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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마르시아노의 복녀 안젤리나 수도자 / 성 헨리코 2세 기념일 +++

 

 

축일:7월13일(7월14일)

마르시아노의 복녀 안젤리나 수도자,율수3회(T.O.R.)

Beata Angelina da Montegiove, detta anche da Marsciano, da Corbara o da Foligno
Monte Giove, Orvieto, 1377 – Foligno, 14 luglio 1435
Etimologia: Angelina (come Angela) = messaggero, nunzio, dal greco
Blessed Angelina di Marsciano
Born : 1377 in Montegiove, Orvieto, Terni, Italy
Died : 14 July 1435 in Foligno, Perugia, Italy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8 March 1825 (cultus confirmed)
Canonized : pending


복녀 안젤리나는 1377년 움브리아의 마르시아노 백작가(家)에서 태어났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며 조인들의 회개를 위해 애쓰고
여러 곳에 3회의 회칙을 따르는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435년 7월14일 폴리뇨에서 선종하였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지침서 '발자취를 따라서' 520쪽에서)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 오르비에토(Orvieto)의 몬테지오베(Montegiove)에서 태어난 안젤리나는 마르시아노의 영주 안지오발리(Angioballi)와 코르바라 백작 가문인 안나(Anna)의 딸이다. 그녀는 15세 때에 치비텔라(Civitella)의 백작인 테르니(Terni)의 요한과 결혼하였으나, 2년도 살지 못하고 과부가 되었다.



이때부터 안젤리나는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어 자기 집을 3회원의 공동체로 만들어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신적, 물질적 도움을 베풀기 시작하였다. 안젤리나와 동료 3회원들은 보속하는 행렬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행을 행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동정을 지키는 성소를 소녀들에게 일깨우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들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는데,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는 그녀를 조사하여 유죄로 판명되면 화형을 시킬 작정까지 하였다.



불과 18세의 과부이던 그녀는 주님의 인도로 아시시로 가서 그때까지 폐쇄되었던 성 프란치스코 율수 3회 수도원을 재건하여 성녀 안나에게 봉헌하고, 안젤리나는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율수 3회 수도원이 되었다. 성녀 안젤리나는 폴리뇨(Foligno) 외에도 스폴레토(Spoleto), 아시시(Assisi), 비테르보(Viterbo) 등 11곳에 율수 3회 수도원을 세우고, 비록 작은 공동체이지만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다가 58세를 일기로 선종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율수3회(Third Order Reguar)의 분리

13세기 말경을 거치면서 3회원들 중에서는 은둔생활을 함으로써 수도생활의 형태를 지니는 공동체가 생기게 되었다. 이에 1295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북독일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회개의 형제들에게 성무일도를 바치는 경당을 가질 수 있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1323년 교황 요한 22세는 (공경하올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칙서로 이들의 공동생활을 공식적으로 인준하였다. 이로써 재속3회와 율수3회가 법적으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재속3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려는 단체들이 많아져 보다 엄격한 조직과 규정의 통일성이 요구되었다. 그중 마르시아노의 안젤리나(Angelina)는 1397년 프란치스코 3회의 회칙을 지키면서도 엄격한 은둔생활을 하는 여성들만을 위한 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5개의 여자 수도회가 생기자 안젤리나는 총장으로 일하게 되고 교황에게 인준을 신청했다. 그녀는 여성들만을 위한 율수3회의 창설자로 여겨진다.

남자들의 공동 생활도 발전해 갔다. 1401년 1월18일 보티파시오 9세는 남자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총장을 선출하고 수도서원을 발할 권한을 주면서 남자수도3회를 인가하였다. 1413년에는 요한 22세 교황이 마려해준 규칙에 따라 가난,순명,정결 서원을 하였으며, 성당과 회색수도복, 숙소등이 마련되었다. 또한 서원 전에 1년의 수련기를 갖게 되고 정기적인 회합 및 자신들의 시찰자를 선출하게 되었다.

 

1443년에 리제(Liege)의 주교는 그동안 지역적으로 생활하던 수도공동체가 제퍼런(Zepperen) 공동체를 모원으로 가지도록 요구하였고 소집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로 일치된 남자들의 공동체도 구성되었다. 1447년 니콜라오 5세 칙서로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3회 은둔 공동체는 율수3회로 통합 할 것을 명하였다.

 

1521년 교황 레오 10세는 니콜라오 회칙(1289년)에 성대서원을 할 수 있는 10개의 장을 첨가한 회칙을 칙서로 인준해 주었다. 이로써 재속3회의 생활 양식과 다른 수도서원의 생활 양식을 사는 율수3회는 비로소 법적으로나 생활양식으로나 재속 3회와 완전한 분리가 이루어졌다.
(간추린 프란치스칸 역사 강의록 83-84쪽에서)


율수3회(Tertius Ordo Regularis, T.O.R.)

