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 5월18일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OFM Cap.
San Felice da Cantalice Cappuccino
Cantalice, Rieti, 1515 – Roma, 18 maggio 1587
Etimologia: Felice = contento, dal latino
Saint Felix of Cantalice
Also known as : Ass of the Capuchins (his own nickname for himself), Brother Deo Gratias ("Deo Gratias" was his habitual greeting)
Born : 18 May 1515 at Cantalice, Abruzzi, Italy
Died : 18 May 1587 at Rome, Italy of natural causes
so many came to his funeral that some were injured in the press to get into the church, and an extra door had to be knocked through one wall so they could exit
buried under an altar in the church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in Rome
miracles reported at his tomb
Beatified : 1 October 1625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 22 May 1712 by Pope Clement XI
펠릭스(1513 - 1587)는 이탈리아 칸탈리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비천한 목동으로 생활하였다. 28 세가 되던 해 황소 떼가 도망치는 사건을 겪고 난 후 뜻한 바가 있어서 카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그는 깊은 신앙신과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데에 뛰어났다. 그는 가끔 복되신 성모님 품 안에서 어린 구세주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입술에서는 항상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 라는 말이 떨어질 줄을 모르므로 "데오 그라씨아스 형제" 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42 년 동안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서 애긍 생활을 하였다. 그 덕분에 성 필립보 네리와 성 가를로 보로메오와 막역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그에게 영적인 문제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은 바로 기쁨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1587 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712 년 시성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3번.1785번.
*성 가를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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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황진혁 베르나르디노형제 ofmcap 번역*
펠릭스는 1515년에 이태리의 칸탈리체(Cantalice)에서 태어났다.
어버이인 산티와 산타 포리(Santi, Santa Porri)는 수지를 맞추도록 노력하는 농사꾼 부부였다.
펠릭스는 블라시오와 카롤로라는 형 두 분과 포텐자와 베드로 마리노라는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
베드로 마리노는 깐탈리체와 리에티(Rieti) 사이의 있었던 하나의 전투 동안에 숨졌다.
펠릭스가 열 살 때쯤 치타두칼레(Cittaducale)에 사는 피키(Picchi)라는 농가에게 일꾼으로 고용되었다.
일꾼들은 원래 야외에서 자라난 거친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일은 힘들었지만 펠릭스는 일을 끝낸 다음 오락으로서 씨름을하곤 하였다.
펠릭스가 어렸을 때에 사촌 한 명이 사막의 고행자들의 전기를 읽어 주곤했는데
그들의 고행들에 대한 묘사는 페릭스를 열중시켜 그들의 엄격성을 본받고 싶어하게 하였다.
펠릭스는 카푸친회에 입회하러 레오네싸(Leonessa)에 가라는 천사를 꿈에 보았다.
그리하여 펠릭스는 꿈을 이루려고 레오네싸에 갔는데
그 곳의 카푸친 수호자는 그분을 관구대리 형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펠릭스가 그분을 찾을 줄 몰라서 농장에 되돌아갔다.
어쨌든 천사의 신탁을 받는 것에 길들지 않은 펠릭스는 붙잡기가 어려운 것을 구함에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천사는 다시 나타나 리에티의 카푸친 형제회에 가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헛된 시도였다. 그럼으로 펠릭스가 농장에 다시 한 번 되돌아갔다.
하루는 아우구스띠노회 수사가 펠릭스에게 그 수도회에 입회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카푸친이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렇게 카푸친회에 입회하려는 소원을 품고 있던 펠릭스는
이번에 치타두칼레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에 가서 자신을 소개하였다.
수호자는 펠릭스를 성당에 이끌어 큰 고상 앞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은 타박상을 입고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모양이 손상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페릭스는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였다.
펠릭스를 잊어버린 수호자가 저녁때에 기도하러 성당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거기에 지원자 펠릭스가 있었다.
그래서 수호자는 "아들아, 뭐 하고 있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너는 착한 사람인데; 우리는 너를 우리 가운데 있게 할거야.
예수께서 이제는 혼자서 고생하실 필요가 없을 거야.
너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도와 드릴 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열흘 후에 펠릭스가 입회하였다. 그 때가 1543년의 가을 후반쯤이었다.
만나기가 어려웠던 관구대리에게 소개하려고 로마로 금방 출발하였다.
로마의 카푸친 형제회에서 아스티(Asti)의 베르나르디노 형제,
즉 그곳의 수호자 및 수도회의 총대리인(Procurator Generalis)과 만났는데
그는 펠릭스를 로마관구의 대리였던 볼테라(Volterra}의 라파엘 형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라파엘 형제는 펠릭스를 정식적으로 입회시켰다.
1544년초 비가 오는 어느 날 아침에 펠릭스는 관구대리가 수련소로 지명한 퓨찌(Fiuggi)의 형제회로 갔다
그렇게 하여 퓨찌의 보니파시오 형제 밑에서 수련을 받았다.
수련생활의 고됨으로 몸이 약해지게되었는데 공동체의 형제들이 세속 생활에 돌아가라고 권고할 지경이었다.
결국은 몬테 산 죠반니 캄파노(Monte San Giovanni Campano)에 보내기로 하였다.
마침 거기서 펠릭스는 회복되었고 마스트란또니오(Mastrantonio)의 야고보라는 서기 앞에서 펠릭스는
미래 유산권을 포기하면서 모든 재산을 친형제에게 양도하였다.
