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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 일도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성무일도 ~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아침기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1저녁기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1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는 1894년 1월 8일에 폴란드에서 출생하여, 청년 시기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고, 1918년에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께 대한 자녀다운 효성에 불타는 마음에서 "성모 기사회"라는 신심 단체를 설립 하였는데, 이 단체는 그의 고향과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전파되었다. 선교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성모님의 보호와 도우심 밑에서 신앙 전파에 노력하였다. 마침내 폴란드로 돌아가 크라쿠프 교구 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무수한 고통을 당하다가, 민족들의 전쟁이 더욱 가혹해지던 1941년 8월 14일에 자진하여 사랑의 제물로 생명을 내놓았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편지에서

(O. Joachim Roman Bar, O.F.M. Conv., ed., Wybor Pism, Warszawa 1973, 41-42; 226)

 

사람들의 구원과 성화를 위한 사도적 열성

 

친애하는 형제여, 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자고 그대에게 권고하려는 열의를 느끼며 한없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무관심주의라는 시대적 유행병이 세속 사람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형태로 전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괴로운 마음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이므로, 비록 우리 자신이 인간적 나약성 때문에 그 분께 마땅한 영광을 드리기에 무능하겠지만, 부족한 우리 능력을 다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차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써 구속해 주신 영혼들의 구원에서 가장 뚜렷이 빛나시는 것이므로 사도적 생활의 가장 높고 중요한 노력은 되도록 많은 영혼을 구원해 주고 성화시키는 일입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것인지, 즉 하느님의 영광을 도모하고 영혼들을 성화하는 길에 대하여 몇 마디 말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지식과 지혜를 갖추신 분이시기에 당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 우리가 계속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분명히 알고 계시며 특히 지상에서 당신을 대리하는 장상들을 통하여 당신 뜻을 밝히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은 순명이요 또 순명 하나뿐입니다. 물론 장상이 오류에 빠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 자신이 순명함으로써 오류에 빠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장상이 하느님의 법을 조금이라도 명백히 어기는 일을 명령하였을 때에 한해서 순명에도 예외가 인정되겠지만 이런 경우에도 신자가 하느님 뜻의 해석자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홀로 무한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인자하신 주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시작이요 마침이시며 지혜와 능력과 사랑 전부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밖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느님과 관련되는 한 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분 홀로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인간들의 구원자이시며 전 창조의 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지상에서 당신을 대리하는 장상들을 통하여 흠숭해올 당신의 뜻을 밝히 드러내시며,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도 당신께로 이끄시며 더욱 완전한 애 덕으로 당신과 결합시키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통하여 우리 자신의 품위가 얼마나 존귀하게 되었는지 알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명으로써 허약한 한계를 초월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닮게 되고, 하느님께서 무한하신 당신의 지혜와 슬기로써 올바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피조물도 저항 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우리 자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욱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와 슬기의 길이요, 이것이 최고의 영광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일 달리 더 합당한 길이 있었다면 분명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과 모법으로 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리스도의 긴긴 나자렛 생활을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로 요약 하였습니다. 나머지 생애도 순명의 표지로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으니, 여러 군데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고 알려 줍니다.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극진히 사랑합시다. 우리의 순명이 바로 이 완전한 사랑의 증거이어야 하겠습니다. 순명이 우리 자신의 뜻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더라도 순명이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진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읽어야 할 더 고상한 책을 우리는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원죄 없으신 동정녀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인자하신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에게 당신 자비의 분배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뜻이 바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봉헌함으로써 마치 성모님께서 하느님 손 안에서 그렇게 되셨듯이 우리도 성모님 손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의 지도를 받고, 성모님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보호 밑에서 마음 놓고 안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성모님이 보살펴 주실 것이고,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며, 영육간의 모든 어려움 중에 성모님이 우리를 기꺼이 도와주실 것이며 어려움과 불안도 그분이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1)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 본당 주임)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다.그것은 그가 단순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감방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적 행위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한평생 하느님과 성모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고 늘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 중에 살았기 때문이다.

 

매일의 사랑의 순교자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했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아사 감방에서의 죽음은 그의 거룩한 삶의 자세를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생애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준스카불라에서 아버지 줄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라이몬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막시밀리아노」)는 수도원에서 착의식 때 받은 이름임).라이몬도는 열심한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그러한 종교적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1907년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며 3년 후에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수련을 마치고 1911년 9월 5일 유기서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장상들은 그의 특수한 재능을 인정하여 그레고리안 대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학업 중이던 로마에서 그는 1914년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종신 서원을 했다.


다음해 10월 22일엔 그레고리안에서 최우수 성적을 인정받으며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허약한 중에도 학업으로 과로했던 그는 1917년 여름에 폐결핵에 걸렸고 그런 상태에서 그는 여전히 학업에 열중했다.


그 해 10월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다. 10월 17일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새로운 회원들은 끊임없이 늘어갔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생 그리고 노동이었다. 1918년 4월 28일 콜베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튿날 프라테의 성 안드레아 성당의 「기적의 제단」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학업을 계속한 콜베는 다음 해 7월 22일 같은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몹시 쇠약해진 그는 9월에 폴란드로 귀국했고 크라코프에서 교수생활을 했다. 10월엔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요양치료가 필요했고 결국 그는 자코파네의 요양원서 근 일년 동안 치료받으며 머물러야 했다. 그는 그곳에서도 사도직을 수행했는데 기회 되는대로 환자들을 방문하며 대화했고 가르쳤으며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받도록 했다.


병세가 호전되어 그는 크라코프에 돌아가 다시 일을 하였다. 1922년 1월,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했다. 장상의 명령으로 그로노드로 이동해서도 여전히 잡지를 발행했다.


처음엔 잡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보냈으나 많은 이들이 후원금을 보내어 계속 출간할 수 있었다. 5천 여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엔 배로 증가되었다.병이 재발하여 콜베는 다시 자코파네 요양원에 가 1년 반 동안 치료받았다.


