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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성녀 축일 기념일등

+++ 성녀 헬레나 / 예수성심의 가경자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

 

St. Helena - CIMA da Conegliano.

1495.Panel.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축일:8월18일

성녀 헬레나 황후

ST. HELENA

Sant' Elena
Saint Ellen, or Helena, Empress

Sant' Elena Madre di Costantino
Drepamim (Bitinia), III sec. – ? † 330 ca.
Born : 250
Died : 330 of natural causes
Canonized : Pre-Congregation
Elena = la splendente, fiaccola, dal greco
Name Meaning :light; torch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브리텐 출신이라고 하나,

그녀는 소아시아의 드레파눔에서 250년경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의 장군인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 콘스탄틴이 태어났는데, 293년에 체살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안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다.

막시미안이 사망하자, 그의 취하 군인들이 콘스탄틴을 황제로 모셨고,

그는 그의 어머니께 아우구스따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크리스챤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 칙령을 반포케 하여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그후에 성녀는 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오랜동안 성지에서 살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그녀는 아마도 니코메디아에서 사망한 듯 보이며, 콘스탄티노블에 안장되었다.

 

*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an Costantino Imperatore 축일:5월21일

 

 

 

Constantine the Great and St. Helena

 

성녀 헬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으로 전해 오는데

그보다는 어쩌면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의 수호 성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관집 딸이었던 헬레나는 로마 장군 콘스탄티노 클로루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노 대제이다.

그러나 남편은 얼마 후 헬레나와 이혼하고 로마 황제 막시미아노의 수양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세상에서 불공평하고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 클로루스는 비록 황제의 수양딸과 결혼할 기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조강지처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착한 일을 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거나,

악한 일을 하라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책임이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로마 제국이 비로소 가톨릭에 자유를 준 것은 저 유명한 콘스탄티노 대제인데,

그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된 박해에서 흔연히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무수한 신자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평상시의 훌륭한 행동은

아울러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디오나 어머니 헬레나도

그러한 감화를 받아 은연중 가톨릭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곧 세례를 받고 후세에 성녀로서의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2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노가 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향은 소아시아의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이었으며

그녀의 양친은 명문의 집안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헬레나도 손수 벌어서 먹고사는 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부 중인 로마의 장교 콘스탄티오 클로루스의 눈에 들게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초산(初産)을 한 곳은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의 닛슈 시(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이며

그 아기의 이름이 곧 콘스탄티노였다.

 

 

The Vision of Saint Helena - VERONESE, Paolo

c. 1580.Oil on canvas,Pinacoteca, Vatican

 

콘스탄티노는 작은 콘스탄티오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오는 차차 승진해 막시미아노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온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노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인 콘스탄티노를 볼모로서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있는 리지니오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복받치는 야심은 마침내 부인을 희생시키려고 결심했다. 때는 292년의 일이었다.

 

헬레나는 억울한 마음을 억제하며 비참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아들 콘스탄티노는 인질로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오는 자기 야망대로 서 로마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나,

역시 사람은 죽을 때엔 본심이 돌아오는 법이다.

그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자 그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소환하려 했는데, 이것을 안 동 로마의 총독 리지니오는 콘스탄티노를 독살하려 했다.

겨우 난을 면해 아버지를 찾아간 콘스탄티노는

306년 아버지의 별세와 더불어 군부의 지시를 받아 그 후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독일의 트리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약탈한 그녀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저 유명한 미르비오교(橋)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얻자

곧 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추대를 받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을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

미화해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전에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불멸의 행복을 말하는 가톨릭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그녀를 평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헬레나의 몸은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어 그녀의 부유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나,

그녀는 빈민에게 희사하거나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으며,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도 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그 후 자기의 기념 도시인 동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그 수도로 정했다.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티나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326년에 이루었다.

그때 교회의 원수들은 옛날의 성스러운 유물을 없애기 위해 갈바리아 산상에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어딘가로 치워 버리고 그 대신 그 곳에다 베누스 여신의 동상을 세워 놓았었다.