다만 그 형제들은 3년 동안 매년마다 곡식 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서
페릭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청해야 하는 조건을 내렸다.
그리고 1545 5월 18일에 서원을 하였다.
시골 출신인 펠릭스는 자연을 사랑해서 격리된 숲 속에 있는
여러 형제회 중에 한 군데에서 남은 생활을 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카푸친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첫 몇 년만 퓨찌, 몬테 산 죠반니, 티볼리(Tivoli)와 비테르보 (Viterbo)같은
시골의 지역에 살았다.
1547년에 펠릭스는 로마로 옮겼다.
어렸을 때에 펠릭스는 사막의 고행자들을 모방하여 다시는 빵에 손을 데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상하게도 로마에서 그의 임무는 빵과 포도주를 동냥하는 일이었다.
펠릭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봉사 때문에 매일매일 군중과 접촉해야만 하였다.
그 때의 카푸친 풍습에 따라 동냥하는 펠릭스 형제는 항상 눈을 내려 깔고 맨발로 돌아다녔다.
각계각총의 은인에게 겸손하며 자신이 있는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라는 응답을 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그 인사를 자주 반복해서 사람들이 "데오 그라티아스 형제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로마의 신학생들도 거리에서 펠릭스 형제를 보았으면 장난으로 "Deo gratias"하고 외치곤 하였는데
펠릭스의 응답은 언제나
"Deo gratias! 내 소년들아, Deo gratias!"라는 인사였다.
펠릭스는 형제들의 음식을 마련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도 먹을 것을 제공하곤 하였다.
그리고 수도회의 봉사자들에게서 특히 자녀가 많은 과부같은 살림이 어려운 이들을 도와 줄 허락을 받았다.
로마시에서 전염병이 돈적이 있었는데 음식이 형제들에게도 모자랄까 펠릭스에게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도 음식을 동량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펠릭스 형제는 "형제들아 가난한이들이 먹을 것을 받으면 형제들은 굶주릴 거라고 생각하니?
내 말을 믿어 봐.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받으면 형제들도 굶줄이지 않을 거야"
하고 반응하자 장상들이 허락을 주어서
그 일 년내내 형제들을 위해서도 충분히 동량하였으며 많은 어려운 시민들도 먹여 주었다.
펠릭스의 동냥 자루는 그 마음처럼 밑바닥이 없는것이었다는 말이 있다.
정말 도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빵, 포도주와 기름을 너그러이 나누어 주곤하였다.
자기 자신이 나누어 보조해 줄 것이 없었을 때에는,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하여 부자들에게 부탁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은혜를 베풀든 은혜를 받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섭리를 믿으며 감사드리라고 권고하곤 하였다.
형제회에나 개인의 집에나, 불치 환자들을 위한 성 야고보의 병원과
성령의 병원과 성 요한 라테라노의 병원에 있는 병자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간단한 말로써 병자들에게 은총의 기회로써 병을 받아드리며 신뢰를 가지라고 하곤 하였다.
펠릭스가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자주 병자에게 고상으로 축복해서 병이 낫게 되곤 하였다.
또 펠릭스가 동냥한 것들은 받은 이들에게 나중에 치료의 도구가 된 적이 있었다..
하루는 펠릭스가 오르비에토의 주교, 베드로 크레셴지(Crescenzi) 추기경의 어머니인 콘스탄자의 눈을
보시로 받았던 포도주로 씻어서 병을 고쳤다.
이와 같이 또 성 요한의 병원에서 펠릭스가 포도주를 좀 기증한 후에 환자는 나았다.
그리하여 때때로 친구들이 장난으로 펠릭스에게
"펠릭스 형제야, 내가 아프면 나에게 네 포도주 좀 갖다 줘!" 하고 말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모든 사람과 고향인 사빈 지역의 사투리로, 그리고 항상 반말로 말하였다.
그렇지만 보시를 받든 주든 크나큰 존경으로 각자를 대하였다.
은인들이 잘 알았듯이 펠릭스는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구하기만 했으면 펠릭스가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마련하였다.
자기의 양육 때문에 펠릭스는 잘난 체할 줄 몰랐다.
사람들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는 회개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 허물없이 직접 맞설 수 있었다.
펠릭스의 전기에 있는 이야기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라는 책에서 묘사된 사건들과 비슷하다.
하루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음식을 동냥하다가 펠릭스는
법학 논문을 읽기에 깊이 빠져든 변호사의 문을 두드리었다.
그런데 간섭에 성난 변호사는 형제가 하는 일보다는 자기의 일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물겨워진 펠릭스는 "하느님의 법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그 일로 인하여 법계를 그만 둔 변호사는 성직 생활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펠릭스는 베르나르디노 비샤(Biscia)라는 변호사가 공부하는 법서 위에
고상을 놓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가리키며
"베르나르디노야, 이 봐. 이 모든 책들은 네가 이분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하고 말하였다.
형제회 밖에서 펠릭스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형제회 안에서라도 그 형제의 말은 대부분 좋은 모범을 보여 주라는 몇 마디의 권고였다.
펠릭스는 똑바로 솔직히 말하곤 했는데 어떤 형제에게 "너를 고치고 싶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카푸친 설교자들에게는 "이름을 떨치려고 말하지 말고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설교해라"하고 자주 권고하였다.