그 기간 동안 그의 동생 알퐁소 신부가 대리로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했다. 그런 중에 1926년에 잡지가 4만 5천부로 늘어나 발행되었다. 중병에서 기적적으로 일어난 그는 그로노드로 다시 돌아 왔다.


1927년 10월 드루츠키 공작으로부터 땅을 기증 받게 되어 콜베는 출판부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니에포칼라누프)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판자집을 짓게 되었는데 주민들이 음식 준비와 노동으로 봉사하며 도와주었다.
그 해 11월 22일엔 드디어 성모의 마을에 입주했다.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발행 부수는 매년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27년 5만 부 발행되던 잡지가 8년 후인 1935년 70만 부로, 그후 5년 되던 1940년에 1백만 부에 달했다.


한편 콜베는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의 필요성을 느껴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를 발간했고, 외국인들을 위한 잡지로 라틴어로 쓴 「Miles Immaculatae」(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내었다.


그는 이어서 가톨릭 정신이 선명하게 부각되며 어느 당파나 개인적 이익을 초월하는 신문을 1935년 5월에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작은 신문」(Maly Dziennik)이었다. 훌륭한 편집에 저렴한 구독료, 무보수 독지가들의 판매 봉사 등으로 신문은 신속히 그리고 널리 유포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콜베는 그 성공의 비결을 알고 있었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작은 신문」의 출발점은 9일 기도였다. 콜베는 창간호가 나오기 9일 전부터 327명의 동료 수사들과 함께 단식과 많은 희생을 봉헌하며 성체 앞에서 밤낮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콜베는 성모의 마을이 창립 된지 3년이 되어갈 때 동양 선교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 동기는 어느 날 그가 기차에서 몇 명의 일본인 학생들을 만나 대화하던 중 하느님과 성모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관구장을 찾아가 일본에 성모의 마을을 세우고 선교하고 싶은 뜻을 표명했다. 장상들이 허락하여 그는 4명의 수사와 함께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다음해 4월 24일에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했다. 도착 후 만 한달 되던 5월 24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보를 고국의 성모의 마을에 보냈다.


『오늘 창간호를 보냅니다. 인쇄소를 설치했습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 만세! 막시밀리안. 』 콜베는 1931년 5월에 히꼬야마 기슭에 땅을 얻어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였다.


일본에 도착한지 2년 후 1932년 6월에 그는 새로운 성모의 마을을 설립하기 위해 인도로 떠나 에르나쿨람에 도착했다. 그곳 대주교로부터 인도 선교활동의 허락을 얻었다. 그는 일차 사명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 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36년 6월에 갑자기 콜베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해야 했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 온 후 심한 박해와 시련이 닥칠 것을 예감하며 자주 언급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전쟁이 절박해옴을 예감했으며 수사들이 영적으로 그것에 대비하도록 촉구했고 자신의 고난에 관해 예고했다.


드디어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고 같은 달 19일 나치스 헌병들이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암티스 수용소와 오스체슬로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그들은 성모의 마을로 돌아 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복간했다.


1941년 2월 17일 나치스 비밀 경찰에 의해 콜베가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다.

그곳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 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좥죽음의 수용소좦로 불리던 오셴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절망하는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영적 강화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수감자 탈출 사건이 일어나 같은 감방에 있는 10명이 소장에 차출되어 아사형에 처해졌다. 처자를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콜베는 그 대신 아사실을 자원했다. 절규와 비탄이 흐르던 생지옥 같은 아사실은 콜베 신부로 인해 기도와 노래를 부르는 천국의 모습으로 변했다.


형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명의 수감자들이 생을 마칠 때까지 기도해 주고 위로하던 마지막 생존자 콜베 신부에게는 경찰이 독약 주사를 놓았다. 그 때는 그의 나이 47세 되던 1941년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인 8월 14일이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2)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전기의 저자 마리아 비노프스카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것이 전기를 쓰게 된 동기라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친구 피에르가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에게 도전해왔다.


『살육이 자행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성인이 있단 말인가? 진정 성인,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 성인이 있다면 내게 보여달라!』


전혀 알지 못 하는 사람 대신 아사 감방에 들어가 죽은 콜베 신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 친구는 그 위인에 완전히 매료되어 인간을 재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을 다시 찾았고 끊어졌던 신앙의 유대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을 매료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콜베의 영성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에게 성모께 대한 신심, 사도적 영성 그리고 순교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적 영성을 이룬다.


성모 신심


어려서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콜베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오른 쪽 엄지손가락의 염증으로 뼈가 썩기 시작해 의사로부터 절단수술을 선언받았으나 루르드의 물을 구해 환부에 몇 차례 바른 후 완쾌의 기적을 체험했다. 그로 인해 그는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의 용감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모께 대한 콜베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의 일부를 어떤 이는 복음적 교리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성모의 기사로서 대장 성모께 대한 열렬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문제없이 포용될 수 있다.


그는 구원사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며 그에 맞는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그분은 인간이 예수께 나아가기 위하여 통해야 할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콜베의 성모께 대한 신심의 정통성과 탁월함은 교도권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에서 콜베를 『마리아의 신비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찬미했던 위대한 성인들과 긴 안목을 지닌 성인들의 반열에 계신 분』으로 선언한 것이다.


사도적 영성


콜베의 선교사명과 활동 수행은 성모신심 안에서 더욱 성장해 나갔다. 그것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을 통하여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성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콜베는 일생을 통해 「성모의 기사회」 운동을 추진하고 확산시키면서 선교하였다. 이 운동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진해 나갔다.

 

이 잡지는 1939년에 폴란드에서만 1백만 부를 돌파했다. 점차적으로 「성모회 기사회」의 계획은 폴란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 안에서 발전했는데 2차 세계 대전 즈음엔 650 여명의 수도자와 180명이 넘는 지원자가 거기서 살며 일했다.