13세기 부터 재속 3회 내에서 수도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단체를 구성하고 자선사업을 하며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413년 교환 요한 22세가 칙서를 보내서 총회를 가질수 있도록 하였다.
1회와 똑같은 서원을 하며, 1회와 3회의 이상을 결합한 고유의 회칙을 갖고 있다.
1회 세가족과 함께 재속프란치스코회의 영적. 사목적 보조를 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진출하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가족들
1회: 작은형제회(O.F.M.).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O.F.M.conv.),카푸친작은형제회(O.F.M.cap.)
2회: 클라라회(O.S.C.)
3회: 재속프란치스코회(O.F.S.), 율수3회(T.O.R.), 수도 3회
(재속프란치스코회홈에서)

율수3회의 성인,복자들...
*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동정녀(+1640) TOR 축일 :1월30일
* 카우프베론의 성녀 마리아 크레센시아 호세 동정녀(+1744) TOR 축일 4월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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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자 요한 예로니모 요(토레스)순교자(+1632) TOR ?
* 복자 죠르지오 지롤트 순교자(+1792) TOR 축일 9월2일

 

 

 

 

 

 

 

 

성 헨리꼬의 [옛 생활기]에서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일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복된 종은 왕으로 축성될 때 세상의 왕권이 지니는 걱정 거리에 만족하지 않고,

불사 불멸의 관을 얻기 위하여 그분을 섬기는 것이 곧 다스리는 것이 되는 그 위대한 임금님 밑에

신하로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예배 의식의 확장을 도모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교회들에게 재산을 분배해 주고 예식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교회들을 아름답게 꾸며 주었다.

헨리꼬는 자기 속령 안에 밤베르크 교구의 주교관을 건립하여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및 바울로와 영광스러운 순교자 게오르게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교황청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권리를 존중해 주고 또 이 주교좌가

교황청의 후원을 받아 기초가 튼튼해지도록 이 주교좌를 교황청 권하에 예속시켰다.

이 거룩한 분이 아직도 나이 어린 밤베르크 교회가 평화와 안정을 미래에까지 보장받게 하려고

얼마나 힘썼는지 모든 이가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우리는 그가 쓴 편지 하나를 인용 하겠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로써 왕이 된 나 헨리꼬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교회 자녀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구원을 주는 성서의 말씀들은 우리가 이 세상 재물을 제쳐 놓고 세상의 안락을 뒤로 미루며

영원히 있을 천국의 집을 얻은 데 온갖 노력을 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영광을 소유하게 될 때 그 안에서 천상의 영원성과 관계 있는 어떤 것을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이고 헛된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하심으로 사람에게 유익한 치료제를 주셨습니다.

즉, 그분께서는 세상 것들을 통해서 천상 상급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고 거져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섭리로써

내가 왕직에 오르게 됨을 알면서 나의 선대 왕들이 전에 세운 교회들을 확장시키고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새 교회를 세워 나의 심심의 표시로소 이 교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여

그분께서 우리에게 이토록 너그러이 베풀어 주신 재산을 하늘의 곳간에 쌓아 두기를 원합니다.

 

그 곳에는 도둑이 들어와 훔치는 일이 없고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늘에다 우리 재물을 쌓아 둔다면 우리 마음은 사랑과 갈망 속에 그 곳을 자주 향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부친한테 유산으로 받은 바벤베르크에 주교좌와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했음을

모든 신자들에게 분명히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나의 선조들과 나 자신에게 휼륭한 기념비가 되고 또 거기서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한

희생 제물이 항상 봉헌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가톨릭 교회가 전 유럽을 통해 전성기를 이룬 시대이며 인심도 매우 경건하고 독실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왕후, 군주, 정치가, 예술인, 학자, 의사 등 사회 상류 계급에 속한 이들은 종교를

무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의 온갖 일을 종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해서 처리하게끔 관습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독일의 황제 헨리코 2세도 이와 같이 하느님의 성의를 받들어 선정을 베푼 현군(賢君)의 한 분이다.

 

그는 973년 5월 6일 남쪽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바리아의 왕 헨리코는 투쟁자라는 별명이 있는 자로서 황제에게 반항했으므로

게드린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귀족 회의 결정에 의해 추방을 당했다.