때때로 에지디오 형제의 명언을 인용하였다
"Bo, bo, bo, assai dico e poco fo! [뽀, 뽀, 뽀, 아싸이 디코 에 포코 포!]".
그 명언은 ’쯧, 쯧, 쯧, 많이 말하지만 조금만 행해’라는뜻이다.
한 번은 펠릭스가 율리오 안또니오 산토리(Santori),카푸친회의 보호자 추기경에게
"추기경, 너는 수도회의 장상들에게 속하는 일들에 간섭하도록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도록 임명을 받았소"하고 말한 적 있었다.
미래에 씨스또 5 세가 될 사람에게
"너는 교황이 되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교황이 되어라.
아니면 단순한 형제로서 남는 게 나을 것 같아"하고 말하였다.
같은 사람인 씨스또 5 세는 펠릭스를 때때로 만나서 빵 좀 달라고 하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형제가 프란스꼬회 형제였던 그 교황에게 써서 낡은 혹빵을 좀 주면서
"성하, 죄송하지만 너는 아직도 형제이지?"하고 말하였다.
개인 신심과 묵상을 위하여 펠릭스는 기도문과 성서적이나 전례적인 문구를 외우곤 하였다.
문맹이었는데도 그는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며 정신을 영적인 숙고에 종사시키곤 하였다.
로마의 거리를 걸어다니든 자기의 방이나 형제회의 성당에 있든 펠릭스의 얼은 항상 관상에 빠져 있었다.
영감으로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잠든 후에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들을 맡겨 드리면서
수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보내곤 하였다.
또한 형식적인 교육으로 알지 못 한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때는
유명한 스페인의 사제인 알퐁소 루포(Lupo)에게서 자주 충고를 구하였다.
그리고 성 필립보 네리의 친한 친구이며 성 가롤로 보로메오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펠릭스는 진정한 거룩함이 깨닫게 하며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럼으로 지식이 있는 이들의 충고를 구하므로
"로마 거리들의 이 성인은" 차례로 자기에게서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을 그 말로 중고하며 권고할 수 있었다.
펠릭스는 2 세의 로마 청년에게 명물이었다.
젊은이들이 ’아빠’라는 뜻인 "파파(Papa)"라고 불러서
이 카푸친이 받는 존경이 얼마나 큰지 몰랐던 사람들을 놀랬다.
사람들이 그들의 걱정을 펠릭스에게 먼저 직접 알리곤 했는데 의사에게 가기 전에
형제에게 먼저 가서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끓고 주의 기도문과 성모송을 바쳐 남아 있는 모든 일을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펠릭스가 "하늘, 하늘" 또는
"자신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가게 해 봐"하고 말하므로 병자들에게 병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들과 아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어린이들을 주님께 축성하거나 젊은이들에게
"예수, 예수" 또는 "Deo gratias(천주께 감사)"라는 화살 기도를 가르칠 시간을 갖곤 하였다.
펠릭스는 자유롭게 가사를 붙여 성가를 작성해서 부르는 재능이 있었다.
그럼으로 사람들이 자주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하곤 하였다.
동정 마리아에 대한 그분의 신심은 특히 이 가사들과,
또 펠릭스를 잘 알던 알퐁소 루포의 증언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
그 가사들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 땅에서 작은 장미가 돋아났는데 그 장미는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작은 동정녀 마리아이시다".
그런데 펠릭스는 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감추었는데 성탄절 가까운 하루 밤에는
알퐁소 루포 신부가 기도하는 펠릭스를 몰래 감시하다가 마리아께서 나타나셨고
형제의 요청에 양보하여 아기 예수를 펠릭스의 손에 넘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며칠 죽기 전까지 펠릭스는 자기의 봉사를 계속하였다.
산토리 추기경은 펠릭스으로부터 동량의 힘든 임무를 제거하게 하도록 영향을 끼치려고 했는데
펠릭스 형제가 거절하였다.
1587년 4월 30일에 펠릭스는 병에 걸렸는데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다.
형제들에게 "작은 당나귀가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하고 말하였다.
1587년 5월 18일 아침에 침대 옆에 있던 프라토(Prato)의 우르바노 형제는
얼굴이 눈부시게 된 펠릭스가 손을 들고
"오, 오, 오"라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왠 일 이냐고 질문하자
펠릭스는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를 보는데!"하고 대답하였다.
수호자가 여행을 위한 노자 성체를 모시고 왔을 때 펠릭스는
"O sacrum convivium(오 사크룸 콘비비움)"이라는 성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거기 있는 모두에게 "Deo gratias"라는 응답을 하라고 부탁하였다.
성체를 모신 다음에 사제가 "그리스도인 영혼아, 떠나시오..."라는 임종의 기도를 바치는 중에
끝까지 순종한 펠릭스 형제는 세상을 떠났다.
페릭스의 시신은 로마의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있는 무염시테의 카푸친회 성당에 모셔 묻혔다.
씨스또 5 세 교황님이 금방 펠릭스를 시성하려고 했는데
만일 필요하면 옛날 풍습에 따라 전원 추거로써 하기로 작정했으나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에 시성 운동의 여세는 떨어졌다.
마침내 1625년 10월 1일에 우르바노 8 세 교황님은 펠릭스 형제를 시복했고
1712년 5월 22일에 글레멘스 11 세 교황님이 시성해 주었다.