콜베는 폴란드에서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 되던 해 동양 선교의 사명을 느끼며 일차 대상으로 일본을 선정했다. 장상의 허락을 얻은 그는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일본으로 떠났고, 도착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잡지를 출간했으며 두 해 후엔 성모의 마을을 세웠다.

 

선교에 대한 콜베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 세계 도처에 성모의 마을건립을 추진하며 복음화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일본을 향해 가던 중 사이공에서 콜베는 안남의 신부들과 접촉하여 그곳에서 성모의 기사 잡지를 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으며 상해에서는 부호 로팡호로부터 중국어로 잡지를 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제공 약속도 받았다. 그는 한 편지에서 선교의 포부를 이렇게 전개했다.

 

『우리들의 사업이 일본에 단단히 뿌리 내리면 인도로 건너가 사업을 벌이고 다음에 아라비아인들을 위해 베이루트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터키어, 페루샤어, 아라비아어, 히브리어로 잡지를 발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모의 기사회의 활동은 10억 독자, 즉 지구의 반에 미치는 것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지 2년 후 그는 인도에 가 에르나쿨람 대교구장으로 부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폐결핵과 과로로 몹시 쇠약했으나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선교 활동에 온통 투신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수용소 안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는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콜베는 고해성사, 영적 훈화, 상담 등을 통해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데 전력했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의 사도직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수용소 안에서 그러한 사도직 활동 뿐 아니라 그의 모범적 사랑의 삶과 특히 헌신적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었으며 큰 위안이었고 복음 선포 자체였다.


순교의 영성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대신 아사실을 자청했던 콜베의 순교자적 죽음은 갑작스런 영웅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일군으로서, 성모님의 기사로서 그의 일생의 삶은 나날이 순교의 준비였으며 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헌신적 죽음은 그가 일생 살아온 방식의 마지막 귀결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사롭지 않은 신비체험을 했다. 어느 날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색의 상자였다. 그분은 다정스럽게 콜베를 바라보며 어느 것을 원하시는지 물으셨다. 흰색의 상자는 순결을 뜻하고 붉은 색의 관은 순교를 뜻한다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콜베는 둘 다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라지셨다.

 

이 발현 사건은 콜베가 죽은 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료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1941. 10. 12)에서 밝혀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 사건을 말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므로 그의 체험이 사실이었다고 확신했고 그가 순교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주님께서 가르치셨고 실천하신 이 사랑을 콜베는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을 예감했고 그것을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예고했다.

 

그는 또한 십자가, 고난 그리고 순교적 죽음으로 던져지는 것이 주님의 구원 사업 완성에 유익한 협력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나 간수들은 콜베가 감방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주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수용소와 아사 감방에서 실천한 놀라운 사랑을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쉬운 일이 돌아오도록 결코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가장 힘든 일을 선택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쇠약했지만 자신의 몫의 음식을 자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애덕을 실천했다.


감시원들의 엄격한 경계와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들에게 사제로서의 임무를 기회 되는대로 부지런히 수행했다. 콜베의 기도와 격려 고해 성사와 영적 훈화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로, 희망, 용기를 얻었으며 절망과 자살의 유혹을 극복했는지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콜베의 아사행 자원은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 이상의 동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즉 9명의 다른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잔악한 그 곳을 사랑으로 정복해 나갔다. 미움을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는 기도로 바꾸어 나갔다. 콜베의 영웅적 사랑은 간수들에게조차 충격적인 것이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8일]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막시밀리안 콜베 (3)

 

 

1) 콜베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성모의 기사회를 창립한 때는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세 어린이에게 나타나시던 해이며 러시아가 공산화되었고 반 교회적인 비밀 결사단 프리메이슨(Freemason)이 로마에서 대담하고 난폭하게 활동하던 1917년 10월 17일이었다.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고, 그 목표는 죄인들, 이교도들, 이단자들 및 반 교회 비밀 결사단원들의 회개를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의 성화를 위해 성모님의 보호와 전구를 빌며 활동하는 것이다.


이 기사회의 운동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통해 추진해 나간다.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날마다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봉헌 기도를 바친다. 기적의 메달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기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에 임한다.


성모의 기사회는 1918년 4월 4일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인준되었으며, 1926년 12월 18일 비오 11세는 이 기사회에 특정한 권한과 대사를 허락했고 1927년 4월 24일엔 전 세계에 이 신심 단체의 지부 설립을 허락했다. 한국 교회엔 1976년 5월 20일 대구 대교구장으로부터 교구 내에 지부 설립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인천 교구(1982. 2. 16), 마산 교구(1986. 9. 3), 서울대교구(1986. 12. 12), 부산교구(1986. 12. 20), 대전교구(1986. 12. 30), 전주교구(1987. 1. 14) 등 여러 곳에서 지부 설립을 승인 받아 수 만 명의 회원들이 기사회 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2) 콜베는 매스 미디어(대중 매체)를 통한 선교의 선구자였다.


'매스 메디어에 관한 교령'을 통해 복음 선포와 교육에 대중 매체를 활용할 것을 권장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30 여 년 전 콜베는 이미 그 위력과 효율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콜베는 우선 출판물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는 데 열중했으며 놀라운 결실을 얻었다. 그가 동료 수사들과 1922년 1월 창간하여 제작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의 부수는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24년에 1만 2천부, 1927년 5만부, 1929년 11만 7천 5백부, 1931년 43만 2천부, 1935년 70만부, 1939년엔 1백만 부에 달했다. 그는 이어서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소년 기사'와 외국인들을 위해 라틴어로 쓴 잡지를 발간했다. 그뿐 아니라 가톨릭 정신을 선명히 드러내는 신문을 발행하여 신속히 광범위하게 유포시켜 대중을 포섭했다. 그러한 성과의 뒤엔 무엇보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자세로 콜베와 327명의 노동 수사들의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콜베는 방송국을 설치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영상을 통한 교육 및 복음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초기 단계였던 영화는 교회 안에서 윤리적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며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선교용 가톨릭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일류 배우들을 기용하려 구상했고 성모의 마을 안에 소형 비행장을 지을 계획도 세웠었다.