불과 여섯 살인 헨리코는 부모를 따라 각지를 헤매며 고난을 맞보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이런 불행 중에도 그에게 유익한 점이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동정심과 인내심을 양성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헨리코가 다시 고향인 레겐스부르크에 돌아오게 된 것은 그가 13세 때였다.

그는 그후 당시의 주교 볼프강의 슬하에서 충실과 근면과 신심에도 열심했으므로 주교의 깊은 총애를 받았고,그 당시 독일에 있어서의 가톨릭의 교세를 상세히 검토할 수가 있었다.

그가 23세 때 그의 아버지가 서거했다. 그는 곧 후계자로서 바바리아 왕이 되었다.

왕이 된 후 독일의 새 황제인 오토 3세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황제가 적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태에 있을 때에

그는 직접 그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군을 격퇴시켜 간신히 황제를 구출한 적도 있었다.

얼마 후 헨리코는 성녀 쿠네군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성녀쿠네군다축일:3월3일

 

 

 

그의 부인은 신앙이 깊고 애정이 두터우며 정치수완도 비범하여 남편의 출타 중에는

그 영토를 잘 다스렸으며 아무런 걱정이 없도록 했던 아주 현명한 부인이었다.

 

헨리코는 국민 생활의 쇄신에 치중하며 먼저 수도자들의 생활 개선부터 착수했다.

이는 사회의 모범이 되는 그들의 생활 개선이야말로 국민 선도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가장 필요하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 생활 개선의 적절한 방침으로 성 베네딕토회의 회칙을 준수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각 수도원에서 엄수하도록 권장했다.

그가 바바리아의 각 수도원장과 프랑스의 클뤼니의 수도원장 성 오딜와도 친교를 맺고

또 많은 수도원을 건축한 것은 수도자로서의 사회 선도의 방침을 실현시키려는 그의 의도에서였다.

 

그동안 독일의 황제 오토 3세는 이탈리아 원중 중 1002년 로마 부근에서 전사했다.

혈통으로 봐 헨리코가 그 후계자였으므로 그는 반년 후 마인쯔 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전 독일을 다스리게 된 헨리코 황제는 우선 선정을 베풀어 전 국토를 낙토화(樂土化)하는 한편,

그의 뜻을 거역한 자에게는 징벌의 검(劍)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상벌의 공정이야말로 황제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자가 잘못을 깨닫고 귀순한 때에는 이를 관대히 용서하고

추호도 그에 대한 유감을 남겨 두지 않았던 것이다.

 

헨리코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과거에 교회에 대해 많은 원조를 베풀었는데,

그가 일단 황제가 된 후로는 더욱 더 황후 쿠네군다와 합심해 바바리아뿐만 아니라

전 독일의 교회를 돌보며 수도원을 신축하고 주교좌의 유지자금을 기부했다.

 

 

 

 

"나는 자녀가 없으므로 나의 상속자는 예수이시고 내 재산은 모두 예수께 양도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성녀 쿠네군다의 전기에서 이미 말한바 있지만, 그들은 부부이면서도 서로 동정을 지켰고,

또 그들이 이와 같이 교회를 원조하는 댓가로서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바란 것은

국가를 위한 기도와 국민 생활의 선도뿐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그의 정적인 헤르만이 불의하게 친구인 슈트라스부르크의 주교의 재산을 몰수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복수로써 헤르만의 친구인 콘스탄트의 주교의 영토를 몰수할 것을 건의했으나,

“아니다. 하느님께서 불의를 끼치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자들을 처단하라는 의향이시다”하며

그 의견을 일축했다.

 

그가 가장 유의한 것은 바바리아 동북방에 있는 밤베르크 시에 주교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 지역은 황제 오토 2세가 헨리코의 아버지에게 선사한 것인데,

헨리코는 그 지역을 결혼할 때에 쿠네군다에게 선물로 양도했었다.

그는 그 지역을 한 교구로 규정하고 주교와 유지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화려한 성전을 건축케 하고 그곳을 가정의 안식처로 삼았다.

1020년 그 성전이 준공되었을 때 교황 베네딕토 8세께서 친히 방문하여

부활 축일을 기해 손수 성대한 축성식을 거행했다.

 

본래 건강한 체질이 아닌 헨리코는 격무에 육신이 쇠약해지고 거듭 쌓이는 피로를 못 이겼음인지

1023년 신병을 얻게 되어 이듬해 봄에는 할 수 없이 북 독일 지방에서 요양을 하다가,

7월 13일 급기야 크로나 성에서 서거했다.

 

 

 

그때 52세였고, 유해는 그의 소망대로 밤베르크 시에 이송되어 백성들의 애도 속에

그가 건축한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22년 후 1146년 그는 쿠네군다와 함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