깐탈리체의 성 펠릭스는 첫 성인품을 받은 카푸친 회원이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 다음 카페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마음 넓은 거지, 카푸친의 첫 성인,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북새통 속의 '유물 절도'
1587년 5월 18일, ‘칸탈리체의 펠릭스 형제’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자 로마의 시민들은 무리지어 카푸친 형제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형제들은 문을 걸어 잠갔지만, 사실상 포위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시민들은 밧줄과 사다리를 이용하여 높은 마당 벽을 오르고 있었다. 결국 형제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고,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시신을 성당에 안치하기로 했다. 아래 위 여하를 막론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조문하러 왔고, 그 조문객들은 수 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유물들을 훔치는 탓에 시신이게 입혔던 수도복을 여러 번 갈아입혀야 했고, 성인의 머리털과 턱수염은 다 잘려 나가고 없었다. 일부 신봉자들 중에는 성인의 손가락을 자르려했던 사람도 있었다.
정문 앞에 운집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수도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형제들마저도 마당 돌담을 기어 넘어가야 했다. 당시 그곳에서 수도회의 총의회(총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참석자들은 회의를 멈추고 다음으로 연기해야만 했다. 사실상 그때까지 펠릭스의 동료 형제들은 이토록 유명한 성인이 자신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지 몰랐었다. 하지만 식스토 5세 교황은 알고 있었다. 그는 펠릭스 형제가 묻히기도 전에 벌써 그의 시성운동을 명령했고, 그 과정이 지체되자 펠리스의 시성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킬 생각까지 품었다. 그러나 펠릭스 형제가 선종한 후 얼마 안 있어 식스토 교황의 선종하는 바람에 카푸친들은 수도회 최초의 성인을 125여년 더 기다려야 했다. ‘펠릭스 포리(Porri)’, 살아있는 동안 그는 스스로를 ‘형제들의 당나귀’라고 칭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를 ‘데오 그라치아스(Deo Gratias) 형제’라고 불렀고, 도시의 부랑아들은 그를 ‘아빠(Pappa)’라고 불렸다. 시성을 받은 그는 이제서야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라는 경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머슴으로서의 펠릭스의 어린 시절
펠릭스 포리는 1515년에 이탈리아의 풀랴(Puglia) 지역의 칸탈리체(Cantalice)라는 산촌에서 태어났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소농가 집안의 산티와 산타 포리(Porri)라는 펠릭스의 부모는 펠릭스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여 그 시절의 풍습에 따라 아들을 목동 일을 하는 농장 일꾼으로 고용시켜야만 했다. 펠릭스에게는 ‘블라시오'와 '카롤로’라는 형과 ‘포텐티아’와 ‘베드로 마리노’라는 동생이 있었다. 베드로 마리노는 칸탈리체와 리에티(Rieti)간의 전쟁에서 전사했다. 펠릭스는 열 살 때쯤 치타두칼레(Cittaducale)에 사는 피키(Picchi)라는 농가에게 일꾼으로 고용되었다.
일꾼들은 거친 시골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과의 일은 힘들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고된 하루의 쌓인 피로를 씨름으로 풀기길 좋아했다. 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촌이 사막 교부들의 생애를 읽어 주곤 했는데, 펠릭스는 그 고행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그들의 엄격성을 본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천사의 계시로 알게 된 카푸친 성소
펠릭스가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에 꿈에 천사를 보았는데, 그 천사는 펠릭스에게 카푸친회에 입회하러 레오네사(Leonessa)에 가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펠릭스는 꿈을 이루려고 레오네사에 갔지만 관구대리 형제를 찾지 못해 농장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또다시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번에는 리에티의 카푸친 형제회에 가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헛된 시도였고 농장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어느 날, 길을 지나던 아우구스티노회의 한 수사가 펠릭스에게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도록 권했지만 펠릭스는 ‘카푸친이 아니면 싫습니다.’ 라며 사양했다.
두 번이나 입회할 기회를 잃어버린 펠릭스는 아무런 진척 없이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펠릭스는 황소 두 마리를 길들이다가 고삐를 놓는 바람에 쟁기의 날 밑에 몸이 끼는 사고가 났다. 다들 펠릭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달려갔지만 다행이도 펠릭스는 무사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펠릭스는 자신의 고용주에게 가서 재산을 다 포기하겠으니 자신을 치타두칼레 카푸친 형제회에 데리고 가서 입회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내 펠릭스는 치타두칼레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에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는데, 그곳의 수호자는 펠릭스를 성당에 데리고 가서 큰 십자고상 앞에서 성소를 잘 식별할 은혜를 청해보라고 하였다. 하루 종일 펠릭스를 깜박 잊어버린 수호자는 저녁때에 기도하러 성당으로 돌아와서야 그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펠릭스를 발견했다. 그래서 수호자는 "내 아들아, 무엇을 하고 있느냐? 아직도 여기 있는 거냐? 기운을 내거라! 너를 우리에게 데려다 주마.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홀로 계시지 않을 거다. 네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도와 드릴 테니 말이야." 하고 말하였다.
수련기와 서약
10일 후, 펠릭스는 로마로 가서 로마 형제회의 수호자였던 아스티(Asti)의 베르나르디노 형제의 소개로 예전에 만날 수 없었던 그 관구대리 형제를 만날 수 있었다. 관구대리(볼테라(Volterra)의 라파엘 형제)는 정식으로 펠릭스에게 입회를 허락했다. 그때가 1543년 늦가을이었다.