콜베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출판물 뿐 아니라 현대의 과학 기술을 홍보 수단으로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던 선구자였다.

 

3) 콜베는 노동의 품위를 향상시켰다.


많은 지역에서 그러했지만 폴란드에서는 콜베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봉건주의 사상이 남아있어 수사 신부와 노동 수사 사이에 높은 담이 있었다. 노동 수사들은 개인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하층 계급을 대표하듯 중노동을 했던 것이다.


콜베는 수도회의 설립자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복귀하는 쇄신을 시도하였다. 민주적 사고 방식을 가지고 당시에 일대 혁신을 이룩한 성 프란치스코는 일생 사제 아닌 평 수사(부제품은 받았음)로 살았다. 콜베는 수도원의 관행적 차별을 파기하면서 노동 수사들을 수사 신부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던 제 일선의 지위로 높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득권 층에 있던 일부 사제들로부터 저항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창립자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철저한 청빈과 모범적 순종의 자세, 순교자적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열렬한 애덕은 함께 살며 공동 작업을 하던 동료 수사들로부터 존경과 사랑 그리고 적극적인 협력을 얻도록 했다.


한편 콜베는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수도복을 입은 채 기계를 다루며 일하는 모습의 사진을 잡지의 일부 면에 삽입하곤 했다. 그것은 수도자들은 종일 기도만 한다든지 혹은 노동이란 농사일을 하는 것만으로 생각하던 일반인들에게 발전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는 수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4) 콜베는 신앙 때문에 직접 박해받진 않으나 이기심과 편이주의에 안주하도록 유혹 받는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현실적 귀감이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 13)고 가르치셨고 인류 구원을 위해 실천하신 주님의 모범을 따라 콜베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며 목숨을 바쳤다. 그가 실천한 그 최고의 사랑은 나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시는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떻게 그런 은총이 가능했을까? 성령의 부르심과 이끄심에 민감히 깨어 응답하는 믿음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언제나 주님께 모든 것을 내 놓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용의로 매 순간 결단을 내리며 증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기서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는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추구되어야 할 실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 우리는 목숨을 내놓는 상황에 살고있진 않으나 물질 만능주의와 무신론적 분위기가 확산되어 편이와 이기심에 안주하도록 끊임없이 유혹 받으며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선 매일 매 순간 순교자적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그렇게 길들여진 복음적 삶이 본 의미의 순교가 요구되는 극한 상황에 처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은총에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며 보증임을 순교자들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우리는 콜베의 생애에서 재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5) 콜베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 외에 우리 땅을 밟았던 또 한 분의 성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해 준 분이다.


그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을 가로지르며 한 여행은 너무나 굉장해서 모두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당시 한국의 성당 숫자에 대한 정보는 맞지 않는 것이지만 콜베가 그 때 한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15일]

 

그 사람 대신 나를 데려가시오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1894~1941, 축일 : 8. 14)

 

정재성 요한 신부(대구대교구 지산성당 보좌)

 

 

이번 호에서는 성녀 에디트 슈타인(1891~1942)처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Maxilian-Maria Kolbe(1894~1941) 신부에 대해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이 성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프랑스 루르드를 방문하면서였다. 나는 성녀 베르나데뜨 수비루스(수도명 : 마리-베르나르 수녀, <빛> 2001년 2월호 59쪽 참조)가 원죄 없으신 성모의 발현을 목격했던 루르드를 순례할 때마다 온 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베르나데뜨 성녀는 10살 때 화재로 인해 방앗간 집을 잃어버리고, 옛 감옥이었던 건물 ‘까쇼Cachot’로 옮겨 살았는데, 오늘날 ‘까쇼’ 옆에는 콜베 성인에 관한 안내소가 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께서 ‘성모무염시태’(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반포하신 지 4년 뒤인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총 18번의 성모발현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루르드 성모발현’이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프란치스코회의 성모기사로서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널리 전파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그의 공동체가 프랑스 루르드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유학시절 당시, 루르드에서 활동하시던 수녀님들 중 콜베 신부님의 영성을 배우고 싶어서 수도명을 ‘막시밀리안’으로 선택했다는 수녀님이 계셨다. 순박하고 겸손하며 훈훈한 인정이 감도는 그 수녀님을 만나면서 참으로 수도자다운 수도자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서도 루르드에 들를 때마다 한국인 특유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16670번, 더 힘든 일만 하는 이상한 죄수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준드스카-볼라Zundska-Wola에서 아버지 줄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슬하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콜베는 레이몬드Raymond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열심한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체득한 그는 1907년 14세 때 라부프 소신학교에서 공부했고, 3년 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 마리아 수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중인 1914년 11월 1일에 종신서원을 했고, 이듬해 10월 22일,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 여름, 폐결핵에 걸린 상태에서도 학업을 계속했던 그는 그해 10월,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쪺를 창설하였고, 1918년 4월 28일 사제성품을 받았다.

 

1927년 10월, 땅을 기증받은 그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폴란드와 여러 나라에 전파)을 건설했는데, 10년 후 이 회의 수사들의 숫자는 762명에 달했다. 1930년부터 1936년까지 일본에서 선교사로 있었을 때도 열정적인 성모신심 덕분에 나가사끼 교외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정원’(성모 관련 기구)을 창설하였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1939년 9월)했을 때, 9월 19일 콜베 신부는 동료 수사들과 함께 게슈타포(나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하지만 1941년 2월 17일에 다시 체포되어 파비악형무소에 갇혔는데,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하였다. 5월 28일, 드디어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어 감금되었고, ‘16670’번이라는 죄수번호를 받았다. 감시원들의 엄격한 경계와 금지조치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영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또한 자신에게 보다 쉬운 일이 돌아오도록 애쓰지 않았고, 오히려 가능하다면 다른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자신이 가장 힘든 일을 선택했으며, 1917년부터 앓았던 폐결핵으로 인해 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의 음식을 자주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애덕을 실천하였다.

