒤이어 까푸친회에 입회하였다. 사제요, 수도회 장상으로서 피델리스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자신의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역질이 돌던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또한 보속과 기도의 고된 생활을 마다하지 않았다.
포교 성성으로부터 스위스 선교 책임의 명을 받고 정통 교리를 전파하다가 칼빈파와 쯔빙글리파(Calvinists and Zwinglians)의 습격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포교 성성의 첫 순교자이다.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578년 독일의 식마린겐 읍에서 태어났다. 카푸친회에 들어가 보속과 밤샘과 기도의 고된 생활을 영위했다. 열심한 설교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였고 포교성성으로부터 스위스 그라우뷘덴 지방에 정통 교리를 전파하라는 명을 받았다. 거기에서 이단자들에게 추적 당해 1622년 스위스에서 순교했다.
성 피델리스 사제 순교자에 대한 찬사에서
피델리스는 그 이름 자체에도 삶에도 충실했다.
교황 베네딕도 14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인 성 피델리스를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피델리스가 지닌 사랑의 풍성함은 이웃의 육신상의 필요를 채워 주고 도와주는 데 까지 뻗어 나아가,아버지다운 자애의 포옹으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맞아들이고 여러 군데에서 애긍을 모아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였다.
세력 있는 사람들과 황태자들로부터 도움의 길을 마련하여 과부와 고아들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다. 또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자기 힘 닿는 데까지 육신적으로 영신적으로 모든 수단을 다해 도와주고, 병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하느님과 화해시키며, 그들이 맞이할 마지막 투쟁을 잘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는 그라우뷘덴에 주둔했던 오스트리아 군대가 전염병에 걸려 고통과 죽음의 비참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 더 위대한 자선 행위의 열매를 거둔 일은 또 없다. " 그 이름 자체에도 삶에도 충실했던 성 피델리스(충실한 사람이라는 뜻)는 이 위대한 자비로써 뿐만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선포했던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로서도 뛰어났습니다. 자신이 피를 흘려 자기 신앙을 고백하기 며칠 전에 한 마지막 강론에서 흡사 유언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오 가톨릭 신앙이여, 너는 얼마나 항구하고 얼마나 튼튼하며 얼마나 훌륭하게 뿌리박고 있으며 또 얼마나 견고한 반석 위에 잘 세워져 있는가! 하늘과 땅은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너는 결코 사라지지 않은리라. 시초부터 온 세상은 너를 거슬러 말해 왔지만 너는 모든 것을 누르고 힘차게 승리를 거두어 왔도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세력 강한 임금들을 그리스도의 법에 복종시키고 민족들이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부활에 관한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거룩한 사도들과 순교자들로 하여금 치열한 투쟁과 혹심한 고통을 겪도록 하였겠습니까?
산 신앙이 아니라면 무엇이 은수자들로 하여금 쾌락을 멸시하고 명예를 가벼이 여기고 재산을 발로 밟아 버리고 고독 속에 독신 생활을 하도록 했겠습니까? 무엇이 오늘날의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안이하고 유쾌한 것을 버리고 고통을 참으며 수고를 감수하게 해줍니까?
`사랑으로 표현되는’ 산 신앙입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사람들이 미래의 보화를 희망하면서 현재의 보화를 포기하도록 하고 또 현재의 것을 미래의 것으로 바꿈질하게 합니다." (가톨릭홈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
만일 한 가난한 사람이 피델리스에게 약간의 의복을 요구했다면 그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의 반이라도 잘라서 그 사람에게 주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완전한 관대함이 이 성인의 생활 특징이다. 1578년에 태어난 마르코 레이-피델리스는 그의 수도명임-는 변호사가 되어 언제나 가난하고 억업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변호해 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란 별명을 가진 피델리스는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부패와 불의를 보고는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사제가 될 결심으로 법률가의 길을 청산하고는 카푸친 수도회 소속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자기의 형 제오르지오에게 갔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궁핍한 신학생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프란치스코의 추종자로서 피델리스는 연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계속했다. 한번은 그가 수도원의 관리인으로 있던 도시에서 심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 피델리스는 수많은 병든 군인을 돌보아 주고 치료해주었다. 그는 스위스의 칼뱅파와 츠빙글리파에 대항해서 설교하러 가는 카푸친 수도회 회원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지역은 상당히 격렬한 폭동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피델리스의 끊임없는 기도는 자기가 하느님께 충실을 다하고 어떠한 미온적 태도나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내가 만일 가시관을 쓰신 대장을 섬기는 데 있어서 반쪽 마음을 가진 군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스스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재앙이다."