1544년 초, 비 내리는 어느날 아침, 펠릭스 형제는 그의 수련장이었던 퓨찌(Fiuggi)의 보니파시오 형제와 함께 퓨찌에 있는 수련원으로 갔다. 수련을 받는 동안 펠리스 형제는 잦은 열병에 심신이 허약해져 고생했는데 형제들이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할 지경이었다. 결국은 몬테 산 죠반니 캄파노(Monte San Giovanni Campano)에 보내기로 하였고, 다행이 펠릭스는 그곳에서 회복되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마스트란토니오(Mastrantonio)의 야고보라는 공증인 앞에서 정식적으로 모든 재산을 형제자매들에게 전도하여 미래의 모든 상속권을 포기했다.
로마에 파견되어 동냥자로 임명받다
1545년 5월 18일, 펠릭스 형제는 수련기를 마치고 종신서약을 했다. 늘 은둔생활을 그리워했던 펠릭스였지만 그 꿈을 이룰 기회를 받기는커녕 티볼리(Tivoli)와 비테르보(Viterbo) 형제회에서 1년 동안 봉사한 다음, 소도회의 봉사자들에 의해 성 니콜라우 데 포르티스(San Nicola de Portis)의 로마 형제회로 보내졌다. 1547년부터 그곳에서 그는 형제회의 생계를 위해 구걸하는 동냥자로 소임을 받았고, 향후 40년 동안 펠릭스 형제는 이 일에 충실히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카푸친들의 동냥자가 된 칸탈리체의 펠릭스 형제는 동냥자루를 어깨에 메고 로마의 형제들을 위해서 매일 매일 길거리에 나섰다. 동냥 임무는 쉽지 않았다. 포장되지 않은 거친 길거리에 맨발 상태로 어떠한 굳은 날씨도 맞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밝은 모습에 겸손하고 조용했던 그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눈을 내리 깔고 맨발로 늘 조용히 기도하며 걷던 그는 도움의 요청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빵과 포도주, 기름을 너그러이 나누어 주었고, 스스로 도울 수 없었을 경우에는 고위 성직자들과 로마의 부자들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 때문에 ‘펠릭스 형제의 동냥자루는 그의 마음처럼 밑바닥이 없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데오 그리치아스 형제'!
‘하느님께 감사’ 펠릭스 형제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드리세요!’라고 자주 권고하곤 했다. 그리고 보시를 받을 때에는 늘 ‘데오 그라치아스(Deo Gratias, 하느님께 감사)’라고 말했기 때문에 ‘데오 그리치아스 형제’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데오 그리치아스 형제’는 때로는 병자들을 문안 가서 몸소 돌보기도 했고, 그들에게 병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굳게 가지라고 위로하곤 했다. 그리고 병자들에게 십자가로 축복하여 병을 낫게 하기도 하였다. 펠릭스 형제가 동냥으로 받은 식품은 나중에 치료의 도구가 되기도 했는데, 한번은 그가 구걸했던 포도주로 오르비에토의 주교, 베드로 크레셴지(Crescenzi) 추기경의 어머니인 콘스탄자의 눈을 씻어서 눈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리고 임종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빈번이 위로해 주었다. "하늘나라, 하늘나라" 혹은 "천국에 가도록 너 스스로에게 허락해 줘."라는 말로 용기를 주며 죽음을 준비하게끔 했다.
음유시인이었던 펠릭스
펠릭스 형제는 누구보다도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많이 보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나누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만든 노래로 단순하고 쉽게 교리를 가르치곤 했다. 그 노래들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짧은 성가들이었다. 예를 들면,“Gesù, somma speranza, del cor somma baldanza. Deh! dammi tanto amore, che mi basti ad amarti (예수님, 최고 희망, 마음의 최고 대담, 자! 제게 사랑 주시어 당신 사랑케 하소서.)” 라는 노래와 “Hoggi in questa terra è nata una rosella, Maira verginella, ch'è Madre d'Iddio. (오늘 이 땅에 한 작은 장미꽃 났네! 작은 동정 마리라, 천주 성모시네.)”
성모님 펠릭스에게 아기 예수님을 안겨주시다
펠릭스 형제는 자신의 내면생활을 드러나지 않도록 대단히 조심했다. 특히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잘 숨겼 왔는데, 성탄절 즈음 어느 날 밤, 기도하는 펠릭스 형제를 몰래 감시하던 알퐁소 루포 신부에 의해 그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날 밤에 그는 펠릭스 형제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신 것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펠릭스 형제가 성모님께 요청하자 아기 예수님을 펠릭스에게 안겨주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성 펠릭스의 성화에서 성인이 아기 예수님을 껴안은 채로 자주 등장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일화 때문이다. 또 펠릭스 형제는 아기들과 젊은 어머니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다정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그의 성 모자(母子) 신심을 잘 드러내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했다.
어려운 사람들을 걱정하는 '민중의 형제'
로마의 사람들은 온갖 걱정과 고통을 의사보다 먼저 펠릭스 형제에게 가서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무릎을 꿇고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바쳐드림으로써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드리곤 했다. 또 많은 어린이들이 펠릭스 형제를 "파!(Pappa, 아빠)"라고 다정하게 불렀는데, 펠릭스 형제를 잘 몰랐던 사람들은 나이 든 독신 수도자가 이런 애칭으로 불리는 것에 가끔 놀라곤 했다.