 

7월에 죄수 한 명이 도망친 사건 때문에 같은 감방에 있던 10명이 아사형(죄수를 굶겨 죽이는 사형제도)에 처해졌다. 그때 콜베 신부는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애원하던 동료를 대신해서 아사실을 지원하였다. 절규와 비탄만이 가득한 생지옥이었던 아사실은 그의 덕분에 기도하고 노래하는 천국처럼 변했는데, 그 모습을 줄곧 지켜보면서 간수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9명의 수감자들이 굶어죽을 때까지 공포와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위로해주던 그는 결국 1941년 8월 14일, 47세의 나이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약주사를 맞고 서거하였다.

 

위대한 영적 저항

 

그러면 콜베 신부의 영성과 업적에 대해 요약해보고자 한다. 먼저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과 투쟁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하였다. 1918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로부터 인준된 이 회는 현재 한국에서도 대구, 인천, 마산, 서울, 부산, 대전, 전주 등 여러 도시에서 지부설립인가를 받아서 수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또한 콜베 신부는 복음선포를 위해 출판물 뿐만 아니라 현대과학기술(방송국, 영화 등)을 홍보수단으로 활용했고, 노동의 품위를 향상시켰다. 특히 그는 1930년 일본으로 가기 전에 잠시 한국땅을 밟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동생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볼 때 아마 한국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모님의 전구를 간절히 청했을 것이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폴란드가 고국인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비이탈리아계로는 529년 만에 교황에 선출되었다)는 당신과 같은 나라 사람인 콜베 신부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표명해왔고,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곳으로 여겨졌을 때, 콜베 신부는 오히려 그것을 고양시켰다. 동시에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했다. 그래서 콜베 신부의 희생행위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제안된 영적인 저항의 한 종류가 되었다.”

 

자기 자신도 극도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절박한 입장에 처한 이웃을 살리고 대신 자유로이 죽음을 선택했던(순교영성) 사랑의 순교자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에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에 시성되었다. “누가 자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요한 15,13). 이처럼 일생을 하느님, 성모님과 이웃을 위해 살았고, 처절하리만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랑을 실천한 그는 어려운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인이다.

 

특히 그가 일생 지니고 살았던 ‘사도적인 열성’은 사제 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완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현재보다 더 영적으로 뛰어난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우리도 현재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생각, 말과 행동은 사도적인 열성에서 나오는 것들인지 아닌지를 올바로 식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마련해주신 ‘사도적인 열성’을 굳건히 하고, 이러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각자가 맡은 역할에 늘 충실히 하며 이웃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을 본받아 불굴의 의지, 인내력과 꺼질 줄 모르는 열정을 지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이 1920년 2월에 연중 묵상용으로 사용했던 생활규범 >

 

1. 될 수 있는 대로 위대한 성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2.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한 영혼의 구원과 자기 및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들이 완덕을 가진 하느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려라(성모의 기사회 제 3등급).

 

3. 자유의지의 대죄나 소죄도 거부하라. 그리고 과거에 대한 안정감, 잃어버린 시간을 열심히 보충하라.

 

4. 죄를 범했으면 뉘우치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지 말며, 할 수 있는 좋은 것을 꼭 하라.

 

5. 너의 규칙은 순명 =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뜻. 너는 하나의 도구.

 

6. 지금 하고 있는 것을 하라 - 좋든 나쁘든 다른 일에 눈을 돌리지 말라.

 

7. 사랑을 갖고 이루어진, 언제나 온유한 행위를 하라.

 

8. 질서를 지켜라. 그러면 질서는 너를 지켜줄 것이다.

 

9. 준비, 행동, 결론.

 

10. 언제나 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무제한적인, 지울 수 없는 소유물임을 명심하라 - 네가 누구이고 무엇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가질 수 있든지, 네가 하는 모든 것(생각, 말, 행동)과 네가 참는 것(기분 좋은 것, 나쁜 것, 무관심한 것)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모님이 그것들을 당신 마음 대로 하실 수 있도록 그와 함께 너의 모든 의향도 성모님께 소속시키도록 한다. 따라서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다시 만드시든지 보태시든지 떼어버리시든지 하실 수 있도록(성모님께서는 정의를 상하게 하실 줄 모르신다) 해야 한다.

 

너는 성모님 손길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바라시는 것만 하도록 하라. 성모님의 손길에서 모든 것을 받아라. 모든 것에 있어서 마치 어린이가 그 어머니 곁에 달려가듯이 성모님 곁에 가라. 모든 것을 성모님께 맡겨라. 모든 것은 성모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며, 단 하나도 너로 인해 생겨난 것은 없음을 기억하라. 너의 모든 활동의 열매는 성모님과의 일치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애련함의 도구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생명(매순간), 나의 죽음(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나의 영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 온전히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 바라시는 대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소서.’

 

11.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통하여,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필립비 4,13)

 

12. 내적 생활 :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빛, 2001년 9월호]

 

 

[살며 배우며] “저 사람 대신에 내가 죽겠소!”

 

 

“저 사람 대신에 나를 죽여주시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 신부요. 저 사람과는 달리, 딸린 자식과 아내가 없는 천주교 신부이니 나를 죽여달라는 말이오.”

 

결국 신부님은 아사 감방에서 보름 동안 지내시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의 우리와 동떨어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반세기 전에 있었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폴란드에서 태어나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1894-1941년)입니다.