그의 기도는 무관심에 반대한 것이었고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표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능을 불행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세계의 정의를 위해 일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가 보인 표양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
"세상을 변형시키는 데 있어서 정의 편에서 행동하고 참여하며 투신하는 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건설적인 차원으로 우리 앞에 분명히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인류 구원을 위한 교회의 사명과 여러 가지 억압된 상황에서 해방시키는 일은 정의로운 행동이며 세상을 변형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1971년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세상에서의 정의’)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5세기에는 영국에 존 위들레이나 보헤미아에 요한 후스 등이 나와서 교회에 위반되는 이단설을 주장해 수위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어 전 유럽의 종교계를 혼란 속에 밀어 넣은 화근의 원인을 제공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묘한 섭리로 여러 명의 성인, 성녀를 보내시어 불신과 악으로 흐르려고 하는 세상을 각성시키며, 미로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으 가르쳐 주시려고 매우 노력하셨다. 여기의 성 피델리스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577년 독일의 남부에 있는 식마린겐에서 태어났다. 영세 때 받은 본명은 마르코였다. 아버지는 요한 로이, 어머니는 제노베파로서 두 사람 다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으나, 요한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르코는 어려서 베네딕토회의 수도원에 맡겨져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일찍이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여 탁월한 지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겨우 16세로서 프리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획득하는 등 일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의 앞길에 여러 출세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에서 출세하기를 원하며 특히 가난한 이와 학대받는 이들의 변호사가 되리라 결심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기 위해 우선 대학원 학생 수명과 더불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유명한 대학을 순방하고 6년간이나 견문을 넓히는데 노력했다.
귀국 후 그는 아인지스하임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항상 정의를 존중하고 세상 재물로 인해 좌우되어 그르치는 일이 없었으므로 곧 청렴결백한 인사라는 평판이 근방에 퍼졌다. 그 뿐 아니라 그는 특별하게도 빈궁한 자들을 동정하며 혹시라도 그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용서 없이 이를 꾸짖었으므로, 뒤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를 매우 무서워하며 또한 그를 모함하며 해치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마르코는 다시금 세속의 악독함에 증오를 느끼게 되어 변호사를 페업하고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카푸친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본래 청렴결백하고 학문이 깊었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는 특별허가로 유난히도 빨리 착복식을 하고 신품성사를 받았다. 피델리스라는 수도명을 얻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그는 수련 기간 중 특히 성 프란치스코의 표양을 본받아 미사 성제를 행할 때나 경본을 볼 때에는 세라핌과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했고, 세속에 있을 때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입회 후에는 그것들을 모두 잊은 것처럼 밥그릇 닦기부터 복도 청소, 장작 쪼개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열심히 이를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서원을 발하기 직전에 공정증서(公正證書)를 작성해 자신의 재산을 2등분하여 일부는 빈민 구제를 위해, 다른 일부는 가난한 사제(司祭) 지원자 원조를 위한 기부금으로 기부했다.
신학의 충분한 연구를 마친 피델리스는 주로 독일 남부와 스위스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개종을 위해 활약하며 밤낮으로 열렬한 기도와 극심한 고신 극기를 해가면서 잠시도 쉴새 없이 동분서주하며 열변을 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므로 이단자들은 그르 대단히 미워하며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그를 방해하려 했으나, 그는 더욱 굳세게 악에 대항해 싸운 보람이 있어 얼마 안 되어 그의 활동의 효과는 현저히 나타나 외교도로서 참 종교로 개종하는 이, 죄인으로서 충심으로 통회하는 이가 연거푸 나타나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피델리스는 문서 선교의 방면에도 주력하며 교회와 이교의 차이점을 명백히 한 많은 서적과 팜플렛을 발간했는데, 이것이 또한 얼마나 외교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1622년 피델리스는 관구장의 명을 받들어 스위스의 그라프분덴 주의 개종 촉진의 포교를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부근은 칼빈파 이단의 중심지로서 가장 관신자(狂信者)들이 많아 이전에도 가톨릭 사제 수명이 그들의 독수에 걸려 참살된 장소였으므로 피델리스도 점점 영광의 순교이 날이 다가온 줄 생각하고 기꺼이 그리로 향해 갔다.
그의 활동은 과연 기대한 바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럴수록 이단자들의 미움도 더 사게 되어, 마침내 그들은 피델리스를 살해하려 결심하고 우선 간교하게도 겸손되이 찾아와서 그리스도 부활 축일에 세위스라는 마을의 교회에서 설교해 줄 것을 의뢰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델리스는 쾌히 승낙하고 나서 당일 1622년 4월 24일 약속한 대로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자 어디에선가 그를 향한 총탄이 날아왔다. 이단자들이 그의 설교 도중 총으로써 그를 사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명중되지 않아 무사히 난을 피했으나, 설교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다시 대기하고 있던 이단자들은 달려들어 망치와 창칼등의 흉기로써 그를 무참하게 죽였다.