또한 펠릭스 형제는 선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크나큰 신뢰심을 품었다. 로마에 전염병이 돌았던 어느 해였다. 때가 때인 만큼 형제들에게 음식이 모자랄 것을 염려한 봉사자들은 펠릭스 형제에게 바깥의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는 더 이상 음식을 동냥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이에 펠릭스 형제는 “형제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동냥을 하게 되면 우리 형제들이 굶게 될 것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내 말을 믿어 봐.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형제들도 굶지 않을 거네.” 라고 대꾸하자 봉사자들은 그 선행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그래서 펠릭스 형제는 일 년 내내 충분히 동냥할 수 있었고, 형제들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어려운 시민들도 먹여 줄 수가 있었다.
윗사람도 바로 잡을 줄 알다
펠릭스 형제는 대체적으로 형제회 내에서 조용한 편이었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솔직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어떤 형제에게 "자네를 바로잡고 싶네."라며 직접적으로 몇몇 권고를 하기도 했다. 카푸친 설교자들에게는 "이름을 떨치려 하지 말고 사람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설교하게나."라고 빈번히 말하곤 하였다. 때로는 에지디오 형제의 "Bo, bo, bo, assai dico e poco fo! (뽀, 뽀, 뽀, 아싸이 디코 에 포코 포!)"라는 금언을 자주 인용하곤 했는데, 그 뜻은 ‘쯧, 쯧, 쯧, 말만 많고 실천은 모자라는구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카푸친회의 보호자 추기경(율리오 안토니오 산토리(Santori))에게 "추기경, 당신은 수도회의 장상들 일에 간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라며 혼낸 적이 있었다. 또, 장래에 식스토 5세 교황이 될 사람에게 "자네가 교황이 되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이익을 위한 교황이 되어 줘. 그게 아니라면 그냥 단순히 형제로 남는 것이 나을 걸세." 라고 말했다. 나중에 교황이 된 식스토는 길거리에서 만난 펠릭스 형제에게 가끔 빵을 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런 그에게(식스토 5세 교황은 원래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형제회 회원이다) 오래된 흑빵을 주면서 펠릭스 형제는 "성하, 죄송하지만 자네는 아직도 형제이지?" 라고 말했다.
한번은 베르나르디노 비샤(Biscia)라고 하는 변호사의 법서위에 십자고상을 놓고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가리키며 "베르나르디노, 이 보게나. 이 모든 책들은 자네가 이분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진걸세."라고 말했다.
이렇게 펠릭스 형제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에는 고향(사빈 지역)의 사투리로 늘 반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펠릭스는 도무지 겉치레로 가장할 줄을 몰랐다. 누군가를 회개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지위나 계층을 가리지 않고 허물없이 직접 당당이 맞서곤 했다. 하지만 물품을 구걸 받을 때나 필요한 물품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때는 상대방을 깍듯한 존경으로 대했다고 한다.
펠릭스의 숨은 기도생활
개인 신심과 묵상을 위하여 펠릭스 형제는 기도문과 성경과 전례의 문구들을 외우곤 했다. 그는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마음으로 기도하며 정신을 영적인 신중함으로 무장하곤 했다. 로마의 길거리에서든 자신의 방에서든, 형제회의 성당에서든 그의 마음은 늘 관상으로 고취되어 있었다. 복음 말씀에 영감을 얻어 묵상하곤 했고, 다른 형제들이 잠든 후에는 그날 하루 동안 만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는 것에 적지 않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보냈다. 잘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길 때에는 저명한 스페인의 사제인 알퐁소 루포 신부에게서 자주 영성지도를 받았다.
성인들의 친구
성 펠릭스는 동시대의 다른 유명한 성인들과 친구였다. 성 필립보 네리와 함께 로마 거리에서 마치 취객들처럼 싸움이 난 듯 가장하여 구경꾼들을 불러 모은 뒤, 성 필립보를 위해 설교 청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성 카롤로 보로네오도 성 펠릭스의 친구였다. 그는 자신이 창설했던 성 암브로시오의 봉헌회를 위한 회헌을 문맹인 펠릭스에게 평가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는데, 펠릭스 형제는 그 책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너무 부담스럽다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회헌에 대한 펠릭스의 말을 들은 카롤로 성인은 정비서원과 같은 내용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고, 펠릭스 형제의 충고에 따라 회헌을 재편집하여 일부 규정을 완화했다고 한다.
천사들의 성모님께서 죽어가는 펠릭스를 마중 나오시다!
1587년 4월 30일, 펠릭스 형제는 병에 걸렸는데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아 차렸다. 형제들에게 "작은 수탕나귀(숫당나귀는 잘못된 표현)가 쓰러졌군. 이제 다시 못 일어나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많은 시민들의 칭찬에도 상관없이 펠릭스는 겸손하게도 늘 자기 자신을 형제들의 짐을 지는 당나귀로 여기곤 했다. 1587년 5월 18일 아침, 펠릭스 옆에서 간호를 하고 있던 프라토(Prato)의 우르바노 형제는 얼굴이 눈부시게 변모한 펠릭스를 보게 되었다. 펠릭스는 손을 쳐들고 "오, 오, 오"라는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다. 펠릭스 형제는 "나는 경이로운 천사수행원 무리로 둘러싸이신 동정 마리아님을 보네!" 라고 대답했다. 수호자가 여행을 위한 노자 성체를 모시고 왔을 때 펠릭스 형제는 ‘O sacrum convivium(오 거룩한 잔치여)’이라는 성체성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곳에 모인 형제들에게 ‘Deo gratias’ 라는 응답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신 다음 사제가 ‘그리스도의 영혼이여, 이제 떠나시오.’ 라는 기도를 바치는 중, 그는 그 기도문에 끝까지 순종이라도 한 듯 세상을 떠났다.