 

2000년 가톨릭 교회 안에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이 세상을 밝힌 성인들이 무수히 많지만 콜베 신부님의 삶과 순교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평소 삶도 삶이려니와 이름도 모르는 낯선 이웃을 위해 선뜻 목숨을 내놓으신 결단 때문입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1941년 독일 나치스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어느 막사에서 한 명이 탈출하자 수용소의 벌칙에 따라 그 막사의 포로들 가운데 뽑힌 10명이 아사 감방(굶겨 죽이는 형벌의 감방)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죽음의 대열 속에서 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와 “제발 나를 살려주시오. 내게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소.”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크나큰 존경을 받는다는 이유 하나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지내던 콜베 신부님은 이 처절한 모습을 광장에 도열한 채 지켜보시다가 동료 포로들을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저 사람 대신에 나를 데려가시오.” 그 길로 콜베 신부님은 아사 감방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받으시다가 결국 보름 만에 생을 마치셨습니다.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회 수도자였던 콜베 신부님은 당신의 조국 폴란드에 유물론적 공산주의와 물질 숭배 사상이 한창 밀어닥칠 당시, 정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성모의 기사회’를 창립하여 젊은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특히 1930년 선교사로 일본으로 파견되어 가시던 도중에 부산을 잠시 들르기도 하셔서 우리와는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극악하고 잔혹한 학대가 감행되었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기아와 혹사와 고문 속에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라고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낯선 동료 한 사람을 위해 온전히 목숨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숭고한 삶을 세상에 널리 알려 모범으로 삼고자 콜베 신부님을 1971년에 복자로, 1982년에는 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8월 14일은 바로 콜베 신부님의 지고한 삶을 기억하는 기념일입니다.

 

[김진복 편집장, 경향잡지, 2002년 8월호]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7.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상)

 

성모 신심 깊었던 '자비의 순교자'

 

 

-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

 


1941년 7월 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10명이 끔찍한 지하 감방에서 굶어 죽어야 했다.

 

수용소장은 죄수들을 불러 세워 놓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라냈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울며, 동료들과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그런데 10명에 속하게된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갑자기 울부짖으며 말했다. “저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요!”

 

그때였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수인번호 16670,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Maximilian Kolbe)였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지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굶주림 속에서 하나 둘 죽어갔다. 하지만 콜베 신부는 2주 이상 물과 음식 없이 생존했다. 그러자 독일군은 콜베 신부를 포함한 나머지 생존자 4명에게 독약을 주사했다. 1941년 8월 14일, 콜베 신부 나이 47세였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이튿날인 8월 15일, 수용소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다. 평생 동안 깊은 성모 신심 안에서 머물렀던 콜베 신부의 몸은 그렇게 성모승천대축일에 한줌의 재가 됐다.

 

 

생애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는 눈이 총명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둘째 아들 ‘콜베’를 얻었다. 태어난 후 바로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막시밀리아노’라는 이름은 훗날 수도회 입회 뒤 착의식에서 받은 이름이다)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유난히 강한 성모 신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7년에 콜베 성인은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이때 장상들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보인 콜베를 로마로 유학 보낸다(1912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신앙적으로도 갈수록 깊이를 더해가는데, 특히 1917년 폐결핵을 앓던 중에도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했다. 성모의 기사가 실행해야 할 것은 기도, 좋은 표양, 고행, 그리고 노동이었다. 이듬해인 1918년 4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1919년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고국인 폴란드로 귀국해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콜베는 본격적인 ‘성모 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유난히 강한 성모 신심을 가졌던 콜베 신부는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를 창설해 기도, 좋은 표양, 고행, 그리고 노동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

 

 

1922년 1월에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이 잡지는 현재 한국에서도 발행되고 있다)했다. 처음 5000여 부 발행되던 잡지가 1925년 1만 부, 1926년 4만 5000부, 1927년 5만 부, 1935년 70만 부, 1940년에 100만 부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콜베 신부는 또 1935년에 가톨릭신문을 발행했는데 이 신문도 크게 성장했다. 콜베 신부는 이 모든 것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겼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회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즉시 일본 선교를 희망,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후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의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폴란드로 귀국한다. 이때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한다. 결국 1939년 9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범했으며, 콜베와 동료 수사들을 체포해 수용소에 억류했다가 석방했다. 콜베 신부는 이후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다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혔으며 2월 28일 아우슈비츠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6개월 후 생을 마감했다.

 

콜베 신부는 1903년 일본으로 가기 위해 한국의 부산에 잠시 들른 일이 있다. 그때 동생 신부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멈춘 부산에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후 배를 타려면 4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을 이용해 미사를 드리고 싶었다. 한 경찰관으로부터 그 도시엔 여섯 개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는 것과 성당은 한국을 통틀어 세 개쯤 될까 말까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쯤 성모께서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에 당신 아드님의 나라를 세우실까?”

 

 

-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자비의 순교자’(Martyr of Charity)라는 칭호로 시성하였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또 성모 마리아에게 매우 특별한 공경을 바친 성인이다.