그래도 그의 태연하고도 용감한 태도는 이단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를 본 한 목사는, "아, 이 같은 죽음의 마당에서도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힘을 주는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다!" 하고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피델리스'라는 이름에 대한 말장난 그러한 그의 앞길에 여러 출세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는 법조계에서 출세하기를 원하며 특히 가난한 이와 학대받는 이들의 변호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쌓기 위해 우선 가정교사로서 스위스의 한 귀족집 아들들이었던 대학원 학생 세 명과 더불어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의 유명한 대학을 순방하고 6년간이나 견문을 넓히는데 노력했다. 그는 특히 수련기 동안에 성 프란치스코의 겸손한 표양을 본받아 미사성제를 행할 때나 성경을 볼 때에는 뜨거운 사랑으로 했고, 세속에 있을 때 지위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입회 후에는 그것들을 모두 잊은 것처럼 밥그릇 닦기부터 복도 청소, 장작 쪼개기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열심히 이를 완수했다. 그리고 그는 서원을 발하기 직전에 공정증서(公正證書)를 작성해 자신의 재산을 2등분하여 일부는 빈민 구제를 위해, 다른 일부는 가난한 사제(司祭) 지원자 원조를 위한 기부금으로 기부했다. 기도와 고행과 설교로써 뿐만 아니라 피델리스는 저서로 선교의 방면에도 주력하며 교회와 이교의 차이점을 명백히 한 많은 서적과 팸플릿을 발간했다. 1622년, 새로 창설된 포교성성의 보호 하에, 피델리스 형제는 8명의 카푸친 선교사들의 장상으로, 포교하러 스위스의 그라프분덴 주로 가게 되었다. 그의 활동은 과연 기대한 바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그럴수록 개신교 전교사들의 미움도 더 사게 되어, 마침내 그들은 피델리스를 살해하려 결심했다. 우선 간교하게도 겸손되이 찾아와서 그리스도 부활 축일에 세뷔스(Sewis)라는 마을의 교회에서 설교해 줄 것을 의뢰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피델리스는 쾌히 승낙하고 나서 당일 1622년 4월 24일 약속한 대로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자 도 모르는 피델리스는 쾌히 승낙하고 나서 당일 1622년 4월 24일 약속한 대로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자 어디에선가 그를 향한 총탄이 날아왔다. 이단자들이 그의 설교 도중 총으로써 그를 사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는 명중되지 않아 무사히 난을 피했으나, 설교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다시 대기하고 있던 이단자들은 달려들어 창칼의 흉기로써 그를 무참하게 죽였다. 피델리스는 죽어가면서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려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오! 주님, 저의 원수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열정에 눈이 멀어 있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이다! 주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님 저를 도와주소서!" 그의 태연하고도 용감한 태도는 이단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이를 본 한 목사는, "아, 이 같은 죽음의 마당에서도 태연자약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힘을 주는 종교야말로 참된 종교다!" 하고 절규하며 그 자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1746년, 피델리스는 교황 베네딕도 14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포교성성의 수호성인이면 카푸친 작은 형제회의 첫 순교자이다.
칼빈주의 영어 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칼빈(1509∼1564)이 인간의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일으킨 종교사상. 칼빈주의에 의하면,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이미 의지의 내적(內的) 자유가 없고 인간은 하느님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개인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미리 천국이 아니면 지옥으로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따라서 천국으로 예정된 선택받은 사람이 지옥으로 가는 법은 없다. 칼빈주의의 요점은 그의 저서≪그리스도교 요강≫에 잘 기술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느님은 절대무한(絶代無限)한 존재로 우주에서 하느님만이 참된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피조물은 하느님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주의는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의지의 자유를 철저히 부정하는 절대적 `예정설’이다. 그의 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외적(外的)으로 결부시키려는 점에 있고, 그것이 이 신앙의 유일한 구원의 전제가 된다. 따라서 전례나 성사도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선택받은 자들만의 단체이며 내부에는 사제직이나 교계(敎階)제도도 없고, 교단은 공화적(共和的)으로 조직되어 국가로부터 독립된다. 국가는 관념적으로 신정제(神政制)를 취해야 된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너무 엄격했던 처음의 절대적 예정설이 완화되면서 급속히 교세가 확장되었으며 변증법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설은 막스 베버(Max Weber) 등에 의해 주장되었다. 노동의 쾌락과 노동의 성과를 하느님의 선택받은 증표로 보는 칼빈주의의 구원사상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정신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칼빈주의의 노동윤리, 즉 `세속생활의 금욕주의’라는 윤리가 자본주의의 발생기에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퓨리턴에게 인민주권(人民主權)의 사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촉진시켰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 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 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 OFM,OFMConv,OFMCap-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11.000여명의 카푸친 형제들이 그 전통에 따라 성 프란치코의 복음적 이상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986년에 아일랜드 관구에서 온 4명의 형제들에의해 그 현존이 시작되었고 현재는 한국 형제들을 포함하여 8명의 종신서원형제,4명의 유기서원 형제들이’ 천사들의 성마리아 효창동 형제회’와 수련소인’성 펠릭스 가평 형제회’ 그리고 인천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형제들이 강화의 ’성요셉 형제회에서 형제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 카페에서) |
'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콘) 복녀 알도 (알도브란데스까) / (이콘) 성녀 프란카 비잘타아빠티사 기념일 +++ (0) | 2020.04.26 |
---|---|
+++ 성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 +++ (0) | 2020.04.25 |
+++ (이콘) 성 제오르지오 / 아시시의 복자 에지다오 기념일 +++ (0) | 2020.04.23 |
+++ (성화) 성 레오니데스 순교자 / 파브리아노의 복자 프란치스코 / 복녀 마리아 가브리엘라 기념일 +++ (0) | 2020.04.22 |
+++ 파르잠의 성 콘라도 수도자 / 성 안셀모 주교 학자 기념일 +++ (0) | 2020.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