헬레나는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겨우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헬레나는 또다시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주님의 승천지인 올리브 동산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고 많은 유물을 모시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했으나

얼마 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그녀의 상본은 보통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에 망토를 두르고

위엄을 갖춘 왕대비의 복장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밀라노칙령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

(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an Costantino Imperatore 축일:5월21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축일:8월18일
예수성심의  가경자 마리아 막달레나
Venerabile Maria Maddalena del Sacro Cuore di Gesù (Anna Bentivoglio) Clarissa
(Fiano Romano (Roma), 29 luglio 1834 – Evansville (Indianapolis), 18 agosto 1904 )
V. Mary Magdalena Bentivoglio
Born: 29 July 1834 at Rome, Italy as Annetta Bentivoglio
Died : 18 August 1905 of natural causes;

during the last half hour of her life witnesses say

that her wall crucifix gave off light which shone on her;

body incorrupt after 30 years

 

 

 


Mother Mary Magdalen Bentivoglio
of the Sacred Heart

 

 예수성심의 가경자 마리아막달레나는

1834년 이태리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선종하였다.

All my life I have asked God for crosses and now that He has sent them, why should I not be glad?
- Venerable Mary

 

 

 

Mother Mary Magdalen Bentivoglio
Foundress of Poor Clares in America

 





 

 

성인(聖人)은 어떻게 정해질까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덕이 높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하느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덕행에 대한 찬사가 많고 그로 인하여 기적이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지방의 주교가 그 인물의 언행, 저서, 기적 등을 엄밀히 조사한 자료를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며, 시복(諡福)을 신청합니다. 그러면 재판소가 설치되어 그의 덕행이나 신앙을 위한 죽음 등의 증거를 수집하고, 그것들은 전례위원회(典禮委員會)로 보내지게 되며,위원회에서는 이를 신중하게 검토한 뒤 복자(福者, Blessed)로 추천할 만하다고 인정되면 교황에게 보고하여 우선 "가경자(可敬者, Venerable, 가톨릭에서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붙이는 존칭)"로 선포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인聖人을 어떻게 추대할까요?
이어 교황이 시복조사 허가를 내리면 교황을 보좌하는 추기경들의 상임 위원회 중 하나인 시성시복성성(諡聖諡福聖省)은 본격적으로 그 인물의 생애, 덕행, 거룩한 평판, 직무, 저술 등에 대해 엄격하게 조사하게 되는데, 보통 기적이라고 믿어지는 사례가 입증되면(순교자의 경우는 예외)복자의 품(品)을 받습니다.
시복된 이후에도 그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확인되면 다시 시복의 과정과 비슷한 절차를 거쳐 교황이 시성(諡聖)을 하여 성인(聖人)으로 추대합니다.

 

언제부터 교회는 성인聖人들을 공경해 왔을까요?
’훌륭한 성인들은 사후에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는 믿음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부분이며, 오랜 전통을 가진 유대교 예언자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과 연관된 성지(聖地)에 대한 신심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 성인공경을 위한 성상이나 사진들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서 혹은 그 사람과 떨어져 있어도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숭배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성인들의 성상이나 사진들을 지니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사진을 보며, 그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되새겨 보는 한편, 내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을 왜 성인聖人들에게 기도할까요?
성인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성인들은 거룩한 삶을 살았고 하느님과 가까이 지냈던 분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통한 기도가 더욱 힘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성인들에게 전구(轉求, 성인들을 통하여 바라는 바를 간접적으로 구하는 기도)를 청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딸 수녀회에서)

 

◆ 가경자 ◆    可敬者   라틴어  Venerabilis  영어  Venerable  
   시복(諡福)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존칭. 시복 조사가 교황청 예부성성에 접수되면 시복 후보자에게 이 존칭이 주어진다. 한국 교회는 1857년에 처음으로 82명의 가경자를 갖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란 문헌을 교황청에 보냄으로써 시복 조사가 시작됐는데, 1847년에 이 문헌을 접수한 예부성성은 박해로 인해 한국 교회가 교구적 차원의 시복 조사를 할 수 없으나 이 문헌 자체가 순교자를 선정하는 데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교회법에서 요구되는 교구 조사를 대치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1857년 9월 23일 한국 교회의 시복 조사를 공식으로 접수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82명의 가경자가 탄생하였다. 이 82명의 가경자 중 79명은 1925년에 복자가 되었고, 1984년에 79명 모두가 시성되었다. 이어 한국 교회는 1866년 병인박해의 순교자 중 26명에 대한 시복 조사를 시작했는데, 이 중 24명이 1968년에 복자가 되고, 1984년에 성인이 되었다. 이들도 복자가 되기 전에 잠시 가경자의 칭호를 받았을 것이 확실하지만, 1918년 새 교회법의 반포로 가경자의 기간이 아주 단축된 이후렸으므로 이들에게 실제로 가경자 기간이 있었는 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이다. 1983년 새 교회법의 반포와 더불어 시복·시성의 간소화를 위한 개혁이 추진중에 있는데, 이 개혁으로 가경자의 의의가 더욱 약화되고 거의 유명무실해질 것이 확실하다.
(가톨릭대사전에서)