 

 

성모기사회

 

성모기사회는 1917년 10월 16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창설한 국제 성모신심 단체다. 회원들은 원죄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죄인들의 회개, 이교도,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및 개인 성화를 위해 활동한다. “성모기사회의 목적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은총없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모기사회는 현재 5개 대륙 5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창설 이후 현재까지 550여 개 지부와 30여 개 본부가 교회법에 따라 설립됐고, 전체 회원 수는 약 400만 명에 이르고 있다. 한국 본부는 경기도 양평에 소재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성 정하상 바오로 수도원’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031-771-6133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20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7.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하)

 

아우슈비츠에서 '평화' 전도한 사제

 

 

- 콜베 신부는 인간이 만든 지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영적 훈화·고해성사 등을 통해 사제직을 실천해 나갔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콜베 신부는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 영적 훈화, 상담 등을 통해 지옥에 평화를 심는데 전력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잔학한 장소에서 사제직 실현을 위해 땀 흘린 것이다. 그는 미움을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는 기도로 바꾸어 나갔다. 비록 사제로서의 행동이 때론 발각되어 심한 고문을 받기까지 했지만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복음 선포 그 자체였다. 콜베 신부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콜베 신부는 소년 시절, 예사롭지 않은 신비체험을 했다. 어느 날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는 흰색 상자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색 상자였다. 성모님은 다정스럽게 콜베를 바라보며 어느 것을 원하시는지 물으셨다. 콜베가 두 상자가 무엇을 뜻하느냐고 묻자 성모님은 흰색의 상자는 순결을 뜻하고, 붉은색은 순교를 뜻한다고 하셨다. 설명을 들은 콜베는 둘 다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라지셨다.

 

콜베 신부의 일생은 성모님과 함께한 삶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을 통해 콜베 신부를 “마리아의 신비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찬미했던 위대한 성인들과 긴 안목을 지닌 성인들의 반열에 계신 분”으로 선언했다. 콜베 신부는 특히 원죄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다.

 

“원죄 없으신 성모.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상입니다. 우리가 성모께로 나아가 성모를 닮은 자가 되며 온전히 제한 없이 성모의 소유물이 되는 것, 또 성모께서 우리의 마음과 전 존재를 지배하시고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통하여 사시고 일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이상입니다.”

 

“원죄 없으신 성모를 알기 위해서는 학문적인 정의(定義)나 구별, 의논 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보다는 겸손한 기도와 일상생활에서 가질 수 있는 사랑의 체험이 더 중요합니다. 이 체험을 통해 원죄 없으신 성모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합시다.”

 

이 같은 열정은 ‘성모의 기사회’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특히 이 운동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세상에 퍼져 나갔다. 콜베 성인이 설립한 성모의 기사회는 1918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로부터 인준되었으며, 1926년 비오 11세는 이 기사회에 특정한 권한과 대사를 허락했고, 1927년 4월 24일엔 전 세계에 이 신심 단체의 지부 설립을 허락했다. 우리나라에도 1976년 5월 20일 대구대교구장으로부터 교구 내에 지부 설립 승인을 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인천교구(1982. 2. 16), 마산 교구(1986. 9. 3), 서울대교구(1986. 12. 12), 부산교구(1986. 12. 20), 대전교구(1986. 12. 30), 전주교구(1987. 1. 14) 등 여러 곳에서 지부 설립을 승인 받아 현재 수만 명의 회원들이 모임을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이 운동의 중심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모 기사회 회원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고 날마다 봉헌을 새로이 하면서 봉헌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기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생활에 임한다. 모두 콜베 성인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콜베 신부는 모든 것을 성모님 안에서 이해했고, 성모님의 전구에 전적으로 의탁했다. 콜베 신부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구원사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며 그에 맞는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그분은 인간이 예수께 나아가기 위하여 통해야 할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막시밀리아노 성인께 고통당하기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기쁨을 가르쳐주셨습니까? 그분은 다름 아닌 성인께서 모든 것을 의탁하신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하면,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기쁨을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기도

 

원죄 없으신 잉태여, 죄에 물듦이 없으신 시초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는 시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無)에서 직접 비롯된 천사도 아니며, 땅의 흙으로 빚어진 아담도 아니고, 아담에서 비롯된 하와도 아닙니다. 또한 당신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잉태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성자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신 분이지만, 당신은 시작이기보다는 오히려 잉태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자녀들도 수태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저들에게도 잉태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당신의 잉태되심은 그들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원죄에 물든 잉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원죄 없으신 잉태입니다.

 

원죄 없음은 피조물로서는 최고의 완전함이며,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하느님과 닮으신 분임을 뜻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조금씩 조금씩 창조주와 닮은 자로 성장하여 끊임없이 보다 완전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 덕망 높은 사람 그리고 성인들을 보고 배웁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누구나 불완전할 뿐입니다. 오직 그분, 곧 원죄 없으신 성모만이 그 탄생의 순간부터 어떠한 죄도 아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히 본받아야 할 분, 우리가 당연히 곁에 모셔야 할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십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27일, 우광호 기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축일 8월 14일)의 생애

 

 

성모님의 성화 앞에서 기도하던 한 소년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자 소년은 성모님께 “성모님, 저에게 뭘 주시겠어요?”라고 청합니다. 성모님은 흰 꽃이 그려진 왕관과 붉은 꽃이 그려진 왕관을 보여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두 개 다 주세요.”라고 욕심스럽게 답합니다. 이렇게 어릴 적 욕심처럼 순결의 흰 왕관과 순교의 붉은 왕관 모두를 쓰신 성인이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입니다.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직후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는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강한 성모님 신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11년 18세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막시밀리아노라는 새로운 이름의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성모기사회를 창설합니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 ‘성모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22년 1월에 콜베 성인은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기사(1935년 70만부 발행, 1949년 100만부 발행)’를 창간하였으며, 1927년 10월에는 ‘원죄 없으신 성모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에 있는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했습니다. 이즈음은 나치 독일의 침략 야욕이 가시화되던 시기였기에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합니다. 결국 1939년 9월 나치 독일 군대는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 체포된 실질적인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콜베 신부는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주위의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또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 데 전력하였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발각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갔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사제직무 수행은 불굴의 의지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훗날 순교로 꽃을 피웠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탈출에 성공하는 일이 발생하자 화가 난 수용소장은 자신이 세운 규칙을 내세우며 탈출한 사람이 속한 감방의 수감자 중 10명을 굶겨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10명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 대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굶어 죽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콜베 신부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 중 하나인 아사 감방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굶주림 속에 고통당하면서도 콜베 신부와 함께 죽음의 자리를 찬미의 자리로 바꾸었으며, 콜베 신부의 병자성사와 함께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마침내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을 때 나치는 독약 주사를 투약하였습니다. 이렇게 콜베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일이었고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시복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4월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막시밀리안 콜베 -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 세기의 수호자

