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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녀 에텔드레다(오드리) 아빠티사 / 성 요셉 카파소 사제 기념일 +++

 

축일:6월23일
성녀 에텔드레다(오드리)
St. Etheldreda or Audrey Abbess
Sant' Eteldreda di Edy Badessa

St. Etheldreda, OSB Widow (RM)
Born: c.640,Exning, Suffolk, England
Died: 679 de causas natural ,at Ely,
Canonisate:Pre-Congregation
Patronage:Cambridge University,

 


그녀는 이스트 앵글의 국왕 안나의 딸로서,

잉글랜드 슈포트의 엑스닝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로 그리비이의 왕자 콘버트에게 시집갔으나,

이 결혼은 남편이 불과 3년만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어렸으므로 동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엘리 섬에서 5년을 살다가,
노스움브리아의 오스위 왕의 아들인 에그프리드와 결혼하였다.
결혼생활 12년 후에, 남편이 그녀에게 남편의 권리를 요구하였을 때,
그녀는 자신을 이미 하느님께 봉헌한 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 후 남편의 동의를 얻어서 그녀는 엘리 섬에 돌아갔으며,
672년경에 수도원을 세운 뒤 원장으로 지내면서 일생을 봉헌된 생활로 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십자가

CSPB = CRUX SANCTI PATRIS BENEDICTI"

(사부 성베네딕도의 십자가)

 

 

 

 

자기 절제


성녀 오드리로 더 잘 알려진 에텔드레다는 결혼을 두 번이나 하고도 동정을 간직했다.
3년 간 계속된 첫 번째 결혼에서는 남편과 친남매처럼 살았고
두 번째 결혼은 가족의 강요에 의해 북움브리아국의 어린 왕 에그프리드와 하였다.

12년이 지난 후 에그프리드는 좀더 많은 것을 원했으나 에텔드레다는 수녀가 되기를 원하였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을 받아서

에텔드레다는 수녀가 되었고 에그프리드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에텔드레다와 두 남편은 정말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사에서도 루갈다 동정 부부가 있었던 것처럼
과거에는 자기 절제를 흔히 영적 성장의 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자기가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고의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인들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가끔 참아 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열심히 일했을 때 휴일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오늘날에는 절제를 영적 성장이나 공덕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사실 자기 절제는 영원히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절제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기다렸기에 기쁨이 더 컸던 일을 체험한 적은 없는가?
적당한 자기 절제로 스스로를 훈련하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아빠스. 라틴어 abbas.영어 abbot.

여성형은 아빠티사. 라틴어 abbatissa, 영어 abbess

 

대수도원장. 의전 사제 수도회와 대수도원의 장에 대한 호칭이자 직함.

동방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영성적 스승을 `아빠’(abba)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특히 성 베네딕토의 수도 회칙에 의해 서방 수도원에 소개되었다.

이를 분류해 보면, 그 수도원 내에서만 완전한 자치권을 향유하는 일반 아빠스(abbas regularis de regimine),

수도원이 속해 잇는 특정 지역 전체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에까지 실제적 자치권을 갖는 면속 아빠스,

한수족의 장을 가리키는 총아빠스, 근대에서 베네직토 연합회의 장을 가리키는 수석 아빠스 등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아빠스"란 무슨 뜻인가?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 즉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등과

아우구스띠노 엄률수도회 들 일부 특정 수도회에 속한 자치 수도원의 원장을 일컫는 명칭이다.

아바스는 「아버지」「원로」「장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집트나 시리아 등 동방지역에서는 「영적 아버지」「영적스승」「사부」의 의미로

은둔 또는 독거 수도자들의 스승을 일컫는 데 사용되었다.

 

아빠스는 수도원의 최고 장상으로서 교회의 상급 장상(superior major)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빠스는 수도원과 관련된 일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며,

재산 관리권, 입회자 청원자 수련자들을 받아들이는 권한도 가진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아빠스는 『한번 아빠스가 되면 영원한 아빠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종신직이다.

즉 수도원장직에서 퇴임해도 아빠스의 명칭은 그대로 보유하는 것이다.

새로 선출된 아빠스는 일반적으로 주일이나 축일에 지역주교에 의해 축복된다.

주교직과는 달리 아빠스직은 서품도 아니고, 성사도 아니며, 아빠스들 사이의 「성사적 연대성」도 없다.

 

 

*성녀 프란카 비잘타 아빠티사 축일:4월26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서방 수도생활의 스승) 축일:7월11일.

*에집트의 성 안또니오 아빠스(공동체 수도 생활의 스승 혹은 시조,사막의 교부)축일:1월17일.

*성 로무알도 아빠스 축일:6월19일.

*성 파코미오 아빠스 축일:5월9일.

*성 요한 클리마코(계단)아빠스 축일:3월30일.

*성 사바 아빠스 축일12월5일.

*성 골룸바노 아빠스 축일:11월23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축일:8월20일.