카푸친들의 최초 성인이요 모범인 펠릭스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의 시신은 로마의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있는 무염시테의 카푸친회 성당에 모셔져 있다. 1625년 10월 1일, 우르바노 8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클레멘스 11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는 비단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 최초로 시성된 성인인 것뿐만 아니라 또한 카푸친회의 생활양식과 성덕양식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최고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 이마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내 입에,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마음에!", "나는 너무나 행복하게 살기에 이미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네. 내가 행한 작은 일일지라도 이 현세의 삶 안에서 그 어떤 보상으로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마음을 더럽히는 헛된 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기쁘게 해주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라.", "나는 오직 여섯 자의 글자만 알고 있네. 빨간 글자 다섯과 흰 글자 하나이네. 빨간 글자 다섯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흔이며 흰 글자는 성모님이시네.", "눈은 땅을 향한 채로, 마음은 하늘에다 올린 채로, 묵주는 손에 든 채로!" -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
그는 아뿔리아의 치따 두칼레 교외인 깐딸리체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신심깊은 농부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소몰이를 하는 등, 농사 일을 거들었으나, 항상 기도하는 열심한 소년이었다.
성장한 뒤에도 펠릭스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치따 두칼레의 카프친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수련기부터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깐딸리테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30세에 성대서원을 발하였고,4년 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비롯하여
수도원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성 필립보 네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천주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6세기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대로 루터 등이 소위 종교 개혁의 미명하에 여러 가지의 이단설을 주창하고
유럽의 종교계를 수습하기 어려운 혼돈속으로 빠뜨린 비참한 시대였지만,
그 반면에 신대륙 아메리카에는 전교의 개척이 이루어지고,
또한 동양에도 전교가 활발해지는 한편 수많은 성인이 배출되는 등 좋은 현상도 적지 않았다.
성 펠릭스는 그 시대의 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515년 이탈리아의 움부리아 주의 칸탈리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가정이 어려웠으므로 통학할 수도 없었고,
소년 시절에는 목동으로서 아버지의 가축을 지키며 지내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느 대 농가의 일꾼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교리같은 것도 별로 연구한 적이 없었으나 신앙심이 유난히 깊었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연상하고서는 그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숭배 찬미하고,
또한 큰 나무 기둥에 십자가의 모상을 파고 그 앞에서 혹은 묵상하고
혹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등 외울 수 있는 기도는 모두 바치고 있었으나,
그 중에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예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은수자의 전기를 읽고 매우 감동하여 자신도 그들처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 마음껏 시도아 고행을 하려고 생각하고 어느 동료에게 이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 동료가 말하기를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특별히 산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치타 두칼레에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기만 해도
충분히 네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는 즉시 그 말을 따라 그 수도원을 방문하고 원장에게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도 원장은 펠릭스에게 과연 하느님의 성소가 있는가 없는 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맨 나중에 유혈이 낭자한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보이면서 "수도자가 되면 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신에게 그만한 결심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자,
그는 "제가 고행 이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극히 열성적인 기색이 보였으므로 원장도 드디어 그를 수련자 중의 하나로 받아 주었다.
펠릭스는 30세로서 수련을 마치고 곧 로마에 파견되어 구걸하러 다니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한 일이었다.
그는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는 로마의 네거리나 가로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온정에 호소하면서
수도원의 일용품을 거두고 은인을 위해서는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가 길을 걸을때에는 손에 묵주를 굴리며 눈은 경건하게 밑으로 뜨고 마음은 높이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자선의 표시를 받았을 때는 반드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는 은인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게으름뱅이!" 혹은 "거지!"라는 등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는 온순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민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아이들은 곧잘 재미로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면서 소리를 맞추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놀려댔다.
그러나 펠릭스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그들과 하나되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거듭하곤 했다.
그는 어떤 때에 장상으로부터 자선 받은 것의 일부를 빈민에게 희사해도 좋다는 허가를 들으면,
매일같이 드라스데베르의 빈민굴을 찾아가 금품을 주며 가난한 이를 돕기도 하고,
사랑의 말로써 고민하는 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틈만 있으면 병자를 방문하여 친절히 간호도 해 주고 때로는 선종의 준비도 시켜주고,
밤에는 종종 수도원의 성당에 가서 감실앞에 무릎꿇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열심히
주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청했다.
펠릭스의 성덕은 차츰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졌고, 그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게 되었지만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이 늘 자신을 ’카푸친 수도원의 당나귀’라는 천한 말로 불렀다.
그는 세속 학문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변호사를 방문하여 그의 호화로운 도서실을 구경하게 된 펠릭스는
"선생은 대단히 많은 책을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십자가라는 책을 읽지 않으면
도리어 영혼에게 해로운 것을 배울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하고 충고하고는
"내가 배운 글자는 붉은 자 다섯 자, 흰 자 하나, 도합 여섯 자밖에 없어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다섯 붉은 자란 것은 주님의 수난의 상징인 오상을 의미하고
하나의 흰자란 것은 순결한 동정 성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성모께 대한 신심은 대단해 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성모께서 성자를 안고 마중나오셨다는 전설까지 남아있다.