 

 ◆ 성인 ◆      聖人  라틴어  sanctus  영어  saint 
   신약성서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명칭으로 '성도'(聖徒) 또는 '성스러운 사람들'이라는 말이 쓰여지고 있지만(골로 1:2), '성인'이라는 칭호는 초기 교회서부터 성덕(聖德)이 뛰어난 분들에게만 불려져 왔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인은 생존시에 영웅적인 덕행(德行)으로써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 교회가 보편적인 교도권(敎道權)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하는 사람들, 또는 '성인록'에 올라, 장엄한 선언에 의해서 성인으로 선포된 분들을 가리킨다. 교회가 어떤 이의 성성(聖性)을 공인하는 것은, 그분이 하늘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라 전세계의 사람들이 그 성인에게 전구(轉求)를 구하여도 되고, 그분의 생존시 덕행이나 순교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언이요 본보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교회에는 103위의 성인이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제주성글라라수도회 홈에서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 복음적 교회생활
성녀 클라라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에 절대 순명하며 교회에 종속됨을 근본가치와 이 성소의 주춧돌로 삼았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심장 안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맥박이며 교회를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주는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이 공동체생활의 중심을 두고 있다. 교회의 딸로서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이 성체성사를 통해 한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으로 그의 신비체인 교회의 전 지체와 일치함으로써 교회를 지탱시켜 나아가고, 특히 나약하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지체들의 보조자로서 영적 봉사를 하는 것이 본회의 주요 소명이다. 이에 교회에 충성함으로써 교회의 어느 지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정신과 완전히 일치하여 복음을 생활함을 기본원칙으로 한다.

 

▒ 복음적 형제애
성녀 클라라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울삼아 상호 형제적 일치를 깊이 보존하며 복음 이상의 완성을 향해 나아감을 핵심으로 삼았다. 또한 이 심오한 자매적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되고 전 공동체가 하나되어 전 지체, 교회에 형제애 일치의 표징이 되고 활력을 주며, 이로써 누리는 기쁨은 복음적 생활의 결실이며 참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자매애 안에 복음 정신은 구체화되고,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는 그리스도 사랑 안에 모두 하나되는 구원의 신비를 실현하게 된다.

 

▒ 복음적 가난
성녀 클라라에게 복음적 생활은 성령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절대적 가난의 생활이다. 가난은 그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법에 의한 복음적 가난이다. 즉 구유에서 가난하게 나셨고, 십자가 위에서 맨 몸으로 달리신 가난한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가난하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생활로써 따름이 본 회의 영성에 근본을 이룬다.

순례자로서 단순과 겸손으로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며 기쁜 마음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작은 자의 생활이다. 즉 모든 것은 은총이며 하느님의 선물임을 의식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가난. 겸손)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성령의 자유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장차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마음을 두고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 안에서 늘 감사하는 참된 의미의 복음적 가난이다.

 

▒ 복음적 관상생활
성녀 클라라의 복음적 생활양식은 관상이다. 봉쇄된 수도원 안에서 깨끗한 마음과 주님의 정신으로 철저하게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고요와 침묵의 기도 생활에 있어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이 고요와 관상적 고독의 모범이다. 관상 중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뵈옵고 추구하는, 특히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모든 것 위에 감사하며 기쁨과 평화 중에 끊임없는 찬미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 본 회의 사도직이며 이는 하느님의 영원한 만민 구원계획과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관상생활은 교회가 그 현존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본질적 표징이 된다.

 

▒ 활동분야
우리의 사도직은 관상생활이며, 사도적 활동은 없다. 자급자족을 위한 한 수단으로 봉쇄 구역 안에서 소규모의 밭농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양식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나눔의 실천이며, 인근 주민과 같은 형태의 육체적 노동을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정신에 따라 택한 서민적 생활 수단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서 이 육체 노동은 낮은 자들의 수고를 함께 하는 것이며 고통 당하고 굶주리며 억압 당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과 함께 실생활로써 이 낮은 자되는 어리석음을 받아들여 창설자의 정신으로 복음적 가난과 단순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지향적 삶은 육체적 노동에서뿐 아니라 각자의 소임과 고유한 분야 안에서도 한 맥이 되어 기도와 침묵으로 살아 움직인다.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 아가 2,6; 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 아가 2,6; 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 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제주성글라라수도회홈에서)