 

 

 

 

축일:6월23일
성 요셉 카파소 사제, OFS
San Giuseppe Cafasso Sacerdote
Castelnuovo d’Asti, 15 gennaio 1811 - Torino, 23 giugno 1860
Etimologia: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Saint Joseph Cafasso
Also known as Priest of the Gallows
Born 1811 at Castelnuovo d'Asti, Italy
Died 23 June 1860 at Turin, Italy of pneumonia, a stomach hemorrhage, and complications of his congenital medical problems; his will bequeathed everything to aid the ministry of Saint Joseph Benedict Cottolengo; Saint John Bosco preached the funeral Mass homily
Name Meaning : Giuseppe = aggiunto (in famiglia), dall'ebraico, whom the Lord adds (Joseph)
Canonized : 1947 by Pope Pius XII


성 요셉 카파쏘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까스뗄누오보 다스띠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케이리 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꼬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립보 네리, 성 프란치스꼬 드 살,
그리고 성요한 보스꼬와 떼어놀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센니즘을 퇴치케 하였다.
또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도 그였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에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돈보스꼬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교구사제였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였다.


그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서로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다. 또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하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다. 그는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



*성 요한(돈) 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살레시오) 주교 학자 축일:1월24일.

 


*참고:
얀세니즘

라틴어 Jansenismus 프랑스어 Jamsenisme 영어 Jnsenism


아우구스티노의 극단적인 주장을 강조한 신학사상.

원죄, 자유, 성총 등 많은 부분에서 비 가톨릭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사상은 루뱅대학의 교수였던 얀센의 저서 <아우구스티누스>가

1640년에 저술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용 중 5개조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1653년 이단설로 선고 받았다.

즉 얀세니즘은 다음과 같은 교의,

① 그리스도는 전인류를 위해 죽었다는 점

② 하느님은 모든 의인들에게 계명을 주고, 그것을 수행할 충분한 은총을 주었다는 점

③ 신을 등진 인간은 내적인 은총에 반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④ 선악에 대한 내적 요청은 필연적인 것이라는 점 등을 부정하였다.

 

그 밖에도 교회규율, 특히 속죄행위, 영성체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얀세니즘은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이달의 성인] 성 요셉 카파소(1811-1860)
윤 클레멘트 신부

성 요한 보스코(1815-1888)와 절친한 영적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로도 알려졌지만 그는 살레시오 수도자는 아닌 교구 사제였다. 그는 돈 보스코의 사제 초기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특별히 1841년부터 1860년 그가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돈 보스코에게 영적 지도를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가스텔누오보 다스피에서 태어났으며 부모가 농사를 짓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특별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된다. 그는 사제로 서품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토리노의 교회대학’(Ecclesiastica College of Turin)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계속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애의 나머지를 토리노의 교회대학에서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고해성사를 주는 고해사제로 살면서 사제 양성에 헌신한다. 아울러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사랑과 봉사에도 뛰어났는데, 특별히 죄수들, 더욱이 사형수들에 대한 돌봄에 매우 열심이었다. 훗날 교회는 그를 죄수들의 주보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는 아울러 당대의 유명하던 성 필립보 네리(1515-1595),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1567-1622) 등과도 영적인 친분을 쌓으면서, 서로에게 좋은 영향들을 준다.

그는 또한 설교가로서도 탁월했는데, 그 당시 북 이탈리아 지방에 퍼지면서 유행하던 얀세니즘(Jansemism : 원죄, 자유, 은총 등에 대해 극단적인 주장을 하면서, 교회규율, 속죄행위, 영성체 등에 대한 요구를 거부)을 멀리하게 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그는 자신의 글인 ‘성직자의 피정 묵상’에서 필수적인 덕행과 요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성직자들에게는 다음의 덕과 조건들이 필요하다. 즉, 인내의 정신, 가난, 겸손, 피정에 대한 사랑, 종교적 실천 등이다. 특히 성령, 덕행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일들이 필요한데,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서 영혼들을 비추고 거룩하게 해야 할 운명이 주어진다.’

그는 세상을 떠나던 해 봄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데, 그 해 여름에 임종을 맞는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미사를 하게 되는데, 그의 죽음을 마치도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던 돈 보스코 성인은 그날의 강론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사제생활의 한 모델, 성직자들의 교사, 죽어가는 이들의 위로자, 모든 이의 친구였습니다.”

하느님의 한 인간, 성직자들의 모범이요 교사, 가난한 이들과 죄수들의 친구가 되었던 그는 세상에서는 짧았던 49세의 일기로, 1860년 6월 23일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떠나갔는데, 1947년 6월 23일에 교황 비오 12세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2011년 6월 5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전주주보 숲정이에서]



[금주의 성인] 성 요셉 카파소(St. Joseph Cafasso, 6월 23일)
1811~1860.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수감자들의 수호성인.

성 요셉 카파소는 이탈리아 부농집안에서 태어났다. 척추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난 그는 평생 구부정한 자세로 살았다. 성인은 신학교에 입학해 1833년 사제품을 받았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한 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명강의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성인은 또 교회규율과 성체성사를 거부하던 이단 얀세니즘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성인은 본당 사제로 활동하면서 교정사목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비참한 대우를 받는 수감자들 인권보호를 위해 발벗고 나섰으며, 비인간적으로 이뤄지는 교수형 제도를 바로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돈보스코 성인과 10대 때부터 친구로 지냈는데 돈보스코 성인이 청소년사목에 뛰어드는 데 큰 힘이 됐다. 훗날 돈보스코 성인은 요셉 카파소 성인 장례식 강론을 맡았고, 성 요셉 카파소 전기를 남겼다. 성인은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됐다.[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박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