 

번역 송영웅(바오로, 영일고등학교 재단이사)



막시밀리안 콜베(Maximilianus Kolbe, 1894-1941) 성인은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우지 근처에 있는 즈둔스카볼라(Zdunska Wola)에서 태어났으며 라이문도(Raimund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복되신 성모님께 깊은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성모님께서 환시 중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두 개의 왕관을 보여 주셨는데, 하나는 순결의 왕관이고 다른 하나는 순교의 왕관이었다. 성모님께서 그에게 어떤 왕관을 택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겁도 없이 두 개 모두 선택하겠다고 답을 드렸다. 그의 생애는 환시 속에서 성모님과 이러한 대화를 나눈 다음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1910년 9월 4일 라이문도는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다. 착복식 때 그는 수도명으로 막시밀리안(Maximilianus)을 택하였는데, 우리는 이 이름으로 그분을 공경하고 있다. 막시밀리안은 1918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이어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917년 10월 16일 성모 신심을 널리 고양시키기 위하여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회’(Militia Immaculatae)라는 모임을 창설하였다(이 단체를 ‘성모기사회’라고도 한다).

1920년 막시밀리안 신부는 결핵으로 한 차례 큰 고통을 받아 2년 동안 환자 요양소에서 투병생활을 하였다. 완치된 후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로 돌아간 그는 성모기사회에서 자기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였다. 그리고 1930년 일본이나 인도와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성모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널리 전파시키기 위하여 아시아로 건너갔다. 1936년 그는 새로운 소임을 밭게 되어 폴란드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고국으로 돌아오던 해에 독일이 폴란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그가 펼치고 있는 사도직으로 인하여 자신이 독일 군대가 제거하려는 표적이 되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1939년 그는 독일 비밀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다행히도 석방되었다. 하지만 1941년 2월 다시 체포되어 바르샤바로 압송되었다.

1941년 5월 28일 막시밀리안 신부는 다른 죄수 250명과 함께 독일 나치 정부가 인종말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세운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수용소에 수감된 신부들은 막시밀리안 신부와 마찬가지로 특별 처벌조의 표적이 되어 그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신부는 수용소 생활 내내 그의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치들은 절대로 우리의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 우리 마음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며 흠 없이 깨끗한 상태로 평화롭게 죽을 것입니다.”

1941년 8월 막시밀리안 신부는 폴란드 군인으로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F. Gajowniczek)라는 사람이 아사감방으로 이송될 처지에 있음을 보게 되었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죄수 한 사람이 탈출하면 그 보복조치로 다른 사람 10명을 아사감방으로 보냈는데 이 군인이 여기에 선택된 것이다. 이때 막시밀리안 신부는 독일인 수용소 소장에게 이런 말을 하여 그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나는 폴란드 출신의 천주교 신부입니다. 내가 저 군인을 대신하여 아사감방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 군인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으니 그를 대신하여 나를 그리 보내 주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조브니체크는 다시 대열로 복귀하였고 막시밀리안 신부가 그를 대신하여 아사감방으로 가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다른 9명의 죄수와 함께 아사조(餓死組)에 편성되어 물과 음식 일체를 공급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사감방에 수용된 이들은 저주하거나 울부짖지 않고 오히려 묵주기도를 드리고 성모 찬가를 노래하였다. 수용소에 근무하던 한 나치 간부는 이들의 깊은 신앙심과 불굴의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아 이들이 아사감방에서 지내는 기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를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두 주일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막시밀리안 신부와 다른 3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수용소 측이 보낸 사형집행인들에게 독극물을 주사 맞고 1941년 8월 14일 죽었으며, 다음날 이들의 시신은 화장터에 보내져 소각되었다.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막시밀리안 신부를 복자품에 올렸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순교자로 시성하면서 이분을 “고난으로 가득 찬 우리 세기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막시밀리안 신부님의 깊은 신앙심과 영웅적인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순교를 통하여 드러나는 죽음의 실체는 언제나 끔찍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순교자의 죽음이 그러한 끔찍스러운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비결은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고통보다도 훨씬 위대하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죽음마저 봉사를 위해 내어놓으신 막시밀리안 콜베 순교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이 사랑에 충실하셨으며, 온 일생을 통하여 그 사랑을 키워 갔고, 그리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이 사랑의 꽃을 만개(滿開)시키셨습니다. 수도자 막시밀리안의 전 생애를 가득히 채웠던 사랑의 결실이었던 이 사랑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행동으로 마침내 폴란드의 땅 위에서 활짝 꽃을 피워 냈습니다. 또한 이는 주님의 여종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와 특별한 방법으로 연결된 바탕에서 피워 낸 꽃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다른 소수의 사람들 역시 그러하였듯이,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특별히 가려 뽑으신 신비 안에 온전히 잠겨든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마음과 생각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특별한 방식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의 표징은 구세주의 구속 사업이며 이를 위해 예수님은 성모님의 무염시태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특별히 심오하고도 완전한 방법으로 이 신비 안으로 잠겨 들어가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한 방법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충만한 생명력 안으로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 안에 넘쳐나는 생명력 안으로 깊이 잠겨들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성 스타니슬라오(St. Stanislaus)라는 인물에 대한 여러 전설들이 인구에 회자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성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에 대한 전설을 지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드러난 사실들이 전설 이상의 것을 웅변하고 있으며 그가 일생을 통하여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분이 선택한 순교가 바로 그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의 축일은 8월 14일이다.

[교회와역사, 2010년 2월호]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9-08-14&s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9-08-14&s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9-08-14&st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9-08-14&stype=m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