즉 임종할 시기가 가까워오자 그는 희열에 충만된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하고 미소를 띄우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곁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니까,
그는 "나는 당신들이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지요"하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대답한 뒤
곧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1587년 5월 18일, 그의 나이 73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5월18일
성 요한 1세 교황 순교자
St. Pope John I
St. Joannes Ⅰ. Pap. M
San Giovanni I Papa e martire
Born:in Populonia
Papal Ascension:13 August 523
Died:18 May 526 of thirst and starvation in prison in Ravenna, Italy
Canonized:Pre-Congregation
Giovanni = il Signore e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
=the beneficial Getlteman and, gift of the Getlteman, dall’ebraico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태어났고, 523년 로마 교회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테오도루스왕은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스띠노 황제에게 파견했지만 귀국하자 그가 한 일의 성과에 분노하여 라벤나에 투옥시켰다.
526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빌라의 성 요한 사제의 편지에서
(Ep. ad amicos, 58: Opsra omnia, edit, B.A.C. 1, 533-534)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도록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으로서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하느님의 위로를 받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또한 위로해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 것처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많습니다. "
이것은 복된 사도 바울로의 말씀입니다. 그는 몽둥이로 세 번 맞고 다섯 번 매를 맞았으며 한 번 돌로 맞아 죽은 사람처럼 버려졌습니다.
여러 종족의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온갖 수고와 환난을 수없이 겪었지만 자신의 서간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드러나도록 언제나 예수를 위해 죽음에 넘겨집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이 모든 환난중에 우리 약한 인간이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 한마디의 투덜거림이나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명예나 쾌락을 즐기는 사라들같이 실의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환난을 동반자로 삼기는 원하지 않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같이 하느님께 환난을 거둬달라고 귀찮게 조르지도 않습니다.
환난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것을 하찮은 일로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무지와 나약을 벗어 버리고 환난 중에 하느님을 찬미하며 흡사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것을 주신 하는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영예를 위하여 무언가 환난을 당하게 된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추악한 죄를 섬겼기에 받아야 했던 수치에서 우리를 구하시고자 온갖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영과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으로 꾸며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셨으며,
당신을 통하여 우리가 천상에서 당신을 즐기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표지를 주셨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세상이 멸시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주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멸시당할 때 얼마나 영예스럽고, 현재 당하는 환난이 지나가 버린 후 우리에게 유보된 그 영광이 얼마나 크며,
주님을 위한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들을 품안에 받아들이시고자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그 팔이 얼마나 부드럽고 사랑에 넘치고 달콤하며,
또 이것들은 우리가 현세에서 당하는 환난이 주는 쓰라림에 비해 얼마나 더 위대한 것인지 깨닫도록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의 이 포옹을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망할 것이 없는 사람 외에는 온전히 사랑할 만한 그분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위대한 것을 생각하고 또 그것들을 즐기고 싶어한다면 거기에 이르는 데 환난의 길보다 더 확실한 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이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모든 이가 걸어간 길입니다. 주님은 그 길로 보고 좁은 길이라고 하시지만, 생명으로 곧장 인도 해 주는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만일 당신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을 밟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치욕의 길을 걸어가셨는데 인간의 자녀들이 명예의 길을 찾는다면 이는 어찌된 일이겠습니까?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위한 환난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안식을 찾지 않고 또 이 현세에서 다른 방식을 택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가톨릭홈에서)
*아빌라의 성 요한 사제 축일:5월10일.
요한은 ’야훼는 은혜로우시다’란 뜻이다.
’착한 교황 요한’이란 말은 아직도 가톨릭, 개신교, 유다인들의 가슴 속에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세상에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이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요한 23세 이전에 이미 요한의 이름을 가진 22명의 교황이 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요한1세만이 유일하게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교황 요한 1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아니즘 이단과의 투쟁 속에 교황의 자리를 계승한다.
이탈리아는 이단과 결탁한 황제에 의하여 30년 동안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도 황제는 제국 전체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러나 황제의 정책은 젊은 요한이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무렵에 바뀌었다.
동로마의 황제가 자기 영토내의 이단자들에게 엄한 정책을 펴기 시작했을 때 서로마의 황제는 교황 요한에게
동로마가 이단에 대하여 완화 정책을 쓰도록 동로마에 사절로 가라고 강요했다.
서로마에서 가톨릭 신자들을 계속 관용으로 대하게 하려는 안전 보장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협상의 방법이나 결과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교황 요한이 로마로 돌아올 때 그는 황제가 황제의 적인 동로마 황제와 자신이 친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 요한이 귀국하는 도중 라벤나에 이르렀을 때 황제는 그가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갇힌지 얼마 안되어 교황 요한은 사망하였다. 교황이 사망한 이유는 그가 받은 대접 때문이었던 것은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때로는 죽어야 할 어떤 문제점을 선택할 수 없다.
요한 23세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정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받고 고통스러워했다.
요한 1세는 권력을 의식하는 황제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유와 개방성 그리고 무력함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의 의심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을 보게 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생각하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당하신 스승을 본받고 스승을 닮아 피를 흘리는 제자의 순교는 교회에서 최상의 은혜요,
사랑의 최고 증명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은혜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교회가 언제나 당하고 있는 박해 중에서도 십자가의 길로 그리스도를 따라갈 준비는 갖추고 있어야하겠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42항)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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